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내서읍 중리 본동의 매국 냄새 풍기는 완천각

천부인권 2016. 11. 16. 16:02



<2016.11.06. 중리 완천각>

 

中里 玩川閣(중리 완천각)이 위치한 창원시 내서읍 중리 본동 입구인 내서읍 중리 1480-2번지는 함안으로 넘어가는 국도 1004(함마대로)변에 있으며, 농수산물시장교차로를 마주하고 있다. 비각의 정면에는 玩川閣(완천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내력을 알려주는 완천각기라는 記文(기문)이 걸려 있으며, 비각 안에는 馬山府內西面長崔將翰功德不忘碑(마산부내서면장최장한공덕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2016.11.06. 중리 완천각과 회화나무>

 

이 완천각은 당시 內西面(내서면) 출신이면서 초대면장을 지낸 崔將翰(최장한 1866~1951)의 공덕비를 보호하는 비각이다. 그는 조선이 망하여 한일합방이 되던 해 內西面長(내서면장)으로 부임하여 10년간 재직했다. 그가 재직할 당시에는 중리 일대에 수리시설이 없어 농토가 황폐한 채 버려져 있었다. 최장한은 私財(사재)를 투입하여 匡廬川(광려천)에 제방을 쌓고 上新洑(상신보)를 축조하여 일대를 비옥한 토지로 바꾸었다. 또한 周恤貧窮(주휼빈궁)에 앞장서니 백성(이 때의 백성은 일본천황의 소유물로서의 인간)들이 그의 공덕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19131020일 그의 鄕第(향제) 앞에 공덕비를 세우면서 옆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었는데 지금은 한그루만 남아있다. 최장한은 86세의 장수를 누리고 1951년에 죽었다.

 



<2015.03.19. 완천각 편액>

 

일제강점기에 일제로부터 벼슬을 했다는 것은 그의 행위가 매국노가 아니었다고 변명해도 결국은 매국노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최장한이 상신보를 만들면서 생겨난 땅을 자신의 소유로 하고 인근 백성을 소작인으로 이용하지는 않았을까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살아있을 때 공덕비를 만든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옛 선인들은 蓋棺事定(개관사정)’이라 말하며 산자의 비를 만들지 않았다.

崔將翰(최장한 1866~1951)白堂 鄭基憲(백당 정기헌 1886~1956)은 창원지역에서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다간 인물이다. 백당 역시 上南面長(상남면장)을 추천 받았으나 일제에게 이로운 일이 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훌륭해도 맡을 수 없다.”며 거부 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다.

또한 내서읍 상곡리에는 西臺(서대)라 새긴 비갈과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곳 출신 李元淳(이원순 1863~1932)1910년 경술국치와 1918년 고종 승하를 겪으면서 조선 멸망을 슬퍼하여 ()를 모으고 매일 北向再拜(북향재배)하고 지쳐 혼절하기도 했던 애통한 사연을 남긴 곳도 있다.





참조 및 출처

내고향의 전설-의창군

디지털창원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