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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굽어보는 언덕에 우뚝 선 수산리 남수정 欖秀亭

천부인권 2017. 3. 6. 07:22

 

2017.3.5. 하남읍 수산리 전경

 

2017.3.5. 하남읍 수산리 남수정과 추모재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857번지, 낙동강을 굽어보는 전경 좋은 자리에 欖秀亭秀亭(남수정)追慕亭(추모정)이 함께 위치해 있다. 창원에서 밀양으로 가는 이동로가 守山橋(수산교)만 있었으나 지금은 수산대교도 있어 엉뚱한 곳으로 갈 수 있겠지만 수산교 아래에는 전통시대 때부터 이어 온 수산나루가 지금도 있다. 이 수산교를 건너면 다리가 끝나는 지점 좌측에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는 언덕에 남수정과 추모정이 한 담장 안에 있다. 이 남수정 터는 조선조 숙종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라의 양곡을 보관하던 國倉(국창)자리였으나 현재는 廣州金氏(광주김씨) 사파의 제각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2017.3.5. 하남읍 수산리 남수정과 추모재가 있는 풍경

 

다음카페 밀양광장(밀양의 문화, 관광, 역사, 지명)에 의하면 欖秀亭(남수정)은 수산현(守山縣)에 소속된 누대(樓臺)로서 1538년에 부사(府使) 장적(張籍)이 창건하였고, 1539년 어득강(魚得江)이 후임 부사로 도임하여 단청을 한 후 람수(欖秀)로 정자 이름을 지었다. 1542년에 부사(府使) 박세후(朴世煦)10()의 부속 건물로 지어 현사(縣舍)로 삼고 주위에 담장과 대문을 설치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다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 그 뒤에 유허(遺墟) 한 쪽에 수산창(守山倉)을 건립하여 곡식을 보관하였다. 광주김씨 문중에서 다시 남수정을 재건하여 강학소(講學所)로 삼았다. 그 후 화재(火災)를 만나 불타고 말았다. 그 유허(遺墟)는 일시 타인에게 양도되었으나, 1865년 진해현감(鎭海縣監) 김난규(金蘭奎)가 소유권을 환수하여 그 자리에다가 남수정을 다시 중건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를 해 오다가 1977년 후손들에 의해 현재와 같이 확장 중건하였다.

 

 

2017.3.5. 하남읍 수산나루와 남수정

 

2017.3.5. 하남읍 수산리 남수정과 추모재

 

이 남수정 터가 광주김씨 사패지가 되는 것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다음 블로그 어촌설화연구소에 따르면 조선조 19대 숙종 때의 어느 해 모내기가 한창일 때였다. 여러 고을의 원님과 전라도 남원의 진영장(鎭營將)을 지내신 김이(金 耳)라는 분이 이곳에 낙향을 하여 있다가 농부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산 위에 올랐다.

산 위에 올라 수산의 넓은 들판에서 농부가를 부르며 모심기에 바쁜 농부들을 둘러보다가 날씨가 수상하여 멀리 낙동강을 바라보았다. 그때 해일이 큰 물결을 일으키며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이는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해일은 삽시간에 들판을 덮쳐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삼킬 것이 분명했다. 그는 급히 산을 내려와 관원들에게 빨리 농부들을 피신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관원들이 들판에 닿기도 전에 해일이 닥칠 것 같았다. 그래서 김이씨는 몇몇 관원들을 데리고 곡식이 가득 쌓인 국창으로 달려가 국창에 속히 불을 지르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관원들은 곡식 창고에 불을 지르라는 그 명령을 납득할 수가 없어서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그러자 김이는 관원들을 밀쳐내고 손수 국창에 불을 질렀다. 초여름의 더위 속에서 국창은 화약에 불을 붙인 듯 검은 연기를 내뿜으면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때 들판에서 모를 심던 농부들이 국창의 불을 보았다.

농부들은 ?국창에 불났다.? 외치면서 일제히 국창으로 달려왔다. 농부들이 열심히 불을 끄고 있을 때 낙동강을 거슬려 올라오던 집채 같은 물결은 어느새 들판을 덮쳤다. 온 들판은 삽시간에 물바다로 변했다.

?아니 이럴 수가! 해일이 밀려오다니.?

