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내서읍 평성리 전주이씨 영모재 永慕齋

천부인권 2017. 11. 29. 07:37



2016.11.6. 안성천 맞은 편에서 본 영모재


창원에서 칠원으로 가는 옛 송평로를 따라가면 안성천을 잇는 평성마을의 입구를 이루는 평성교를 건너지 않고 좌측 회원구 내서읍 평성리 260-1번지에는 전주이씨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이곳 영모재의 재기는 아래와 같이 적었다.





영모재 출입문 일광문


永慕齋記
追慕先而建齋 履霜露而奉享祀 歷世倫綱之常誠也 本朝茂山副正李公完山名閥 孝寧大君諡靖孝公 諱補之后也 至中世累經兵以落鄕 以後先世墓所或失或蕪世守文獻詳無 傳證故積歲雲仍之痛歎已久矣 公之後孫廷植學鎬學敦學允致揆甫不勝 其十二代祖 諱弼立公之無 齋宿之所 與諸族合議數載刱 建齋舍於昌原內西面之平城里 辛亥功告訖 而扁其堂曰永慕 門曰日光 府仰逮魂斯 而感慕聚宗族 而歲祭焉鳴呼偉 哉潛修德而見揚 埋墐玉而復光 天道之相應也 豈不美哉 明其源而慕先 開來學於後昆敎忠孝 而敦睦讀詩書家迎士林 而矜式請遠朋 而講義憶千年無斁計 後孫之繁衍 性幣俎豆 而安靈赫赫遠傳 而百世之孝感極 言而爲記
壬子 三月日 密陽 朴永儀 撰


영모재기

선조를 추모하기 위하여 재실을 짓고 서리 이슬을 밟으며 향사를 받들고 대대로 내려온 것은 인륜과 삼강을 이루기 위해 항상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본조(本朝) 무산부정(茂山副正) 이공은 완산명벌의 효령대군으로 시(諡)호는 정효공(靖孝公)이고 휘(諱)는 보(補)이며 임금이다. 중세에 몇 번 난리를 겪어 시골로 내려온 이후 선대의 묘를 혹은 잃고 혹은 황폐되어 대대로 지켜왔던 문헌도 상세함이 없고 전하는 증거는 옛것이라 여러 해 동안 운잉(雲仍)¹⁾이 통탄한지 오래 되었다. 공의 후손 정식, 학호, 학돈, 학윤, 치규가 그의 12대조 휘 필입공(弼立公)에 재계하고 묵을 장소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여러 일족들과 더불어 여러 해 동안 의논 합의하여 창원 내서 평성리에 재실을 창건하고 신해년에 낙성을 하였다. 그 당(堂)의 편액을 말하길 영모(永慕)라 하고 문을 일광(日光)이라 하였다. 머물러 계신 선조의 혼에 우러러 굽어보며 이에 사모심 느끼고 종족을 모아 세시(歲時)에 제사 지냄이라 오호라 위대 하도다 잠겼던 덕을 나타내어 떨치고 묻혀 있던 옥이 다시 빛을 나타냄은 천도가 서로 응했으니 어찌 아름답다 아니하랴 그 근원을 밝혀 선조를 숭모하고 전래된 풍습을 후손들이 배우고 충효를 가르쳐 화목이 두텁고 시서를 읽어 재하고 사림을 맞이하여 법도 배우고 원붕(遠朋)을 청해 강의함은 억천년이라도 무너지지 않는 계책이니 후손들은 널리 번창하리라. 희생짐승으로 제사지내며 신령은 편안하시고 백세토록 효도는 빛나게 오래 전해지니 감격이 극하여 이 말을 기록하노라.


임자년 삼월 밀양 박영의 지음


【주석】

운잉(雲仍)¹⁾ : 8대손을 말하는 운손(雲孫)과 7대손을 말하는 잉손(仍孫)을 합해서 말하는 것으로 썩 먼 대(代)의 손자(孫子)를 이르는 말.




영모재 모습



일광문 편액


출처 및 참고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2004.1)-삼덕정판인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