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낙동강을 보듬은 오여정의 운명

천부인권 2017. 6. 15. 10:31



2017.6.11 푸른 강과 싱그런 녹음속에 위치한 오여정



창녕군 남지읍 시남리 815번지 낙동강의 절벽 위에 오롯이 세워진 오여정(吾與亭)은 의령 정곡과 창녕 시남리를 잇는 옛 길인 이이목 나루가 있는 곳으로 광해군 때 서궁(西宮)의 변(變)을 목격한 어촌(漁村) 양훤(楊暄 1597~1650)이 정치에 환멸을 느껴 낙향해서 지은 정자이다. 오여정이라는 이름은 논어 선진편에 전하는 공자님이 제자들과의 이야기 중 각자의 포부를 묻자, 제자 증석(曾晳)은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泳而歸.』 “늦은 봄에 봄옷이 지어지면 어른 대여섯 명, 아이 육칠 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돌아오겠습니다.”고 하자 한숨 쉬며, 『吾與點也』 “나도 너와 같이 하겠노라.”고한데서 따온 정자 이름이다.




시남리 까마귀고개에서 본 이이목 나루


이곳 이이목 나루는 6·25전쟁 때 낙동강을 두고 생사를 건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동이 편한 인근의 다른 나루를 두고 인민군이 이곳 이이목 나루를 통해 도하를 하여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져 창녕군 영산까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던 뼈아픈 곳이다.
오여정의 입구에는 표식수로 심은 은행나무 노거수가 있는데 가슴높이 둘레가 250cm이며, 높이는 21cm, 나이는 150년 남짓이다. 그리고 150년 정도 되어 보이는 학자수라 불리는 회화나무도 오여정 앞에 심어져 있어 정자의 품격을 달리 보이게 한다.




2017.6.11 이이목 나루 풍경



인접해도 오여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오여정은 일부가 허물어지고 대청마루와 툇마루는 사라졌으며, 중수기 및 오여정 편액도 붙어있지 않아 거의 폐허가 된 느낌이다. 누군가가 마당에 솟은 대나무와 너무 많이 자란 시누대 등을 제거한 흔적은 있지만 이제는 찾는 이 없는 낙동강 절벽에서 먼지처럼 사라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만약 다시 보수하고 수리한다면 이후 여행객에게 펜션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수익도 올리고 계속해서 수리하며 보존했으면 정말 좋겠다. 인가가 없는 호젓한 오여정에서 옛 선인들처럼 뱃놀이도 하고 낙동강의 절경을 풍류로 즐기며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장소도 흔하지 않다.





무술년(1898, 고종 광무2년)에 이만구(李晩求) 선생이 남계정(南溪亭) 강회(講會)를 마치고 낙동강 뱃놀이를 하면서 오여정을 찾았다. 이때 낙동강에서 비를 만나 사공을 재촉하여 노를 저었으나 오여정(吾與亭)에 이르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그러한 때에 오여정에 오르니 강에는 비 내리어 호젓하고 구름 낀 산의 경색(景色)에 반해 읊은 시가 있어 소개를 한다.


回沙頭而解纜(회사두이해람) 백사장 머리를 돌아 닻을 풀자
望烏山於咫尺(망오산어지척) 지척의 거리에 오산이 보이는 구나
何飛雨之滿空(하비우지만공) 어찌 날리는 빗발이 허공에 가득하고
助風流於一席(조풍류어일석) 한 자리에 풍류를 돕네
忽亭楣之入眼(홀정미지입안) 홀연히 정자의 편액이 보이니
俯千仞之危壁(부천인지위벽) 천 길의 높은 절벽 굽어보고 섰음이여
緬風詠之遐志(면풍영지하지) 풍영의 옛 뜻 멀리 생각하매
誰能繼夫往跡(수능계부왕적) 누가 능히 옛 자취 이을까




폐허가 되어가는 오여정



낙동강을 보듬은 오여정의 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