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봉수대

밀양 분항봉수를 찾아

천부인권 2018. 1. 2. 06:00



2018.01.01. 상동면 유산마을 입구에서 본 분항봉수


창원 봉림동 새해맞이 차(茶)나눔 행사를 마치고 창원향교 망월례에 참석하여 떡국을 먹은 후 경남지역 ‘제2거 간봉(8)’의 마지막 봉수인 밀양 분항봉수를 찾아 나섰다. 추화산봉수와 직선거리 6.06km에 밀양강이 만든 퇴적층을 두고 마주하는 밀양 상동면 금산리 산 28-3번지에 위치한 분항봉수(盆項烽燧 해발 243m)는 옥천암의 북서방향에 직선거리 160m에 있다.




상동면 금산리 유산마을 입구에서 본 분항봉수


이곳 분항봉수를 탐방하여 ‘제2거 간봉(8)’ 노선의 경남지역은 가덕도에서 밀양『가덕도 천성연대봉수 ⇔ 부산 강서구 성화례산봉수 김해 분산봉수 김해 자암봉수 밀양 백산봉수 밀양 종남산 봉수대 밀양 추화산봉수밀양 상동 분항봉수 [제2거 간봉(8)]』까지 8곳의 봉수를 찾았다.




옥천암과 분항봉수


상동면 금산리 유산마을은 ‘밀양가르멜여자수도원’이 우측 산속에 있고 좌측 옥천사가 있는 봉수 방향은 주택지를 개발하여 전원주택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옥천샘 모습


차량은 옥천암(玉泉庵)에까지 갈 수 있고 주차 후 대웅전 앞에서 추화산봉수와 밀양 종남산봉수를 볼 수 있다. 옥천암의 이름은 옥천암 입구에 있는 옥천약수 때문에 붙어진 것으로 보이며, 옥천샘 옆에는 제법 운치 있는 우리나라 향나무가 한그루 서있다. 옥천암은 요사채와 산신각 및 대웅전이 세워져 있는데 모두 프라스틱으로 된 기와가 입혀져 있다.




옥천암 대웅전 앞에서 바라 본 추화산과 종남산



추화산봉수는 그 형체가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경상도 밀양도호부 봉수편에는
분항봉수는 부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남쪽으로 추화산에 응하고 북으로는 청도 남산에 응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第二十六券 慶尙道 密陽都護府 烽燧 [盆項烽燧 在府北二十里 南應推火山 北應淸道南山]




옥천암 뒤쪽 능선에 올라 좌측 능선을 따라가는 길



능선 7부에서 만나는 탱자나무


옥천암 뒤쪽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가면 분항산 능선에 오르는데 능선에서는 좌측으로 오르면 등산로 옆으로 탱자나무가 능선을 따라 서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이곳까지 밭농사를 지었고 그때 울타리를 했던 탱자나무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보였다.





10여분 등산을 하다보면 분항봉수의 흔적인 방호벽을 쌓았던 돌을 발견하게 된다. 접근하는 길은 희미하므로 그리 높지 않으니 무작정 오르면 중앙에는 민묘가 있다.





방호벽의 흔적과 민묘




이 민묘의 앞에는 오석의 작은비가 세워져 있는데 “유인광주김씨지묘(孺人廣州金氏之墓)”라 기록하고 있다. 동남편의 방호벽은 묘지를 쓰기 위해 6m정도 훼손하여 앞면을 개방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방호벽은 장축 22m, 단축 21m로 20~30cm 자연석을 허튼층쌓기로 했다. 평면 형태는 북서편의 방호벽이 내측으로 들어간 부정형이다. 잔존 상태가 양호한 외벽은 8~10단, 내벽은 4~5단 정도가 남아있으며, 방호벽의 폭은 대체로 2.2m이나 북서편 석축은 1.8m이다. 방호벽 남쪽에는 2m 정도의 외벽이 단절된 것이 확인 되는데 이는 개방식 출입구로 추정된다. 주변에는 와편이 수습 된다.







