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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구 북부동 주병석, 주한혁 정려각과 절부 김응범의 처 주씨 비

천부인권 2016. 12. 9. 06:31

 

 

2016.12.05. 웅천 북부동 주병석, 주한혁 정려각과 절부 김응범의 처 주씨 비가 있는 풍경

 

진해구 북부동 592번지는 중국 新安(신안)이 본관인 朱氏(주씨) 3명의 효열각 및 절부 비가 세워져있는 곳이다. 지금은 웅천로라 부르지만 옛 국도2호 도로가 지나는 길가에 위치하여 쉽게 찾을 수 있다. 도로에서 바라보면 우측에 孝子朱秉奭旌閭閣(효자 주병석 정려각)’이 있고 중앙에 節婦金應凡妻朱氏碑(절부 김응범 처 주씨 비)’가 위치하며, 그 좌측에는 孝子朱漢奕旌閭閣(효자 주한혁 정려각)’이 있다.

 

 

2016.12.05. 웅천 북부동 주병석, 주한혁 정려각과 절부 김응범의 처 주씨 비의 뒤쪽에서 본 풍경

 

孝子朱秉奭之閭(효자 주병석지려)

 

주병석 효열각은 광무 2(1898)에 제작되었다. 여각 내부 정면에 있는 편액에는 孝子武及第朱秉奭之閭(효자 무급제 주병석지려)’라 적었다. 편액의 전체 높이는 30cm, 130cm, 두께 2cm이며 목재이다. “웅천읍지인물조에 이르기를 武科及第 事親叱咤之聲未至於犬馬父病蔬畦蔘出醫路虎衛高宗戊戌 登聞旌閭(무과급제 사친질타지성미지어견마부병소휴삼출의 로호위고종무술 등문정려) 부모를 섬기는데 온 정성을 쏟으니 푸성귀 밭에서 인삼을 얻고 의원에 다녀오는 길에는 범이 호위하는 이적이 있었다고 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웅천읍지에도 기록하고 있듯이 어느 날 밤에 주병석이 부친의 약을 지어 돌아오는 길목인 큰발티 고개에서 호랑이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주병석이 호랑이에게 아버지에게 약을 갖다 주어야 한다는 간절한 청을 듣고 주병석의 효심에 감응하여 길을 비켜준 일이 있었고, 밭에서 산삼을 얻게 되는 이적이 있었다. 병에서 회복한 아버지는 그로부터 83세에 이르도록 장수하였다. 그러한 공을 조정에서 인정하여 1898(광무 2)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節婦金應凡妻朱氏之閭(절부 김응범 처 주씨지려)

 

節婦碑(절부비)1855(철종 6)에 처음 세웠다. 비좌 위 좌우에 판석을 세우고 가첨석을 올려 石廬閣(석여각)을 만든 다음 중앙에 碑座直首(비좌직수)형의 비신을 세운 후 가첨석과 비신 사이에 둥근 돌을 끼워 비신을 고정시켰다. 비의 정면에 세로로 節婦士人金應凡妻朱氏之閭(절부사인 김응범처 주씨지려)’가 새기고 좌우에 칭송의 글을 음각했다. 전체 폭은 77.5cm, 두께는 37cm이며, 加檐石(가첨석)의 높이는 40cm, 폭은 110cm, 두께는 76cm이고, 비신은 높이가 114cm, 폭은 47cm, 두께는 16.5cm이다. 비문의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年及卄三(년급입삼) 나이 스물 셋에 이르러

從夫母遠(종부모원) 지아비를 따라 부모 곁을 떠났으나

忽遇强摟(홀우강누) 문득 폭한을 만나

矢死如歸(시사여귀) 쏜살같이 자진하고 말았으니

專誠賢胤(전성현윤) 오직 정성으로 현윤(賢胤)의 도리를 다하여

欲闡先輝(욕천선휘) 조상의 아름다운 행적을 밝히고자함이다.

李台奏褒(李台奏褒) 이태가 포상을 주상하였으며

邑誌竝輝(읍지병휘) 읍지에 기록되어 동시에 빛난다.

己卯年四月日重建(기묘년사월일중건) 기묘년 사월 일에 다시 세우다.

 

 

 

1855(철종 6)에 정려가 내려졌다. 김응범 처 주씨(朱氏)는 나이 23세에 머리를 올리고 시집에 가지 않았는데 홀연히 불의의 강제 폭압을 당하는 변고를 만났으나 몸이 더럽혀지지는 않았다. 마음으로 매우 분하게 여겨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 남편이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가 원수를 때려서 죽이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옥에 갇혀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때부터 주씨는 원귀가 되어 매일 밤마다 나타나 지아비를 위하여 울부짖으니 그 소리가 원근에 모두 들릴 정도였다. 고을의 선비들이 그 정사를 딱하게 여겨 들고 일어나 고을에 그 의로움을 주청하였다. 이 때 수령으로 있던 상공 李起淵(이기연)이 그 절의를 가상하게 여겨서 곧 그 남편을 석방하였다.

 

 

2016.12.05. 웅천 북부동 절부 김응범의 처 주씨 비 뒤쪽의 풍경

 

2016.12.05. 웅천 북부동 주한혁 정려각 앞에 세운 비갈의 모습

 

여각 앞에 있는 비갈에 새긴 내용은 아래와 같다.

