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구 북면 외산리 1054-3은 달성서씨의 후손들이 묘제를 지내기 위해 건축한 재실(齋室)이 있다. 이 재실은 대문채와 본채로 구성 되어 있는데 대문채에는 여견문(如見門)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다. 대문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창고가 마련되어 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정면 4칸, 측면 2칸인 영모재(永慕齋)라는 편액을 단 재실이 나온다. 팔작지붕에 일본식 기와를 얻었고, 지붕은 비가 샜는지 에폭시 접착제를 칠하여 허름한 모습이다. 서까래가 썩었는지 지붕의 모양도 약간 변형 되어 있어 시대에 따라 퇴락해가는 전통문화의 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이런 건물이 제사 또는 모사를 지낼 때만 사용되고 평소에는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런 집들은 전국적으로 네트웍크를 결성하여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펜션처럼 빌려 주고 그 재원으로 관리를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달성서씨 시조 서진(徐晋)이 고려 시대에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면서 서씨를 성으로 받게 되었다. 그의 아들 서기준(徐奇俊)과 손자 서영(徐穎)에 이르기까지 3대가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달성에 세거(世居)하며 관향(貫鄕)을 달성으로 하게 되었으며, 후대로 내려와 현감 공파(縣監公派)·학유 공파(學諭公派)·판서 공파(判書公派)·감찰 공파(監察公派) 등 9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었다.
1950년 겨울 광릉인 안종두가 쓴 영모재기에 의하면 「오은 서사일(梧隱 徐思逸)이 남쪽 바닷가를 유람하다가 회산(檜山) 오곡(梧谷)에 이르러 산수가 청려하고 민속이 순박함을 사랑한 나머지 여기에서 살고자 집으로 돌아오자 가산을 정리하여 이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웃 벗들과 함께 안개 낀 산수를 벗 삼아 노닐고 즐기면서 살다보니 여기서(지금의 의창구 북면 외산리 현도마을) 늙어 회산군(檜山郡)의 입향조가 되었다. 이후 자손이 번성하여 수 십호가 살기도 했다. 공이 돌아가신지 200년이 지나 후손들이 재사(齋舍)를 지으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1949년 봄에 임곤(任坤)과 그의 친척이 힘을 모아 기둥을 세우고 재사를 지어 영모재라 이름 지었다.」고 기록 했다.
이 영모재(永慕齋)의 편액과 대문위의 여견문(如見門) 편액 및 영모재기의 글씨는 창원의 독립운동가 백당 정기헌(白堂 鄭基憲 : 1886~1956)선생의 친필이다. 당시 정기헌 선생의 나이는 67세로 아마도 남아있는 글씨 중 가장 만년의 것으로 보여 진다.
[원문]
永慕齋記
古之君子有遯世 不見知而無憫者 其志則淸介 而其行則高潔也 其視世之營營於名利 汲汲於進取者 不亦賢遠矣乎 我仁孝之際 有梧隱徐公諱思逸 達城之世也 珪組軒冕 舃爀相聯 蔚然爲嶺中鋸閥 而世居公山之下 公賞南遊海上 之檜山之梧谷 見山水之淸麗 民俗之淳庬 愛而欲居之 歸則拔家以徙 與邦人諸友 日翶翔於烟霞泉石之間 囂囂自樂 而不求於世 亦不以不見之而憫焉 豈不誠遯世無憫之君子哉 遂終老于此 而以檜郡爲幷胚 其後子孫 漸以繁衍遍巷而居者 多至數十戶 翹英才德之士 泩泩生於其間 而病於貧約 不能大振 是可恨也 噫公之沒已今二百餘祀 而虔香之地 迄無齋宿之廬 雲仍之 慨鬱爲何如也 頃年有錫奎甫欲經紀之 未就而中途遽閼 尤可悲也 迺於己丑春 任坤君與其族人錫兌錫熙錫根元洙 合謀發力 直墓之東弓許 建立楹四架 扁之曰永慕 其規模制度 洵美完矣 旣落之明年冬 任坤君衝寒風 越重嶺訪余 而徵以楣記 其篤慕之誠 有足感人者 不能終辭 而因復之曰 今諸君齋以永慕而慕之何以必也履霜露 而興怵悽之思 薦籩豆而致如在之誠 是固慕之不容已者 而有進於是者 詩曰 無念爾祖 聿修厥德 又曰 永言孝思 孝思維則 諸君之居是齋者 常念爾祖 慕其淸介而 無爲貪冒 慕其高潔 而勵以名檢 又相玩心於孝悌忠信之道 勉力於詩書 禮樂之科 則詩之所謂聿修維則者 在此而不待他求 斯乃慕之善 而永其世者也 若夫山水烟雲之美 登臨觀覽之勝 則余未嘗身履其境 未可擧悉而只道其所以慕者 而爲之記
歲庚寅冬十二月戊午廣陵安鍾斗 記
[해문]
영모재 기문
옛날에는 세상을 피해 있으면서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근심하는 군자가 있었는데 그 뜻은 청개(淸介)하고 행실은 고결(高潔)하였다. 한 세상 살면서 명리(名利)를 좇거나 출세하는데 급급한 사람은 이런 어진 사람이 될 수 없지 않겠는가!
