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2. 서북 방향에서 본 추화산봉수
날씨 좋은 12월에 추화산(성황봉)봉수를 찾아 봉수가 있는 밀양시 교동 62-3번지로 차를 몰았다. 추화산성과 추화산봉수(성황봉봉수)로 오르는 길은 산성의 북문이 있던 곳으로 임도가 나있다. 추화산(推火山 해발 240m) 정상까지 차량으로 접근이 가능하여 등산을 하지 않아도 된다. 추화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인 ‘백운사 범종(白雲寺 梵鐘)’이 있는 영천암을 스쳐 지난다. 추화산 산정부에는 추화산성이 있는데 추화산성 안내판에서도 설명하고 있듯이 해양문화권이 내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천혜의 요충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산정의 남쪽은 급격한 경사도를 이루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모습을 하고 있고, 그 위에 다시 방어벽을 쌓은 산성이라 적이 이 추화산성을 공격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 추화산봉수를 탐방하여 ‘제2거 간봉(8)’ 노선의 경남지역은 밀양 상동 분항봉수를 제외하고 『가덕도 천성연대봉수→김해 성화례산봉수→김해 분산봉수→김해 진영 자암산봉수→밀양 백산봉수→밀양 남산봉수→밀양 추화산(성황봉)봉수→밀양 상동 분항봉수』까지를 찾았다.
북쪽 방향으로 놓여진 제단과 봉수
이곳 추화산봉수의 안내판에는 이처럼 기록하고 있다.
『봉수는 변방 국경의 긴급한 사항을 중앙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상의 목적으로 설치된 통신수단이다. 산정(山頂)과 산정을 잇는 봉수대는 밤에는 햇불로, 낮에는 연기로서 신호하여 의사를 전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락국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할 때 봉화로 신호 했다는 「三國遺事 駕洛國記」를 봉수의 기원으로 하고 있다.
봉수의 중요 연락 노선은 함경도의 경흥, 경상도의 동래, 평안도의 강계와 의주, 전라도 순천 등 다섯 군데를 기점으로 하여 모두 서울의 남산(木覓山)을 종점으로 연결하였는데 이 다섯 군데를 직봉이라 하였고 보조노선을 간봉이라 하였는데 두 노선이 교차되는 것을 합봉(合烽)이라 하였다.
우리 밀양에는 1654년에 신설된 백산봉수를 제외한 남산봉수, 추화산봉수, 분항봉수는 봉수제도가 국법으로 확립된 고려시대(1149년) 때부터 갑오개혁(1894년)으로 봉수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추화산 봉수는 김해 성화례산에서 봉기한 봉수를→분산→자암산→밀양 백산→밀양 남산→추화산→분항산→경북 청도 남산을 전보(傳報)하는 영남좌도연제의 제2거소노선의 간봉선(嶺南左道連梯 第二炬 所路線 間烽線)에 해당한다.』
안내판 기록에서 “산정(山頂)과 산정을 잇는 봉수대”라는 표현은 꼭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으로 보다 명확히 표현 한다면 봉수대와 봉수대는 서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봉수군이 한달음에 오를 수 있는 위치를 선택한다. 따라서 인근의 산정에 세우기보다 서로가 잘 보이는 능선에 봉수대를 만든 경우가 많다. 또한 김해 성화례산봉수는 웅천 가덕도 천성봉수와 가덕 말곶망봉수에 응하며, 실재로 임진왜란 때에는 가덕 말곶망봉수에서 처음 봉수가 올랐고, 이어 천성봉수가 봉수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교통편 봉수조에는
고려 때 시작되어 [의종(毅宗) 기사년(己巳年 1149)에 봉수(烽燧) 방식이 정해졌는데 평시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하나씩 피우되 이급(二級)이면 2번, 三級이면 3번, 사급(四級)이면 4번으로 했다. 각 곳마다 방비하는 장정이 200명인데 장정 20명에게 각 사례대로 평전(平田) 1결(結)을 주었다. 조선조의 법전에는 평시에 1거, 적의 모습이 나타나면 2거, 경계에 가까워 오면 3거, 경계를 범하면 4거, 접전이 일어나면 5거를 올리고 연일 접전이 일어나면 섶을 쌓아놓고 이리 똥(狼糞)을 사용하여 밤에는 불을 들고 낮에는 섶을 태웠다. 서울에서는 남부장(南部將)이 병조(兵曹)에 고하여 입계(入啓)하고, 지방에서는 봉장이 주진(主鎭)에 고하였다.] 「속대전(續大典)에는 불이 끊어진 곳의 봉졸(烽卒)은 극변(極邊:먼 변방)의 군사로 충당되었고, 도적이 쳐들어 왔는데 봉화를 알리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하고, 거짓으로 봉화를 올린 자는 일률(一律:사형에 처하는 죄)로 하였다. 고종 갑오(甲午-1894)에 팔도의 봉수가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따랐다. 본부(本府)에서는 백산(柏山)-남쪽으로는 김해의 자암봉수에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남산봉수에 호응한다. 남산(南山)-북쪽으로는 추화산봉수에 호응한다. 추화(推火)-북쪽으로는 분항(盆項)봉수에 호응한다. 분항(盆項)-북쪽으로 청도의 남산봉수에 호응한다. 〬 이제 금산과 청운의 봉수는 읍지에 보이지 않으므로 비워 둔다.
