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생각하다

독립운동가 인정이 필요한 백당 정기헌

천부인권 2017. 5. 21. 05:55

 

 

 

백당 정기헌 사진

 


백당 정기헌(白堂 鄭基憲 : 1886~1956)은 창원군 웅남면 완암리 126번지에서 동래정씨 정규엽과 이근수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한 인물이다. 일찍이 한문과 서예를 배웠으나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신학문을 배우러 서울로 올라가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의 전신)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후 주시경선생의 문인이 되었고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교남교육회에서 활동하였으며 한일병탄(韓日倂呑) 이후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의 제자가 되었다.

 

 

 

 

마산보성상회

 


1916년부터 마산 부림동에서 마산보성상회(馬山寶城商會)라는 지물포를 운영하여 애국인사들의 연락 거점으로 이용하고 상해임시정부가 설립된 후로는 그 곳에서 밀파되어 오는 동지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연락업무를 담당하였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해외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달하는 등 임시정부의 조완구선생과는 특별한 교분을 가지고 연락을 하였다. 이러한 것을 의심한 일본경찰이 가택수색을 하고 잡아가 고문을 하는 곤욕에도 끝내 함구했다.

 

 

 

 

숭광학교 제6회 졸업생 사진


그의 형 정기전(鄭基銓 : 1880~1920)은 현재 상남초등학교의 전신인 숭광학교(崇廣學校 : 1908~1623) 창립에 참여하고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해외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등 형제가 함께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숭광학교는 고종의 명령에 의해 창원 상남면에 세운 사립학교로 지금의 창원의 집에서 주도한 보사계(補社契)을 통해 건설했으며, 당시 정기전은 재실을 헐어 목재를 기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 사진은 숭광학교 제6회 졸업식으로 중앙에 갓을 쓴 분이 정기전선생이고 맨 우측 끝에 있는 분이 창원의 독립투사 배중세(당시 23세)이다. 숭광학교는 조선인이 세운 학교이다 보니 그 졸업생들은 거의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고 봐야 한다.

 

정기헌선생의 인품을 잘 아는 사람이 창원군수로 부임하여 그에게 상남면장 취임을 권유 했고, 주위 면민들도 추대를 하였으나 거절했다. 그는 “지금 나라가 망하여 구차히 이어가는 목숨을 부끄럽게 보전하고 있는데 하물며 원수의 녹봉을 욕심내어 평소의 뜻을 속이겠습니까?”라고 말했다.

 

1921년 11월 미국 원싱턴에서 개최된 열강의 군축회의(태평양회의)에 국민공회 대표 이상재와 양기탁을 필두로 국내 종교계 및 사회단체 대표와 13도 260군 대표 총 372명이 일본의 한반도 강제 점령을 규탄하는 청원서에 서명을 하여 우리 대표단에 전달을 했다. 정기헌은 경상남도 창원군 대표로 서명을 했다. 그러나 이 청원서는 일본의 방해와 미국과 일본의 밀약으로 회의에 공식 상정 되지 못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함안의 유학자 연계 조열제(硯溪 趙說濟 : 1895~1968)선생은 백당 정기헌의 제문에서 “섬나라 오랑캐가 침범하여 삼천리 예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의 구역이 되었다. 이에 정공은 팔을 휘두르며 분기하여 세상의 뛰어난 선비들과 함께 대사를 도모하였으니 봉래(蓬萊)에는 백산(안희제)의 부산백산상회가 있고, 합포(合浦)에는 백당(정기헌)의 마산보성상회가 있다. 겉으로는 상호를 가탁하였으나 속으로는 실제로 바깥소식을 정탐하였다.”고 기록하고 그의 묘비명을 “조선 우국의사 백당 정선생지묘”라고 쓰고 애도를 하였다.


백당 정기헌은 독립운동 자금과 민족사상 고취를 위해 재실과 서당 등에 편액을 써주고 병풍 등에 그림을 그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독립운동으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말년에는 상남면 봉림리 62번지에서 청년들에게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고 서예활동에 매진하던 중 시력을 잃고 노환으로 투병 중 향년 71세로 별세한 창원의 지식인이며, 독립운동가 이다.
그가 남긴 편액과 주련 및 병풍 등은 우리 지역에 산재해 있고 문집으로는 백당시집 3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