불을 끄던 농부들은 손을 놓고 산더미 같은 파도를 일으키며 밀려오는 해일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불을 끄러 온 농부는 전부 살았지만 들판에서 그대로 농사일을 하던 농민들은 전부 해일에 휩쓸러 죽고 말았다. 불을 끄러온 농민들은 뒤에야 김이씨의 슬기로 자신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고 모두 김이씨 앞에 엎드려 감사의 절을 올렸다. 이런 사실을 임금께 상소를 하자 임금님은 곡식을 태운 것은 아깝지만 농민들의 귀중한 생명을 구한 김이씨의 슬기를 치하하며 국창이 있었던 일대의 땅을 사필지로 김이씨에 하사 하였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이 땅을 전부 팔아버리고 다만 당시 국창 자리에 세워졌던 지금의 광주 김씨 사파의 제각인 남수정만 남아있다고 전한다.

지금도 남수정의 주변 땅을 파면 당시에 불을 질렀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특히 간혹 미탄(米炭)을 발견하기도 한다고 한다.

 

 

2017.3.5. 하남읍 수산리 남수정 출입문

 

 

남수정 담장 밖 정면에는 팽나무 노거수가 표식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 목신 아래에는 지금도 기도를 드리는 작은 기도처가 놓여 있다. 그 속에는 정화수를 담은 그릇과 촛불을 피우고 있으며 사용 시 주의 사항도 적어 두고 있다. 이 팽나무 노거수는 밑둥치에서 줄기가 갈라져 밑둥치를 재어보니 415cm이고, 굵은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는 295cm이다. 수령은 150년 정도이며, 높이는 22m이다.

 

2017.3.5. 하남읍 수산리 목신 아래의 기도처

 

 

추모정(追慕亭)은 현감(縣監) 김난규(金蘭奎)가 고종 2(1865)에 남수정(攬秀亭)을 중건하면서 그 경내에 종6세조 영장공(營將公) 김기(金淇)의 위적(偉績)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집이다.

영장(營將) 김기(金淇, 1627~1693)는 구봉(九峰) 수인의 손이다. 숙종 연간에 마침 물러나 쉬고 있던 중 낙동강에 불의의 홍수를 관측하자, 국창(國倉)에 방화(放火)하고 타종(打鐘)으로 방금 재야(在野)한 수만 농민으로 하여금 익사의 환()을 면하게 하였다. 조정에서 그 임기응변으로 수많은 인명을 구한 공을 포상하여 그곳의 낙동강 일대를 하사하였으니 이로부터 남수정 일대가 김씨 일문의 소유가 되었다.

 

 

 

추모정기(追慕亭記)

진해(鎭海) 김난규(金蘭奎)는 영남 밀양 사람이다. 나와 알고 지낸 지 거의 30년인데 일찍부터 그 사람됨을 사랑하였다. 하루는 서울에 와서 그 족인인 재규(在奎)와 지두(志斗), 지립(志立)의 말을 전하면서 찾아와 말하기를, “6세 선조께서 처음으로 향리의 수산리(守山里)에 집을 짓고 편액을 남수(攬秀)라 하고, 이곳에서 거닐고 생활하시며 다음 자손에게 물려주었는데, 읍지에 실려 있고 사람들이 말을 한다. 지금까지 몇 백 년이 지나자 황폐하게 될까 두려워서 종인들과 의논하여 중수하고 마침내 그 편액을 새로 추모정이라 하였으니, 감히 한 마디 말을 주시기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이제 여든의 나이라 오래도록 글을 사양한 지 오래이나, 그 말을 듣고는 가상하게 여겨 이에 일어나 대답하였다. 무릇 사람이 하늘로부터 성품을 부여받음에 사랑의 이치가 인()이 되는데, 인의 근본은 효도이다.

어린 아이들도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 없으니, 그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효는 이루 다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효도가 사람사람마다 하기 어려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마음을 그대로 독실하게 행하는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진실로 자신이 지닌 몸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신을 낳은 이에게까지 미루어 나가면, 그것을 실현하는 데는 참으로 한계가 있겠지만 그 추모하는 마음은 또한 무궁할 것이다.

김군은 선조를 추모할 줄 안다. 강산은 예전의 강산이요 동네와 전야도 옛날의 전야이다. 예와 지금이 시대가 바뀌고 인사도 바뀌어, 노닐며 소요하는 낙을 이제 다시 할 수가 없으나, 추모하는 사람의 마음이야 또 어떠하겠는가?

시에 이르기를 뽕나무와 가래나무, 반드시 공경하라.” 하였으니, 그 나무를 보면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 그 나무를 사랑한다.

수목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선조께서 거처하던 곳이랴! 이제 그 추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돈독히 할 곳은 반드시 남겨진 정자의 일이리라. 정자를 이미 중수하였으면 어찌 토목공사를 잘 마쳤다고 그만둘 것이냐?

