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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서읍 상곡리 이원순이 통곡한 서대

천부인권 2016. 12. 1. 16:24

 

 

 

<2015/4/3 상곡리 서대>

 

내서읍 상곡리 14-5번지에는 아들 당산나무라 불리는 상곡리 西臺(서대) 느티나무가 있는데 나이 100년이고, 가슴높이 둘레는 210cm, 높이는 13m 정도이다. 이 당산나무 아래에는 대한제국의 멸망이라는 비극을 함께한 창원지역 유림의 통곡을 담은 西臺(서대)라 적은 비석이 있어 지역의 역사를 아는 분들이 귀중히 여기는 곳이다.

 

 

 

 

 

요즘 새로 세운 서대의 해석비문에는 아래처럼 적어 두었다.

내서면 상곡리 읍산재 뒤에 있는 이 서대는 이 마을에 살던 성주이씨 원순이 1918년 광무황제 승하 시에 北向望哭(북향망곡)하던 곳이다. 이원순 공의 자는 도여(道汝), 호는 소여(小廬)라 하고 조선말 철종 1418631110일 상곡리 출생으로 어릴 때부터 재주가 능하야 晝耕夜讀(주경야독)하며 부모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셨다. 가훈을 준수하여 수신제가, 우국충정 또한 유별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조약 이후부터 1918년 광무황제 昇遐(승하) 시까지 오백년 국조 회복치 못하고 종묘사적이 망한 것을 통탄하기를 부모상 당한 것처럼 망곡자실 통곡하였다하여 친족 및 향민 일동의 뜻으로 대를 모으고 비를 세웠다한다. 대지 기증자 외손 심재완

 

 

 

 

 

李元淳(이원순 1863~1932)은 농사와 책읽기를 업으로 삼고 어버이 섬김에 정성을 다하는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었으며 가정생활에도 검소하였다. 초야에 묻혀 살았으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8년 고종 승하 시까지 조선 멸망을 슬퍼하여 상곡리 14-5번지 뒤편에 대를 모으고 매일 北向再拜(북향재배)했다. 고종의 죽음을 접하였을 때는 종묘사직이 망한 것을 통탄하기를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통곡하다 실신하기도 했다.

 

 

 

 

<2015.4.17. 서대와 느티나무 노거수>

 

이 서대를 만든 주인공인 이원순이 남긴 시를 비갈에 새겼으니 아래와 같다.

窮谷殘氓苟且生(궁곡잔맹구차생) 외진 골 천한 백성으로 구차히 살다가

西臺獨立哭呑聲(서대독립곡탄성) 서대에 홀로 서서 울음 삼키네

如喪自注顯泉淚(여상자주현천루) 상심한 눈물은 샘처럼 솟고

沾化難忘食土情(첨화난망식토정) 님의 정 잊지 못함은 군신지정 때문이라

天地如今渾入暗(천지여금혼입암) 지금처럼 천지가 암울해지면

山河河日快重明(산하하일쾌중명) 이 산하 어느 날 다시 맑아질까

才踈未敢謀宗國(재소미감모종국) 재주가 졸렬해 나라일 도모 못하고

頑命道延一縷輕(완명도연일루경) 모진 목숨 한 가닥만 겨우 이어가네

 

 

 



 西臺記
西臺之築何哉 李元淳 道汝甫傷 宋社之亡而 託意於謝皐羽痛哭之義也 君世卜于郡西 上谷山中耕讀爲業 事親誠理家儉甘貧守窮不求分外營占雖身在草茅恒懷憂國愛君之心 自庚戌以來往往憤涕粘襟及 至戊午聞光武昇遐警惶到 前日望哭之墟 失聲大通殆不能 自存因立石于側名之日 西臺匪直 爲如喪考實 以五百年國祚之也 嗟夫凡我三千里 生齒孰非食士之倫 而若此人者 能有幾昔皐羽當 皇明之未 見危亡之在呼吸非不自勝理 丹往來於子陵釣臺泄盡滿腔激烈之哀 而至今垂之於靑史愛國之誠 憤世之非有足 千古感涕矣 君嘗慕右以 爲期徵斯人 其誰與歸或曰 此地無 此臺非 其有而取以名之其可乎曰 此則不然苟人是 其人則何地非其地 而何異同之可言也 道汝歿其孫相華 特臺詩二夏及庚具和 數十篇問記於余 余方社戶傷時病廢者亦久矣 故國當日之事 尙何忍提起 而茅念與道汝 相知旣深且來者之勤 諸有不可辭其亦出於孝子 顯親之誠也 遂强起書所感者以歸之
丁丑元月日 盆城 金炳璘 書
                 盆城 金炳華 書于石

