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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진 나루 홀로 지키는 백진이씨 소우정 消憂亭

천부인권 2017. 3. 4. 01:11



<2017.2.21. 소우정이 있는 임해진 풍경>

 

낙동강이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오다 비리산(300m)의 암석층을 만나 단애를 이루면서 꺾어지는 곳에 碧珍李氏(벽진이씨)가 남긴 消憂亭(소우정)이 있다. 전통시대에는 지금의 국도 1022호가 존재하지 않았고, 노리로는 정분난 개가 길을 알려줬다는 개비리길만 있던 곳이다. 따라서 뱃길을 이용하는 임해진 나루가 활발하게 이용되었으며 강 건너 창원시의 主勿淵津(주물연진)으로 통하는 중요한 뱃길이 있던 곳이다.

창녕군 부곡면 낙동로 1859(청암리 1046)에 있는 消憂亭(소우정)臨海津(임해진) 삼거리에서 노리 방향의 산기슭에 위치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민물회를 파는 횟집도 있었으나 4대강 사업으로 횟집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을 했다.




<2017.2.21. 소우정 앞을 지나는 낙동로(국도1022호)>


消憂亭(소우정) 안내문에 의하면 조선 중기의 학자 碧珍李氏(벽진이씨) 消憂軒(소우헌), 退憂軒(퇴우헌) 李道一(이도일 1581~1667)의 유적이다. 증조부는 우우정(友于亭) 이유온(李有溫)이고, 조부는 참판(參判) 이엄(李儼)이다. 부는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된 이석경(李碩慶)이고, 이도자(李道孜)와 이도유(李道由)의 동생이다. 아들로 이담(李澹이연(李演이윤(李潤이정(李渟이필(李泌이양(李瀁)이 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나 제현(諸賢)으로부터 추앙을 받았으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일필성문(日必省問)하였다. 광해군 8(1616)에 음직으로 천거(薦擧)되어 부사용(副司勇)이 되고, 곧 부사과(副司果)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92(선조 25) 12세 되던 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강릉(江陵)으로 피신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17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의병에 가담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전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 태종(淸太宗) 용골대(龍骨大)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창의(倡義)하여 그의 창고정곡(倉庫正穀) 400석을 군량미(軍糧米)로 수송(輸送)하고 의병(義兵)을 모아 싸움터로 보냈다. 이후 김상헌(金尙憲)의 천거로 칠월현감(漆原縣監)을 제수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의 주장이 맞섰으나, 결국 성문(城門)을 열고 항복한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통곡하면서 북벌책(北伐策)을 상소하여 설욕하고자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어필(御筆)로 동지중추(同知中樞)를 특제(特除)하였으며,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려졌다.

만년에 임해진 강가에 일명 江亭(강정)를 지어 소우헌(消憂軒)이라하고, 정자의 터가 매우 좁아 겨우 무릎을 용납할 만하다고 하여 容膝軒(용슬헌)이라 편명했다. 문집으로 소우헌집(消憂軒集)이 전하며, 창녕(昌寧) 덕림서당(德林書堂)에 제향(祭享) 되었다.





지금의 소우정은 1990419일 중건한 건물로 중건상량문은 淸州 鄭允容(청주 정윤용)이 짓고 썼다.




<2017.2.21. 임해진에서 바라본 주물연진 풍경>



<2017.2.21. 주물연진과 명촌마을 풍경>



<2009.10.14. 주물연진과 명촌마을 풍경>



<2017.2.21. 소우정>



<2009.10.14. 성재(性齋) 허전(許傳 1797~1886)의 소우정 편액>



<2009.10.14. 용슬헌 편액>



<2009.10.14. 소우정 중건 상량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