현 마산향교라 이름 하는 진해향교는 1414년(태종 14) 진해현이 설치되면서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 이후 인조 때 재건하였으나 1920년 일제의 강압으로 철폐되어 창원향교에 통합되었다, 다시 1993년에 창원군향교로 재건되었다가 1995년 마산향교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전통을 따르자면 진해향교라 칭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우리지역의 지명이나 역사가 뒤틀린 것은 일제치하의 영향이 크며 특히 일제가 세운 학교에서 일제의 교육을 받고 의심 없이 사용하는 교육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의 얼을 세우려면 우리가 가진 고유의 명칭을 사용하고 일제에 의해 왜곡된 것들을 바로 잡으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진동면 교동리 549-1번지 진해향교 앞에는 3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景默契(경묵계)에서 默菴 李圭莘(묵암 이규신)의 덕행을 기려 1986(丙申 二月)년에 건립한 ‘默菴處士李公遺思碑(묵암처사이공유사비)’가 서있다. 默菴 李圭莘(묵암 이규신)의 본관은 경주이고, 옛 진해현 庠里(상리)의 경주이씨 세거지에서 살았다. 이규신은 蘆沙 奇正鎭(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유학하였고, 노사에게 여러 번 장려함을 받았다. 그는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쳐 인근에서 그에게 배움을 청하는 자들이 많았다. 또한 효자로서도 이름이 있었으니 義(의)를 행함에 바름이 있고, 배우고 가르침에는 부지런함을 우러러 花山 權龍鉉(화산 권용현)이 글을 짓고, 전주 李叔宰(이숙재)가 글씨를 썼다.
黙菴處士李公遺思碑
碑而稱遺思曷以哉 詩曰 民之秉彝 好是懿德 夫人有懿德 而好之固出 於生民之彝性 而其好之也 篤則必歌誦 而思之思之不已至勒石 而記之豈非其遺思之在人者深 而久不能忘耶鎮海之庠里 慶州李氏居之有默菴居士 諱圭莘 字復汝 一愚公諱華駿 子一愚公以文行稱 而公承襲庭訓 有學有行早治 公車業有能聲 既而棄之劬心經律己治家斬 然有法度隱居授徒勤 於接引一方之從 而請業者彬彬多興起奉二親存沒致慕其墓也 三年而日必哭喪除 而猶月一省癃年峻頂不懈沒身人 以孝稱蓋其行義之篤 教學之勤 爲鄉人士所誦慕 至其沒而長老之教 其子弟者必稱公 以爲法後進之向學者 歎其無所從 而爲歸也 於是嘗所從學者 及遠近之慕 公風者合謀 設契歲相會 而講遺誨者 有年既而復謀曰 誦於言不如鐫 於石之可永 其傳乃具一石將紀 其蹟而樹之里 旁屬李乙宰 及公孫謹雨遠來 徵辭於余 余惟公之行學 固可以垂後 而苟非諸人之篤 於樂善好義安能追慕 於數十年之後 而欲其久 而不泯耶 是可以警衰俗 而勵行義也 昔應山人思連處士不忘 則歐陽公 爲表其墓 而達其意處士 由是得傳然處士以惠恤 而公以教思 則豈非有優 於彼耶但余之文 不得如歐陽之傳 於後則是可愧也 己公生 以憲宗癸卯年七十 而歿于壬子云
甲午暮春 花山 權龍鉉 撰
鄕後生 全州 李叔宰 書
丙申 二月 日 景黙契 立
향교 앞에는 근래에 烏石(오석)을 깎아 세운 功績碑(공적비) 2기가 있는데 진해향교(마산향교)에 初代 典校(초대 전교)를 지낸 李炯揆(이형규)와 典校(전교)를 지낸 洪寅奭(홍인석)의 공적비이다. 이 비석에 대해서는 蓋棺事定(개관사정)의 고사도 있고 하여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
진해향교(마산향교) 내에는 삼강오륜 느티나무 노거수 아래에 1909년에 ‘大成至聖文宣王神位埋安碑(대성지성문선왕신위매안비)’를 세웠다. 비 전면의 우측에는 配享四聖(배향사성)을, 좌측에는 從享二十二賢(종향이십이현)이라는 글을 새겼다. 이 비는 1현 1향교라는 일제의 압력으로 인한 규칙 때문에 진해향교를 훼철하면서 공부자의 위패를 위시하여 4성, 22현의 위패를 땅에 묻고 세운 우리나라 유적으로 남아 있는 유일의 매안비이다.
출처 및 참조
창원군지-1994년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추연문집 권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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