 

孝子將仕郎新安朱公漢奕之閭碑
公諱漢奕姓朱氏新安人 高麗文節公之之後也 皇明嘉請之歲公生于 邑之北門里 幼而聰穎天性至孝 其事父母也 家雖貧約甘旨之供 定省之道 無不盡其誠 其在侍病之日 調劑之誠感于神明 及長淸簡廉潔謙讓恭儉 庸言之愼 庸行之謹 誠信著于 鄕黨言行行動于 內外之艱 哀毁如誠葬之 以禮墓廬三年 不撤血淚 及其祭後 陶陶焉遂遂焉 雖龍蛇兵燹 經劫之後使遐鄕 豈俗聳動而起興焉 有三綱五常之道 推而放請 則眞出天之孝 穻世之準 以若傳家孝悌之風 顯世忠烈之門宜 有卓異相承之節操 而忠孝本無二門矣 玉韞而山輝珠藏而澤媚奧若 皇明萬曆三十四年丙午卽哉 宣廟朝三十九年也 公孝廉淸簡登聞于 朝特蒙棹潔之典 而至于戊午褒其閭復其戶至孝 感天鑑孔昭厚德所 及氏葉炳靈 豈非冥冥中 報施之道耶 噫自戊午 至今二百有一十九年之間 求其公所 以爲行則 孝悌之心油然 而生誠信之行 不待强勉而自進矣 公之十三世孫之翰請余爲文余辭 而蔑識不文朱君之請 愈篤不己余鳥敢 以不文辭略擧賓蹟以記 果不無疎漏之歎耶 繼爲之銘曰 天敍彛倫孝原百行誠信世敎淸簡 家聲持心介潔色莊氣仁隱德所涵蠲徭于 民侍廬三年血淚如新苗裔食報于 有光榮閭新煥矣雲泉淸
萬曆 四十六年 戊午
高宗二年 七月 十五日
鄕儒幼學 善山 金琥一 撰
重修都監 十三世孫 之翰
有 司 十一世孫 光玟
十二世孫 敬涥

 

공의 이름은 한혁이고 성은 신안 주씨이며 고려 때 문절공의 후예로서 1563년 웅천 고을 북문 밖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영리하고 천성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여 가세는 비록 가난하였으나 부모님 섬기는 공양이며 조제의 정성이 신명을 감동할 만큼 극진했다. 장성하면서 더욱 몸가짐이 단정 청아하며 성신이 두터워 고을 사람들의 칭송이 높았으며 원근 고을에까지 명성이 날로 빛났도다. 부모상을 당하매 애통갈성하며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여모살이 3년에 피눈물 마를 날이 없었으며 애통지통 생전과 추호도 다름 없는 정성이며 그 후 가제사 모심에도 지성을 다하였도다.

임진계사 병란으로 사회기강이 어지럽고 민생고가 극에 달한 세파 속에서도 삼강오상의 기강이며 제반 예법에 추호의 동요함도 없는 출천지효이며 희세의 표본이다. 충효를 이어 받은 가풍과 충렬에 빛나는 명문으로서 卓異(탁이)한 상승의 절조가 있어 선조 39년 공의 효제선행이 조정에 등문되어 정려의 융전을 내리시고 무오년에 정려를 짓고 공가부역을 면제받는 등 지효의 감동이 하늘에 다다르고 후덕함이 사해에 떨치니 후예의 번창함은 명명지중 보시보덕의 도리가 아닐까

그로부터 219년 공의 공적을 추모하니 효제의 마음이 새롭고 성신의 행적이 역력하여 효문이 추진되도다.

공의 13대손 之翰(지한)이 나에게 글을 청하기에 천식불문으로 굳이 사양하였으나 간곡한 청을 차마 버리지 못하여 공의 행덕을 약거 기록하였으니 과연 소루함이 있을까하여 몇 마디 더 명기한다.

하늘이 내린 彛倫(이륜)이며 효는 백행의 근원이다. 성신을 믿음으로 맑은 집안 다스림과 몸가짐이 씩씩하고도 어지니 그 은덕은 후손에게 견요의 덕을 일게하고 시려 3년 피눈물로 지샌 일들이 후손에게 보은이 되어 길이 새롭게 빛나도다.

1988년 무진 양력 7월 일

순흥 안용호 풀이하고

함안 조영제 삼가 쓰다.

 

 

孝子朱漢奕之閭 효자 주한혁지려

 

효자 주한혁 여각 앞에는 정려의 내용을 새긴 사각형의 비갈이 세워져 있고 뒤쪽의 여각에는 孝子將仕郎朱漢奕之閭(효자 장사랑 주한혁지려)’라는 편액이 달려 있다. 여각의 중앙에는 碑座圓首(비좌원수)형의 孝子將仕郎新安朱公漢奕之閭碑(효자 장사랑 신안 주공 한혁지려 비)라 새긴 비가 서있다. 비의 제작연대는 1988년이며, 대리석으로 된 비신은 높이가 122cm, 폭은 81cm, 두께는 24.5cm이다. 나무로 된 편액의 높이는 18cm, 153.5cm, 두께 5.5cm이다.

 

 

정려각 내부의 편액

 

 

朱漢奕(주한혁)은 사람됨이 순수하고 부지런하며 신중하였고 집안에서는 효자였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매사를 삼가고 부모님 생전에 효성도 지극하였다. 돌아가신 뒤 무덤 옆에 막을 짓고 3년의 侍墓(시묘)를 하는 동안에도 그 정성이 지극하여 고을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1618(광해군 10) 나라에서 그의 행실을 기려 旌門(정문)을 내렸다.

 

 

 

출처 및 참고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진해의 비문(1996)

디지털창원문화대전

교남지(1940)-효자

웅천현읍지(1993년 12월 30일)-진해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