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6일 진해구 제덕동에 위치한 제덕동 팽나무 노거수와 제덕진성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이 비는「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서는‘卓有詳碑(탁유상비)’라 소개를 하고,「국립문화재연구소-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에서는 ‘大路開創碑(대로개창비)’라 소개를 하고 있다. 또한 문화유적의 이름만 소개하고 있는「문화유적총람」에도 ‘大路開創碑(대로개창비)’라 소개를 하고 있다.
碑座荷葉(비좌하엽) 양식의 卓有詳 大路開創碑(탁유상 대로개창비)는 제덕동 586번지에 있었지만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현 위치인 진해구 제덕동 915번지로 이전을 하여 세웠다. 비문은 풍파에 시달려 잘 알아보기 힘들다. 이 비의 전체 높이는 1.13m, 비신의 높이는 0.76m이다. 비의 뒷면에는 化主 徐德先(화주 서덕선)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가 세워진 것은 탁유상이 薺浦鎭(제포진) 萬戶(만호)로 재직 시 남문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개설하여 준 공덕을 기려 1705년에 주민들이 건립했다.
탁유상은 26세 때인 1678년(숙종 4)에 무과 정시 병과 31등 합격자로 楊州(양주) 출신이고, 본관은 加平(가평)이며, 전력은 閑良(한량)으로 기록 되어 있으며, 부친은 卓應男(탁응남)이다.
진해문화원에서 1996년 발행한 ‘진해의 비문’에는 이곳 제덕동에 碑座圭首(비좌규수) 형태의 安應奎記念碑(안응규기념비)가 사진으로 남아 있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없어 졌다고 한다. 왜 없어 졌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徐有應之墓(서유응지묘)가 있던 언덕은 공장개발로 완전히 평지가 되었고, 이 역시 어디로 묘비가 사라졌는지 모른다고 했다.
大路開創碑
蓋鎭城內南門路破[壞]曾欲移路未
果玆者行萬戶卓公有祥壬午七月
日鎭下三里各地董役城外始通大路行
人咸悅故其西三面各投扶物〇〇萬
戶之績焉
康熙四十四年九月日立
뒷면
化主 徐德先
비명의 내용을 위와 같이 옮겼고 내용을 보면
제포진성(薺浦鎭城) 안의 남문로(南門路)가 이지러져 일찍이 길을 옮기려 했으나 그러지 못하였다. 이분 행만호(行萬戶) 탁유상(卓有祥)공께서 임오(壬午;1702)년 7월 어느 날 진(鎭) 아래 세 마을에 일을 시켜 성(城) 밖으로 비로소 큰 길을 여니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그 서쪽 세 개 면에서 각기 물자를 내어 기리니 이는 만호(萬戶)의 업적이라고 밝힌 것이다.
강희(1705년, 숙종 31) 9월 어느 날 세우다.
뒷면
화주(化主) 서덕선(徐德先)
출처 및 참조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국립문화재연구소-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디지털창원문화대전
문화유적총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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