인조·효종(1623~1659) 연간에 오은 서사일(梧隱 徐思逸) 공이 있었으니 달성서씨 후예이다. 달성서씨는 높은 관직을 지내는 훌륭한 인물이 대대로 이어져 울연히 영남의 존귀한 문벌이 되어 대대로 팔공산 아래에서 살았다.
공이 일찍이 남쪽 바닷가를 유람하다가 회산(檜山 지금의 창원)의 오곡(梧谷)에 이르러서 산수가 청려하고 민속이 순박함을 사랑한 나머지 여기에서 살려고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자 곧 가산을 정리하여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이웃 여러 벗들과 함께 안개 낀 산수를 벗 삼아 노닐고 스스로 즐기면서 명리를 구하지 않았다. 역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도 근심하지 않았으니 어찌 세상을 피해 살면서도 근심하지 않는 진정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마침내 여기서 늙으셨고 아울러 회산군의 입향조가 되었다. 그 후에 자손들이 차츰 번성해서 이 고을에 사는 자가 많게는 수 십호에 이르렀다. 이 중에 재주와 덕이 있는 사람들도 많이 태어났지만 가난으로 인해 크게 떨치지 못했으니 이것이 가히 한스럽다.
아아! 공이 돌아가신지 벌써 2백여년이 되었다. 그런데도 제사를 올리는 곳에 재계(齋戒)하고 숙박할 거처가 없으니 후손들이 얼마나 많이 탄식하면서 답답했겠는가.
근자에 석규(錫圭), 장보(章甫)께서 재사(齋舍)를 지으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횡액을 당했으니 더욱 슬픈 일이다.
기축(1949)년 봄에 임공과 그 친족 석태(錫兌), 석희(夕熙), 석근(錫根), 원수(元洙)가 재사 짓기를 도모하여 힘을 내어 직묘(直墓) 동쪽 가까운 곳에 기둥4개를 세워 재사를 짓고 영모재라 이름을 지었으니 그 규모와 제도는 참으로 아름답고 완전 했다.
낙성한 이듬해(1950) 겨울에 임곤군이 찬바람을 무릅쓰고 두 번이나 고개를 넘어 나를 찾아와 미기(楣記)를 써 달라 하였다.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이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여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지금 여러분들이 영모재라 이름 짓고 추모하니 하필 새벽이슬을 밟으면서 찾아와 슬퍼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선조가 살아 계시는 듯 공경하는 정성을 다할 것인가? 이것은 선조를 추모함에 진실로 용납 될 수 없는 일이다.”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있으니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그대들 선조는 생각 말고 덕을 닦기만 할 지어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언제나 효도 다하시니 효도는 선왕(先王)들을 본받으신 것이니라.”하였다.
지금 여러분들이 이 영모재에 살고자 하는 것은 항상 선조가 청개하여 탐모(貪冒)하지 않았음을 사모하며 고결하고 검소함으로 유명해 졌음을 사모하려는 것이다. 또 서로 효제충신(孝弟忠信)의 도리를 마음에 익혀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에 부지런히 힘쓰면 시경에서 말한 “그 덕을 닦을 지어다.”한 뜻이 여기에 있으니 다른데서 찾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이 선조를 잘 추모하고 대대로 길이 이어가는 것이다.
만약 높은 곳에 올라 산수와 구름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이라면 아직 그 곳을 가보지 못해서 다 말할 수 없지만 선조를 추모하는 도리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처럼 기록해 둔다.
경인년(1950) 겨울 12월 무오(음력 11일)
광릉 안종두 씀
영모재 내부에 걸린 시편이 하나 걸려 있는데 “재성유감(齋成有感)”이라는 명제로 시작한다.
齋成有感(재성유감) 재실이 완성됨에 감회가 있어
億吾先祖渡南初(억오선조도남초) 우리 할아버님 남쪽으로 내려오실 때
自愛溪山可占居(자애계산가점거) 산과 내를 사랑해서 여기에 터 잡았네
睦族無如根孝友(목족무여근효우) 화목한 친척 없어도 효도와 우애는 뿌리 깊고
貽孫何若庤詩書(이손하약치시서) 쌓아둔 시서는 자손보다 더 좋구나
春閒叙嘯裁花暇(춘한서소재화가) 한가로운 봄날에는 꽃 가꾸는 여가에 노래하고
夜靜卸巾弄月餘(야정사건농월여) 고요한 여름밤에는 땀 닦으며 달빛즐기네
霜露降時追感倍(상로강시추감배) 서리 내리는 가을에는 추모하는 마음 배가되어
悽然想像步庭虛(처연상상보정허) 처연한 마음으로 헛되이 마당을 거닐며 노네
九世孫任坤敬題(구세손임곤경제) 9세손 임곤이 공경하여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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