 

서대기(西臺記) 김병린(金柄璘)

서대(西臺)를 지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원순(李元淳) 도여(道汝)¹⁾가 나라의 종사(宗師)가 망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송나라 때의 사고우(謝皐羽)²⁾가 통곡한 뜻에 의탁하여 지은 것이다. 이군은 대대로 서상골 산속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을 가업으로 삼고 부모를 모시고 도리에 충실하며 검소하게 살았다. 가난을 달게 여기고 궁핍함을 지키며 안빈낙도하여 분수 외의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다. 몸은 비록 초야에 묻혀서 살지만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에 충성하는 마음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었다. 경술년 이래로 자주 분개의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다. 무오년에 광무제(光武帝)께서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마을 서쪽 조용한 곳을 찾아가서 대성통곡을 하며 실성한 듯하였다. 이 때 그 옆에 서 있던 바위를 이름하여 서대(西臺)라고 하였다.  이는 다만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때에 슬퍼함뿐만 아니라 오백년 사직이 무너져 나라의 운명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것을 탄식한 것이다. 아아 무릇 무궁화 삼천리에 사는 사람이 누군들 이 땅에서 난 것을 먹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사람과 같은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옛날 고우(皐羽)가 송나라 말기에 나라가 망하는 위급한 지경에 처한 것을 보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옛날 엄자릉이 낚시를 하던 조대(釣臺)로 배를 몰고 가서 마음 속에 가득 차 있던 격렬한 충정을 다 쏟아내었다. 지금까지도 그 일이 역사에 길이 전해져서 애국의 충정과 말세에 대한 비분강개가 천고(千古)에 감동의 눈물을 짓게 하는 것이다. 이군(李君)은 일찍이 옛날 성현을 흠모하여 그렇게 되기를 기약하였는데 이러한 사람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 것인가. 혹자는 “이 땅에 이 대가 없었는데 없는 것을 취하여서 이름을 짓는 것이 가한 것인가.”하였다. 이에 “그것은 그렇지 않다. 진실로 사람이 그 사람이면 어느 땅인들 그 땅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무엇이 같고 다르다고 말하겠는가.”하였다. 도여(道汝)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인 상화(相華)가 남겨진 시 두 편과 그에 화답한 시 수십편을 들고 와서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는 이때 문을 걸어닫고 시대를 상심하며 병으로 누운 지가 오래였다. 그러나 나라가 지금 당한 일을 생각하니 차마 몸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도여(道汝)와 서로 깊이 아는 사이이고 또한 그 아들의 감동스런 부탁을 받으니 사양할 수가 없었다. 이에 억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느낀 바를 글로 써서 그에게 주어 보내었다.


【주석】
이원순(李元淳) 도여(道汝)¹⁾ : 이도여(李道汝) : 이도여와 연관된 기록은 칠원민란에 연관된 다음의 기록이 있다. 1868년(고종 5) 경상도 칠원현(지금의 함안군)에서 일어난 민란. 현감 조현택(趙顯宅)의 탐학에 항거하여 일어났다. 주동자인 황상기(黃上基)·이도여(李道汝)·전홍이(全弘伊) 등은 통문을 돌려 민중을 규합하여 객사(客舍)에서 단체로 모여 곡(哭)하고 현감을 축출하였으며, 감옥을 파괴하였다. 이후 1869년에 의정부에서 그 죄를 물어 탄핵하였으나 큰 벌은 모면하였다.
사고우(謝皐羽)²⁾ : 사고(謝翶) : 자는 고우(皐羽), 고보(皐父)이며 복주(福州)사람으로 아버지는 약(鑰)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춘추(春秋)에 능하였다. 송이 망하고 원이 들어서자 끝없이 저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출처 및 참도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창원향교지(2004)-창원향교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2004.1)/삼덕정판인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