일족을 이 정자에 모으면 조상을 공경하고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술술 생겨날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보고 느끼고 놀고 쉬며 확충하고 함양하면서, 서로 깨우치고 고하는 것을 한결같이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한다면, 장차 김씨 가문에 훌륭한 후손이 있어서 창성하고 커짐을 볼 것이다. 그대로 이를 써서 주어 추모정(追慕亭) 기문으로 한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판돈녕부사(行判敦寧府事) 겸이조판서(兼吏曹判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경연일강관(經筵日講官)

원임(原任)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해평(海平) 윤치희(尹致羲) (

밀양누정록(밀양문화원발간)

 

2017.3.5. 하남읍 수산리 남수정

 

2017.3.5. 하남읍 수산리 남수정 편액

 

 

 

남수정 12경 낙강상선(洛江商船), 백산석봉(栢山夕烽), 마봉낙조(馬峰落照), 병산숙무(山宿霧), 대산목적(岱山牧笛), 사촌어등(沙村漁燈), 용진율림(龍津栗林), 갈전창송(葛田蒼松), 모산취연(牟山炊煙), 농포하화(農浦荷花), 강시주점(江市酒店), 평교제월(平郊霽月) 등이다.

 

攬秀亭十二景(남수정십이경)
金九峰先生詩(김구봉선생시)

 

洛江商船           낙동강의 상선
物産東南近海鄕 토산물은 동남 근해 고을 물건
碧江千里一孤檣 푸른 강 천리에 한 외로운 돛단배
蘭橈掛雨鷗邊穩 작은 배에 비 내리니 갈매기는 가까이서 평온하고
錦纜牽風雁外長 비단 닻줄 바람이 당기니 기러기는 먼 밖에 있구나.
客夢催歸仍曉色 나그네 꿈 귀향을 재촉하니 곧 새벽빛이요
櫓聲纔斷已斜陽 노 젓는 소리 겨우 끊어지니 이미 석양이로다.
離舷莫緊瀟湘岸 배에 내려 소상강의 언덕에는 대지 말라
秋水猿啼月似霜 원숭이 우니 가을 물에 비췬 달 서리 같아라.

 

栢山夕烽           백산의 저녁 봉화
落照移山暝色寒 산에 석양지니 어두운 빛 차가운데
黃昏點火照江干 황혼에 불을 켜 강 언덕을 비춘다.
海暗鯨鯢腥塵宿 바다가 어두우니 흉악한 왜놈 티끌 비린내 잠들고
歲遠龍蛇兵燼殘 세월이 오래되어도 임진왜란 잔재는 남아있다.
經綸不借郵傳疾 경륜은 역전(驛傳)처럼 신속함을 빌리지 못했고
消息非關道路難 소식은 도로의 어려움에 관련됨은 아니었다.
千里邊奇知一夕 천리 변방의 기이함을 하루 저녁에 알았으니
太平烟月照長安 태평연월은 장안을 비추리라

 

馬峯落照          마봉의 석양
洛江西畔聳龜峰 낙동강의 서쪽 높이 솟은 구봉이여
夕陽嵐翠鎖重重 석양의 푸른 남기(嵐氣)가 휘감기를 거듭했다.
俄送金鳥歸若木 잠시 꾀꼬리 약목(若木;서쪽)에 돌아감을 보내주고
宛看仙鶴舞孤松 그윽이 선학이 외로운 솔에서 춤춤을 본다.
郊外寒烟籠樹色 교외의 차거운 연기는 숲 빛을 감싸고
鏡中流水畵山容 거울 속 흐르는 물은 산의 모습을 그렸다
登臨竟日逍遙客 종일토록 등림하여 거니는 나그네가
更約淸宵月下逢 맑은 밤 달 아래에서 만날 약속 다시 한다.

 

兵山宿霧          병산에 머문 안개
鎖盡靑山漸渡江 온 청산 휘감고 점점 강을 건너니
曙色隨夢半餘窓 새벽빛이 꿈을 따라 창문 반을 넘었네.
濃痕學雨雲爲一 짙은 흔적 비를 배워 구름과 하나 되고
遠勢涵天鳥失雙 원대한 세력 하늘을 적시니 새가 짝을 잃는다.
花以老年香引蝶 꽃은 노년 같아 향기가 나비를 부르고
客尋歸路暗聽尨 돌아가는 길 찾는 나그네 가만히 개 짖는 소리 듣는다.
稀微乍遂朝煙捲 흐미하다가 잠시 아침연기를 따라 말려가니
依舊南州百里邦 옛날과 같은 남쪽 고을 백리의 지역이다.