남쪽 방향의 방호 외벽





남쪽 방향 아래에는 시누대 군락이 있어 봉수군 집터임을 암시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봉수군들이 거주하던 곳은 화살을 만들기 위해 시누대를 심었다. 이곳에는 사방에 잡목과 남쪽은 곰솔로 인해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남쪽의 추화산봉수를 볼 수 없고 북으로는 청도의 남산봉수를 볼 수 없다.




분항산 최 정상부


혹시 분항산(盆項山 해발 266.9m) 높은 봉우리에 오르면 볼 수 있을까하여 올랐지만 이곳 역시 잡목과 소나무들로 인해 사방을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만 잡목들 사이로 청도를 볼 수 있을 분이다. 분항산 정상부에는 군인들이 돌을 쌓아 만든 반공호가 있다. 정상의 소나무에는 「준·희」가 매달아 둔 표지가 있어 이 산의 높이를 알 수 있다.




분항상 정상의 산 표지와 반공호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교통편 봉수조에는
고려 때 시작되어 [의종(毅宗) 기사년(己巳年 1149)에 봉수(烽燧) 방식이 정해졌는데 평시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하나씩 피우되 이급(二級)이면 2번, 三級이면 3번, 사급(四級)이면 4번으로 했다. 각 곳마다 방비하는 장정이 200명인데 장정 20명에게 각 사례대로 평전(平田) 1결(結)을 주었다. 조선조의 법전에는 평시에 1거, 적의 모습이 나타나면 2거, 경계에 가까워 오면 3거, 경계를 범하면 4거, 접전이 일어나면 5거를 올리고 연일 접전이 일어나면 섶을 쌓아놓고 이리 똥(狼糞)을 사용하여 밤에는 불을 들고 낮에는 섶을 태웠다. 서울에서는 남부장(南部將)이 병조(兵曹)에 고하여 입계(入啓)하고, 지방에서는 봉장이 주진(主鎭)에 고하였다.] 「속대전(續大典)에는 불이 끊어진 곳의 봉졸(烽卒)은 극변(極邊:먼 변방)의 군사로 충당되었고, 도적이 쳐들어 왔는데 봉화를 알리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하고, 거짓으로 봉화를 올린 자는 일률(一律:사형에 처하는 죄)로 하였다. 고종 갑오(甲午-1894)에 팔도의 봉수가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따랐다. 본부(本府)에서는 백산(柏山)-남쪽으로는 김해의 자암봉수에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남산봉수에 호응한다. 남산(南山)-북쪽으로는 추화산봉수에 호응한다. 추화(推火)-북쪽으로는 분항(盆項)봉수에 호응한다. 분항(盆項)-북쪽으로 청도의 남산봉수에 호응한다. 〬 이제 금산과 청운의 봉수는 읍지에 보이지 않으므로 비워 둔다.

烽燧始于高麗 毅宗己巳定烽燧式平時夜火晝烟各一 二急二 三急三 四急四 每所防丁二百丁二十人 各例給平田一結 國朝典平時則一炬 賊現形則二炬 近境則三炬 犯境則四炬 接戰則五炬 連日接戰則積柴用狼糞夜則擧火晝則燔柴 京則南所部將告兵曹入啓外則熢將告主鎭 續大典絶火處烽卒極邊充軍 賊到不報火者處斬 僞擧熢火者用一律 高宗甲午廢八路烽燧
國朝因之本府則 柏山南應金海子庵 北應南山 南山北應推火 推火北應盆項 盆項北應淸道南山 〬今金山靑雲烽燧不見於誌故閑之





지승(地乘)의 주기에는 봉수대는 백산봉수, 남산봉수, 성황봉수, 분항봉수 등 4곳이고, 봉수군은 100명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烽臺四處 烽軍一百名]




출처 및 참고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 「경남지역 봉수Ⅲ」 분항봉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