烽燧始于高麗 毅宗己巳定烽燧式平時夜火晝烟各一 二急二 三急三 四急四 每所防丁二百丁二十人 各例給平田一結 國朝典平時則一炬 賊現形則二炬 近境則三炬 犯境則四炬 接戰則五炬 連日接戰則積柴用狼糞夜則擧火晝則燔柴 京則南所部將告兵曹入啓外則熢將告主鎭 續大典絶火處烽卒極邊充軍 賊到不報火者處斬 僞擧熢火者用一律 高宗甲午廢八路烽燧
國朝因之本府則 柏山南應金海子庵 北應南山 南山北應推火 推火北應盆項 盆項北應淸道南山 〬今金山靑雲烽燧不見於誌故閑之
추화산봉수 아랫쪽
복원한 모습의 추화산봉수
추화산봉수 북쪽 상동 방향
추화산봉수 서쪽 모습
남쪽 방향의 밀양 시가지
밀양 종남산봉수
밀양 상동 분항봉수
추화산성 동문지 모습
경남 밀양시 교동 53에 위치한 추화산성(推火山城)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94호로 등록된 문화재이다. 이곳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었다.
『이 산성은 해발 240m의 추화산 정상부분을 빙 둘러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밀양의 옛 이름인 추화군(推火郡)은 이 산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밀양은 가야시대에는 신라와 가야가, 또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 후백제와 고려가 서로 다투던 지역으로 빈번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따라서 추화산은 군사 요충지로 이용되었다. 성의 돌로 쌓은 부분은 경사진 면에 받침돌을 얹고 위로 올라갈수록 폭을 좁게 쌓아 올렸다. 돌과 흙을 혼합하여 쌓은 부분은 땅을 다지지 않은 채 양쪽에 돌로 겉쌓기를 하고 중간에 흙을 채워 넣었다. 성벽의 원래 길이는 104km로서 동·서·남 세 군데에 성문을 설치하였고 북쪽 계곡의 평지에 우물, 연못, 부속 건물을 두고 정상에 봉수대를 배치하였다. 현재 성벽을 비롯한 다른 시설물 대부분이 흔적만 남아 있지만 산마루 서남쪽에는 300m 정도의 성벽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추화산성 동문지 일부를 복원한 모습
가덕도 천성연대봉수 ⇔ 부산 강서구 성화례산봉수 ⇔ 김해 분산봉수 ⇔ 김해 자암봉수 ⇔ 밀양 백산봉수 ⇔ 밀양 종남산 봉수대 ⇔ 밀양 추화산봉수 ⇔ 밀양 상동 분항봉수 [제2거 간봉(8)]
여지도-밀양부
여지도 주기(輿地圖 注記)의 기록은 봉군은 100명[烽軍一百名]이다.
백산봉 남으로 자암봉수와 30리 거리로 서로 응한다. 북으로 남산봉수와 20리 거리에 응한다.[栢山烽 南距自菴烽三十里來應 北距南山烽二十里去應]
남산봉 남으로 백산봉수와 20리로 서로 응한다. 북으로 성황봉수와 20리 거리에 응한다.[南山烽 南距栢山烽二十里來應 北距城隍烽二十里去應]
성황봉 남으로 남산봉수와 20리로 서로 응한다. 북으로 분항봉수와 15리 거리에 응한다.[城隍烽 南距南山烽二十里來應 北距盆項烽十五里去應]
분항봉 남으로 성황봉수와 15리로 서로 응한다. 북으로 청도 남산봉수와 30리 거리에 응한다.[盆項烽 南距城隍烽十五里來應 北距淸道南山烽三十里去應]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 「경남지역 봉수Ⅲ」추화산봉수 발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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