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구산면 난포리 효자 김봉주 포효비 褒孝碑

천부인권 2016. 11. 30. 06:00



<2014.12.31. 남포리 김봉주 효자비>

 

구산면 난포리 342번지에는 남포리 버스정류장과 함께 500년 된 팽나무 노거수가 자리를 하고 있으며, 노거수의 바로 뒤편에 남포리 김봉주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봉화산이 바다와 이어지는 끝자락이라 자 형태로 흙을 파고 돌로 석축을 한 다음 전면에 철문을 달고 그 안에 화강암으로 비대를 세우고 비신은 烏石(오석)으로 가로 길이가 긴 직사각형으로 했다.





비신의 전면에는 勅命(칙명) 通政大夫(통정대부) 金鳳周陞從(김봉주승종) 二品嘉善大夫者(이품가선대부자) 光武九年十月八日(광무구년십월팔일 1905) 大皇帝陛下 特命 加資時奉(대황제폐하 특명 가자시봉) () 淑夫人爲貞夫人(숙부인위정부인)이라 새겼다. 비의 뒷면에는 완의문의 원문을 새겼다.





비 앞에는 한글로 완의문 내용을 번역하여 적어 두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본소를 짓고 옛 성인의 묘를 중수한 것은 오륜행실에 있어 유교를 숭상하고 선을 장려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에서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와 간절히 상고하고 경남 유사 및 여러 선비들의 추천장에 의하여 창원군 구산면 남포리에 김봉주란 효자가 살고 있는데 벼슬이 통정대부이고, 본관은 김해요 흥무왕 유신의 후손으로(휘 극일 절효선생 장자 휘 건 군수 공 14세 손이다.) 바다 모퉁이 농촌에서 자라나고 집이 가난해서 배운 것은 없으나 천성이 지극히 효심이 깊어 어버이 섬기기를 진실로 효경의 가르침 대로였다. 1876년 큰 흉년이 들던 해 그 부친이 이질에 걸려 고생하던 수개월 동안 약을 사방으로 구하고 먼 장에 가서 쌀을 사는 등 정성을 다하여 병 구환을 하였으나 세상을 떠났다. 예를 다하여 장례를 모시고 어머니 의령 옥씨를 봉양함에 나이 40에 목공을 업으로 삼아 거리가 멀거나 가까우나 맛있고 귀한 음식이 있으면 반듯이 싸가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드리고 혹 부자 집에 일이 생기면 일정에 맞추어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묻고 살피고 보살펴 드렸다. 그러다 1903년에 천수를 다하니 슬퍼하고 통곡하기를 거의 죽음에 이르도록 하였다. 갈목산에 묘를 쓰니 그 묘 자리를 트집 잡다 송사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 곤욕을 피하기 위해 항상 어두워 지기를 기다렸다가 성묘를 다니니 밤길을 호랑이가 수십년을 하루 같이 안내해 주었고 산중 허리에 길이 나고 묘앞 절한 자리는 구덩이가 파였다. 슬프다 그의 효도는 하늘이 내린 것이로다. 인근의 모든 마을이 그의 효행을 칭송하고 사람이 의관을 차리고 본소에 추천하기에 듣고 감동하여 사실을 새기고 아울러 각비를 세워 그의 훌륭한 행적을 오래 전하고 널리 알려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완의문을 만든다. 19265월 유림향약 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