 

垈山牧笛           대산 목동의 피리소리
牛背斜陽冉冉垂 소등에 석양 그윽이 드리우니
三三五五喚誰誰 삼삼오오 모여서 누구누구를 부른다.
聲傳斷續專隨指 소리 가락(斷續) 전함은 오로지 손가락에 따르고
曲應高低半在眉 곡조가 고저에 응함은 반이나 눈썹에 있다.
學得雁群歸遠浦 배움을 얻은 기러기 떼 먼 포구로 돌아가고
故敎魚隊聽江湄 다만 고기떼들이 강가에서 듣게 하구나
庭梅落盡春餘響 뜰의 매화 다 떨어진 봄에 남은 메아리
猶似關山月暮時 오히려 고향 달 비치는 저녁때와 같구나.

 

 

沙村漁燈          사촌의 고기잡이 등불
寂寂茅廬短短扉 적적한 띠 집에 짧고 짧은 사립문
瀟江風雨不須歸 *¹)소상강 풍우에 돌아가지 못하리라
棹背斜陽遙乞火 노 뒤에 석양은 멀리 불을 구하는데
帆頭殘月共懸輝 돛배머리 쇠잔한 달과 함께 빛을 매달았다.
影伴檣烏仍泛夜 그림자는 돛의 까마귀와 짝하여 밤에 떠다니는데
夢親洲鷺却忘機 꿈은 물가의 해오라기와 친근하여 *²)기심(機心)을 잊었다.
遙想村燈明滅際 멀리 생각하니 마을 등불 깜빡일 즈음
山妻應織碧蓑衣 산골 아내 응당 푸른 도롱이 짜고 있으리라

 

*¹)소상강(瀟湘江):중국 호남성에 있는 소수와 상강, 또는 그 소수와 상강이 합쳐져 흐르는 줄기. 소상반죽으로 유명함, 순임금의 두 부인 아황과 여영이 순임금이 소상강변에서 죽자, 애통해 하며 3일 밤낮을 피눈물을 흘리다 죽는다. 이후 피눈물을 흘린 그 자리에 예전에 없던 대나무가 자라났는데, 그 대나무를 이비죽(二妃竹), 또는 소상반죽(瀟湘斑竹)이라 부른다.
지금도 피 빛의 색을 내는 반점이 있는 소상반죽(瀟湘斑竹)이 자라고 있는데 겉으로 보면 거무죽죽하지만 대나무 살을 벗기면 시뻘건 색이라 이를 다듬어 시뻘건 부채 살의 관광기념용 부채를 만들어 팔고 있다.
*²)기심(機心) : 겉으로는 아닌 체하면서 속으로 품고 있는 사심(邪心)이다

 

 

 

 

龍津栗林          용진의 밤나무 숲

江村寥落昔人居 쓸쓸한 이 강촌에 옛 사람이 살았는데

十里濃陰翠幕如 십리의 짙은 그늘 푸른 장막 같구나.

風動疎枝危宿鳥 바람이 성긴 가지를 흔드니 자는 새가 위태하고

波涵落葉懶游魚 물결이 낙엽을 머금으니 느릿느릿 헤엄치는 고기로다.

春來雨露千條密 봄이 오니 비와 이슬이 일천가닥으로 주밀한데

秋後風露萬顆餘 가을 지난 뒤 바람서리엔 일만 개 낟알들이 여유롭다.

謾付桑田三變海 부질없이 세 번의 상전벽해에 부쳐보나

從來當日計全疎 본래 당일 계획이 완전히 성글었다네

 

葛田蒼松           갈전의 푸른 솔

靜裏秋光勝畵圖 고요속의 가을경치 그림보다 나은데

遠山蒼翠映江湖 먼 산의 푸름이 강호에 비친다.

同老魚鱗霜雪操 같이 늙어가는 고기비늘 눈과 서리의 지조가 있는데

借樓鶴夢水雲區 빌린 누각에 학의 꿈은 물과 구름의 구역에 있다.

晩節葆時憐卉譜 만년의 사시보존은 초목의 족보로 어여쁜데

香風起處認蓬壺 향풍이 일어나는 곳에는 *³)봉호(仙山)인줄 안다네.

特立還如君子志 우뚝 솟음은 도리어 군자의 뜻과 같으니

似嫌秦世大夫呼 진시황의 *)대부송(大夫松)이 되기는 싫어하는 듯하다.

