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봉수대

김해 자암산봉수를 찾아

천부인권 2017. 12. 25. 06:06



2017.12.23. 김해 자암산봉수를 봉화마을에서 본 풍경


대부분의 봉수는 서로 바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마련인데 김해 분산봉수(盆山烽燧-해발 323m)와 진례 자암산봉수(子巖山烽燧-해발 134.8m)는 서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위치와 거리만으로 어느 곳에 있는지 짐작할 뿐이다. 어차피 볼 수 없다면 오늘처럼 습기가 많아 시계가 멀리 보이지 않는다 해서 못갈 이유가 없는 곳이다. 용강고개를 넘어 가면서 날씨가 좋지 않아 자암산봉수에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밀양 백산봉수와 종남산봉수도 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며 진례 봉화마을로 차를 몰았다.





봉화마을로 향하는 마음은 항상 기쁠 수가 없다.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항상 마음 한 구석이 짠하게 젖어드는 애잔함이 있다. 2009년 5월 23일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의 죽음은 이제까지 생각 없이 살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해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명제를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대한민국에서 진보적 생각을 가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조문객으로 참여를 하여 봉화마을이 비좁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이런저런 이유로 봉화마을을 찾았지만 2011년을 마지막으로 마음속 애잔함을 떨칠 수 없어 의식적으로 전혀 찾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그때와 전혀 다른 목적으로 이곳을 방문하지만 애잔한 마음 떨칠 수 없어 하얀 국화 한송이 사들고 묘소 앞으로 향한다.





옛 월지국 허황옥이 가야왕 수로에게 시집와 터 잡고서
무사히 김해에 도착함을 축원하여 분산에 해은사를 지었다.
천태산 자락에 부은사를 건설하여 아버지 은혜에 기도하였고
무척산 자락에는 모은암을 세워 키워 주신 어머님께 절 했다네.
자암산 사자암이 옛 선인들의 기도터라
그 아래 자암사 지어 자식 많이 달라 기도하고 절하였다.
어느 날 영험한 기운 받은 애기가 자암산 아랫마을에서 태어나고
청년으로 성장하여 당나라 황후를 꿈속에서 희롱했다.
괴로움을 당한 당나라 황궁에서 자암산으로 신승을 보내어서
그 청년 제압하여 바위 속에 가두고 불상으로 봉인했다 전하네
이곳 자암마을은 오늘날 봉화마을이라 부르는데
조선시대 외침을 알리는 봉화가 세워져 오래되니 지명 이름으로 바뀌었다.
농사 지를 땅이 없어 가난하게 살았던 이곳 봉화마을은
거렁뱅이가 동냥하여 얻은 음식을 오히려 동네에 주고 갔다 전한다.
그렇게 가난한 이곳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나왔고
퇴임하여 고향 찾아 돌아오니 어느새 관광지가 되어 부자마을로 바뀌었다.
평지풍파 일어나는 세상 이치는 낙향한 대통령에 화를 미쳤고
한 세상 꿈꾸는 나비되어 이승으로 훨훨 날아갔구나.
어느 듯 뭍사람들의 뜻이 모여 사자바위에 옛 봉화대 다시 만들고
세상을 희롱하는 신호로 봉화연기 피기를 기대하고 있다네.




노무현 대통령 묘지와 그 배경이 되는 부엉이 바위



자암산 부처



정토원에서 바라 본 묘역



정토원에서 사자바위로 오르는 계단길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복원 한 봉수연조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2권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봉수 편에는 이처럼 기록했다.
자암산봉수(子巖山烽燧) 남쪽으로 분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밀양부 남산에 응한다. [子巖山烽燧 南應盆山 北應密陽府南山]






김해읍지(金海邑誌) 봉수 편에는 아래처럼 기록하고 있다.
자암봉(子巖烽) 부에서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남쪽으로 분산봉에 응하고 북쪽으로 밀양 남산봉에 알리는데 서로의 거리가 30리 이다. [子巖烽 在府北三十里 南應盆山烽 北報密陽南山烽 相距三十里]





해동지도에는 김해부의 봉수를 아래처럼 기록했다.
성화야봉수 남쪽 끝에는 웅천 천성연대에 응하고, 동북에 있는 산성봉수에 응하며 육로이다.
산성봉수 서남 끝에 있는 성화야봉에 응하고 육로이다. 서북에 있는 자암봉에 응하고 육로이다.
자암봉수 동남 끝에 있는 산성봉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밀양 백산봉에 응하며 육로이다.
[省火也烽燧 南末應熊川天城烟臺 東北去應山城烽陸路 山城烽燧 西南末應省火也烽 西北去應子庵烽陸路 子庵烽燧 東南末應山城烽 北去應密陽栢山烽陸路]





가덕도 천성연대봉수 ⇔ 부산 강서구 성화례산봉수 김해 분산봉수 김해 자암봉수 밀양 백산봉수 밀양 종남산 봉수대 밀양 추화산봉수밀양 상동 분항봉수 [제2거 간봉(8)]





이곳 자암산 봉화는 입지적 위치로 보건데 지금 봉화연조를 복원한 사자바위 정상부가 아니라 호미든 관음상이 서있는 봉우리일 가능성도 있다. 실재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2013년)』에서 「발행한 경남지역 봉수Ⅱ」에서도 호미든 관음상이 있는 봉우리를 추정지로 잡고 있다. 그래서 두 곳의 봉수군의 집터가 될 만한 장소를 찾아보면서 기와 파편이나 도자기 파편 등을 찾아보았다. 결론은 사자바위 쪽의 집터 위치에서는 와편과 도자기 파편이 많이 발견 되고 호미든 관음상이 있는 봉우리를 중심으로 찾은 곳에는 그런 흔적이 없었다.





이곳 자암산봉수 복원지 앞 안내판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자암봉수대는 사자바위 정상부(해발 134.8m)에 자연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그 사이에 채석한 부정형 석재로 연대를 축조하였다. 연대의 형상파악을 위해 실시한 학술 발굴결과 연대의 평면 형태는 원형과 방형이 결합된 형태이며 주축 방향은 남-북 방향이다. 규모는 높이가 1~3m, 직경은 동-서 8.5m, ska-북 105m이고 하부 둘레는 31.5m이다. 지형상 서쪽은 경사가 완만한 반면 나머지는 경사가 급하여 연대 외에 다른 시설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이 봉수대를 처음 만든 것은 고려시대로 추정 되며, 1895년(고종32) 봉수제도가 현대적 전화통신체제로 바뀌어 폐지되었다. 자암봉수대는 노선과 성격상 연해나 변방에 설치된 ‘연변봉수’에 속하는데 자암봉수는 남쪽으로 40리(약10km) 떨어진 동상동에 있는 분산성(사적 제66호)봉수대의 신호를 받아 북쪽으로 60리(15km) 떨어진 밀양 남산봉수에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경남지역(부산→김해→밀양)과 경북지역(대구→경산)소재 봉수를 차례로 거쳐 영천 성황당봉수에서 합쳐진 다음 최종적으로 무악동봉에 종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