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시 소답동 퇴기백영월영세불망비

천부인권 2016. 11. 20. 07:49

 

 

 

<2016.11.19. 소답동 퇴기 백영월 불망비>

 

退妓白映月永世不忘碑(퇴기백영월영세불망비)는 의창구 소답동 927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북면고개 남쪽 기슭의 구룡사 입구에 있다. 비각의 우측에는 제법 큰 팽나무가 서있고 뒤편에는 구룡사의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위에는 아까시나무가 넘어져 있어 철거가 필요하다. 비각은 좌우 뒷면을 깎아 돌담을 쌓고 앞쪽은 적벽돌로 담장을 쌓았으며 화강암을 네모반듯하게 다듬어 기둥으로 세우고 철재문을 달았다.

이 비는 백영월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북동 주민들이 건립한 것으로 옛 비는 훼손되어 백영월 묘터 근방에 묻고 현재의 비는 북동 주민들이 197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閭閣(려각)을 대신해 비신(碑身)의 네 모서리 부분에 돌기둥를 세우고 팔작지붕 형태의 지붕돌을 얹은 형식의 비각(碑閣)을 갖추었다. 석재비각 안에 碑座直首(비좌직수)형의 烏石(오석)으로 비를 세웠으며 앞쪽에는 상석과 향로석을 배설해 놓고 있어 정기적인 享祭(향제)를 염두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례는 매년 음력 318일 북동노인정에서 북동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전체높이 170cm, 지붕돌 가로 152cm, 세로 98cm, 높이 40cm이고, 비신 높이 112cm, 너비 43.5cm, 두께는 19cm이다. 활주높이는 130cm, 두께 16cm이며, 상석은 가로 86cm, 세로 50.5cm이다. 향로석은 가로 22.5cm, 세로 21cm, 높이 20.5cm이다.

 

 

 

 

 

백영월은 3~4세 때 창원군 북동마을의 유지였던 하유언의 집 대문 앞에 버려졌다. 이에 하유언이 양녀로 받아들이고는 수소문하여 본이 수원백씨(水原白氏) 임을 알았고 이름을 白映月(백영월)이라했다. 백영월은 18세까지 하유언의 집에서 살다가 19세 때 가출을 하였다. 가출 후의 구체적인 행적은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을 사람들은 기생으로 돈을 모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마을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일본군 간부를 상대로 하는 기생 또는 첩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독립군을 자신의 집에 숨기기도 하였는데, 백영월이 상대하는 일본군 간부가 워낙 거물이라 가택수색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미상이다.

이 후 백영월은 큰돈을 모은 뒤 다시 하유언의 집으로 돌아와 북동마을에 자신의 전 재산을 희사하여 마을 발전에 큰 몫을 하는 한편 주민들에게도 큰 혜택을 주어 그 고마움의 표시로 비를 세웠다. 묘소는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고개 도로변에 있는데 상석에는 정부인수원백씨지묘 갑인시월칠일생 신유이월이십삼일간좌(貞夫人水原白氏之墓 甲寅十月七日生辛酉二月二十三日艮坐)’라고 적었다. 묘의 관리는 지금까지 북동마을청년회가 하고 있다.

 

 

 

 

退妓白暎月永世不㤀碑   퇴기 백영월 영세불망비 [해문 : 曉歌]
頌曰                            頌하기를¹⁾:
遺功北洞救民生            북동의 민생 구휼의 공 남기시니,
施德不㤀日夜誠            베푸신 은덕 밤낮으로 잊지 못한다.
我欲報恩賢女蹟            어지신 여인의 자취 내 보은코저
柱山南畔日碑成            천주산 남쪽 밭둑에 비 하나²⁾ 세우노라.
西紀一九七七年            서기 1977년
丁巳三月 日                 정사 3월 일
北洞民一同  再竪         북동 주민 일동이 다시세우다.

 

【주석】
頌하기를¹⁾ : 송(頌)이란 산문으로 내용을 나열한 뒤에 송덕비를 세우는 뜻을 요약해서 끝맺음을 할 때 사용하는 운문이다.
하나²⁾ : “柱山南畔日碑成”의 "日”는 “一”의 誤記인 듯

 

출처 및 참조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창원시사

 

 

 

 

 

 

 

 

 

 

<노란 활살표는 퇴기백영월영세불망비가 위치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