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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석전동 정만석 찰방 선정비

천부인권 2016. 11. 14. 20:48



<16.11.06 석전동 정만석 찰방 선정비>

 

石田洞 鄭晩錫 察訪善政碑(석전동 정만석 찰방 선정비)는 조선 시대 近珠驛(근주역) 역참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을 역임한 鄭晩錫(정만석 1758~1834)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1785년에 세운 비이다. 원래 이 찰방 선정비는 조선시대 近珠驛(근주역)이 있던 일우근주아파트 맞은편 석전3교 앞 인근에 있었으나 도시계발로 인한 삼호로의 확장으로 갈 곳이 없자 지금의 장소인 마산회원구 석전동 산 11번지 溫陽(온양) 정씨 선산으로 이전하였다.





 

찰방 선정비는 하나의 돌로 加檐石(가첨석)을 만들고 비의 머리에는 연꽃 봉우리를 새기고(荷葉하엽), 아래의 비신과 함께 양각으로 도드라지게 만든 다음 비신에 글을 음각으로 새겼다. 재질은 화강암이다.





察訪善政碑(찰방 선정비)에는 가로로 察訪(찰방)이라 새긴 후 비신의 중앙에 세로로 鄭公晩錫善政碑(정공만석선정비)라고 적어 정만석 선정비임을 알게 했다. 좌측에 乾隆五十年乙巳三月日(건륭오십년을사삼월일)이라 적어 찰방 선정비가 1785년에 건립한 것임을 표기 했다.

공적을 찬하는 문구는 백성들을 잘 구휼한 점에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새겼다.

 

蠲吾役感公恩(견오역하시니 감공은이요)

우리의 부역을 면제해주셨으니, 공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祛吾痍飽公德(거오막하시니 포공덕이로다.)

우리의 고통을 덜어주셨으니, 공의 은덕에 배부르구나!

 




정만석의 호는 과재(過齋). 본관은 온양(溫陽). 1783(정조 7)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85년 성균관전적·병조참의를 거쳐 94년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그 뒤 여러 차례 암행어사로 나가 명성을 떨쳤으며, 98년 영일현감(迎日縣監)이 되었고, 1801(순조 1) 교리(校理)로 하정사(賀正使)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03년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재직시, 뇌물을 받고 쓰시마섬[對馬島]과의 통신서계(通信書契)를 위조한 역관을 처벌하였으며, 그 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과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민심수습을 위한 관서위무사(關西慰撫使)로 파견되었고, 15년 한성부판윤·호조판서를 지냈으며, 29년 우의정에 이르렀다.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고 시문에 능했다. 저서로 관서신미록(關西辛未錄)이 있다. 시호는 숙헌(肅獻).





<察訪鄭公晩錫善政碑>





廣輿圖(광여도)에는 창원부 서일면에 근주역을 표기하고 동일면에 신풍역을 표기 했으며, 자여찰방도 기록을 하고 있다. 그리고 찰방 선정비의 존재로 보아 석전동 찰방 선정비가 있던 곳이 근주역 자리인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노란 활살표가 있는 곳이 찰방비가 있는 곳>


출처 및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블로그-한별의역사속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