 

*³)봉호(蓬壺) : 영주산(瀛州山), 방장산(方丈山)과 함께 중국 전설상에 나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 이 산에는 신선이 살며 불사의 영약이 있고, 이곳에 사는 짐승은 모두 빛깔이 희며, 금은으로 지은 궁전이 있다고 한다.

*)대부송(大夫松) : 진시황(秦始皇)이 봉선을 행하러 태산(泰山)에 올라갔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나무 아래에서 쉬고는 그 나무를 오대부(五大夫)에 봉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秦始皇本紀>

 

[解文] 김정현(金正鉉)-남수정 12경

 

 

 

 

牟山炊煙 모산의 밥 짓는 연기 - 전문
漠漠晴郊暮景佳 아득히 맑은 들 저녁 경치 아름다워
夕烟平舗影參差 저녁연기 평평한데 그림자는 들쭉날쭉
一易焚香真活計 주역 한권에 분향하니 참다운 삶의 계획이요
萬家炊玉好生涯 모든 집 쌀밥 지으니 괜찮은 생애라네
淡色欺雲歸碧落 맑은 빛은 구름인 듯 천상으로 돌아가고
細痕籠月繞長街 달을 감싼 가는 흔적 긴 골목을 둘러 쌌네
白鷗飛去空洲遠 흰 갈매기 빈 모래톱 멀리 날아가니
隔水迢迢望美懷 물 너머 아득히 임금 그리는 마음일세.
爲 攬秀亭 補壁 乙亥春日 金相中大兄 雅屬余而書之

 

*一易焚香 : 송(宋) 나라 왕우칭(王禹偁)의 황주신건소죽루기(黃州新建小竹樓記)에 “퇴청한 여가에는 학창의를 걸치고 화양건을 쓰고 손에는 《주역》 한 권을 들고 분향하고 조용히 앉아서 세속의 잡념을 떨쳐버린다.〔公退之暇 披鶴氅 戴華陽巾 手執周易一卷 焚香黙坐 消遣世慮〕”라고 하였다.

 

農浦荷花  농포의 연꽃
香風郁郁葉團團
秋水精神萬蘂寒
丁寧信息如相待
未到離披洽好着
桃李堪憐三月雨
牧丹還笑百花冠
濂翁去後無人識
惹得浮生覽物歎

 

江市酒店       강가 저자의 주점-[해문] 회산
壓酒吴姬喚少年 술을 마시면서 아가씨는 소년을 부르며
杏花村近水聲邊 살구꽃 피는 마을 가까이에 물소리 들리네.
綠楊斜日人爭醉 수양버들 사이로 햇살 드리우고 사람들은 다투어 취하니
芳草繁陰客欲眠 향기로운 풀과 무성한 나무 그늘에 손님은 잠들려고 한다.
東隣美酒西鄰熟 동쪽 아름다운 술 서쪽 이웃에 익어가고
南陌囂塵北陌連 남쪽 논밭 길은 소란스럽고 북쪽 길은 서로 연이어져 있다
歌屛唱罷陽關曲 노래는 파양관곡을 부르고
多少樓臺影落煙 누각의 그림자는 조금씩 사라져 간다.

 

平郊霽月  평교의 밝은 달

水碧沙明十里洲 푸른 물 반짝이는 모래가 10리나 펼쳐진 낙동강가에
雨聲纔過暮雲收 비 소리 조금 지나니 저녁 구름 걷히네.
輪生晦魄三更出 어둠과 밝음은 윤생하니 삼경(三更;11~13시)에 나타나고
鏡照盈虛萬古浮 거울에 비치는 가득차고 이지러짐은 만고(萬古)에 덧없구나.

 

影似羿弦禽語亂

恨餘湘瑟雁來愁

湧金門外西湖夜

堪笑人間嵗色秋

爲 攬秀亭 補壁 乙亥春日

金相中 大兄 雅屬 余而書之

 

 

 

 

登 攬秀亭
夏山 曺友仁詩
仁祖 時知中樞府事右副承旨
危亭向日破天慳
控引方隅體勢寬
地盡上流橫奔蒼
雲垂鉅野望彌谩
潮聲晩落三浪浦
雁路遙通七點山
樓在漢江名第一
若論優劣品題難
壬申季春上澣
成均館典禮委員長
晉州後人 菊史 姜正熙書

 

*조우인(曺友仁1561―1625)은 시 · 그림 · 글씨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으며, 글씨는 특히 진체(眞體)와 초서(草書)에 뛰어났다. 벼슬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다.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 · 이재(이齋). 저서로는 이재집(이齋集), 이재영언(이齋詠言) 등이 있다.[네이버 이화에 월백하고 창녕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