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웅천 남양동 열녀 박형직 처 정씨지려

천부인권 2016. 11. 28. 08:21



<2016.11.09. 남양동 열녀 박형직 처 정씨지려>

 

烈女 朴衡直 妻 鄭氏之閭(열녀 박형직 처 정씨지려)가 위치한 곳은 진해구 남양동 104-2번지이다. 朴衡直 妻 鄭氏之閭(박형직 처 정씨지려)는 웅동에서 웅천 방향으로 가는 장고개에 위치해 있는데 진해대로를 달리는 차량의 속도가 빠른 편이고 도로 가장자리에 주차를 할 수 없다. 그러나 딱 한곳 산으로 가는 시멘트 길이 약간 있어 이곳에 차량 주차가 가능하고 여기에서 20m 산길을 오르면 보인다. 진해대로(국도 2)에 인접해 있는 곳이지만 위치를 정확히 모르면 찾기가 쉽지 않은 산기슭에 있다. 이 여각 아래 월남마을에는 밀양박씨제실(진해구 남양동 10-38)이 있다. 필자의 경우 무작정 기록에 있는 월남마을을 찾아가 박씨제실이 있는 곳으로 가니 마침 박씨 문중의 사람을 만나 비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열녀 박형직 처 정씨지려는 돌로 만든 여각 형태가 가장 완벽에 가깝다. 4개의 돌을 둥굴게 다듬어 기둥으로 삼았고, 사각으로 길게 깎은 돌을 돌기둥에 올려 보의 역할을 하게 했으며, 그 위에 포의 역할을 하는 조각한 돌을 얻었고 그 위에 기와형식을 띤 제법 큰 지붕돌을 올려 여각의 모양을 갖추었다. 여각 안에 비를 세우고 비신 위에 烈女學生朴衡直妻東來鄭氏閭(열녀학생박형직처동래정씨려)”라 새긴 긴 사각의 돌을 올렸다.

비각의 전체 높이는 155cm, 178cm, 두께 107cm이고, 지붕돌 높이는 26cm, 106.5cm, 두께 13.5cm이며, 비신의 높이는 79cm, 36cm, 두께 14cm이다.





비신에 새긴 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烈女學生朴衡直妻東來鄭氏閭 [原文]
鄭氏郞東平君后漢札女 生于檜山 嫁于密城后朴衡直家 同居十四年 家甚貧賣粧奩 以供舅姑 以事君子一主於孝敬 其夫病瘟甚革晝 則迎醫夜則禱天願 以身代其夫竟不淑乃 矢心下從 竊飮鹽漉二大椀 猶不死乃親檢附身之具纏經殯肂 惟思必死之方 有隣媼晋慰曰 上有親下有兒滅性不其過乎 鄭氏曰 夫死婦從義也 吾志決矣 喑以糖和鹽漉飮 以自盡時三十有一矣 噫貞烈之昭耀門稧者 何限而僻處 窮鄕生不讀 烈女傳數行書逎能秉彛辨死 惟玆鄭氏之烈 爲臣可以死於忠 爲子可以死於孝 豈不偉歟美哉 士論齊聲巡薦繡褒不止 一缺乃承表烈旌閭之缺 亦可觀感於玆鄕之萬古云爾
己丑十二月 日 製碑 姓諱缺

猗歟鄭氏之卓 節懿行己蒙恩典 照人耳目于茲有年 而描載原碑中不必贅說 歲久磨泐今將改修 而閭本在郡城 西移建于郡 東永吉村後從姓 孫所居其孫基玟先後之也
歲庚子 正月 日
後學 李夢熺謹識
監董 幼學曺澤振
監鑴 幼學申泰佑
寫碑 三從孫 幼學朴基殷


열녀학생박형직처동래정씨려(烈女學生朴衡直妻東來鄭氏閭) [해문]

열녀 정씨는 東平君(동평군)의 후손인 漢札(한찰)의 따님으로 檜山(회산)에서 출생하여 밀성 박씨 가문의 형직에게 시집와서 그와 함께 산지 14년이 되었으나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화장품 상자를 팔아 시부모를 공양하고 섬기었으니 이 어찌 군자가 한 임금을 섬기듯 시부모를 효도와 공경으로 모신 것이 아니랴.

지아비의 병이 심해지니 낮에는 의원을 들이고 밤에는 하늘에 기도하며 지아비의 병을 대신하기를 원했으나 마침내 돌아가시니 따라 죽으리라 마음속으로 맹세하고 몰래 간수를 큰 대접으로 2대접을 마셨으나 죽지 않으므로 스스로 몸을 맬 띠를 찾아 빈소에서 목을 매어 죽을 생각을 하니 이웃집 여자가 위로는 어버이가 계시고 아래로 자식이 있으니 목숨을 끊으려 하심이 지나치지 않는가하고 위로하니 이에 정씨가 지아비가 죽었으니 지어미가 그 뒤를 쫓는 것이 옳은 법 아닌가.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고 말하고 깊은 밤에 다시 간수를 마시고 자진하니 이 때 나이 31세였다.

탄식할지고! 정렬의 빛나는 문을 계제사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을까 마는 僻處(벽처)窮鄕生(궁향생)이 열녀전 몇 줄 조차 읽지 못하였으나 비로소 능히 타고난 천성을 지켜 힘써 죽고자 하였구나. 이를 생각건대 정씨의 貞烈(정열)을 신하가 죽음으로써 임금에게 충성한 것이며 자식이 죽음으로서 어버이에 효도하는 것이 어찌 위대하고 아름답지 않으리요. 士論(사론)이 이구동성으로 繡褒(수포)를 천거하여 一契(일계)에 그치지 않고 表烈旌閭(표열정려)의 계를 승인하니 이 고장에서 만고에 觀感(관감)할만한 일이다.


기축(순조 29, 1829) 12월에 비를 만들고 찬자의 성명을 쓰지 않는다.

 

아름답구나! 정씨의 빼어난 節懿行(절의행)은 이미 몇 해 동안 사람들의 이목에 비추는 은전을 입어 추대되었으니 원래의 비에 더 이상의 너저분한 말이 필요 없으나 세월이 오래 되어 비문이 닳아져서 지금 개수코자 한다. 정려는 본래 웅천군 읍성 서쪽에 있었으나 후에 후손들이 거처하는 곳을 따라 군 동쪽의 영길촌으로 옮겨 세웠으며, 그 후손들이 비좌를 옥돌로 마련했다.

경자년 정월일(188912)

후학 이몽희 삼가 짓고
감동 유학 조택진
감휴 유학 신태우
사비 삼종손 유학 박기은





출처 및 참조

진해의 비문(1996)-진해시

디지털창원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