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봉수대

밀양 백산봉수를 찾아

천부인권 2017. 12. 26. 09:49



2017.12.25. 서남쪽방향에서 본 하남읍 백산봉수


비가 온 후 날씨가 맑아 밀양시 하남읍 백산리에 위치한 백산봉수를 찾아 나섰다. 백산봉수가 있는 백산(栢山 해발 107m)은 낙동강을 끼고 발달한 하남평야의 중앙에 우뚝 솟은 작은 산으로 사방이 평야이다 보니 높이에 비해 어디에서도 잘 보이는 이정표 역할을 하는 산이다.
동쪽으로 김해 분산(盆山 해발 382m)의 김해천문대가 보이고, 남동쪽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있는 진영 봉화산의 자암봉수(子庵烽燧 해발 134.8m)를 마주하며 서로 바라본다. 백산봉수에서 직선거리로 분산봉수는 19.27km이고, 자암봉수는 6.78km이며, 보이지 않는 종남산의 남산봉수와는 8.76km 떨어져 있다.
봉수 찾기의 시발점이 된 밀양 종남산(終南山 해발 664m) 정상에 위치한 남산봉수에 올랐을 때는 하남평야에 있는 백산이 보인 것으로 착각했는데 사진을 다시 보니 대덕산(大德山 해발 634m) 자락에 걸려 백산은 보이지 않는다.




백산 내촌마을 표지석 앞에서 바라 본 백산



2017.12.22 서쪽에서 바라 본 백산봉수 원경



차량 이동이 가능한 8부능선


이곳 백산의 위성사진을 보면 백산 8부 능선에 건물이 보인다. 주소는 밀양시 하남읍 백산리 886번지인데 절을 짓기 위해 지어놓은 가건물의 형태이다. 이곳까지 차량으로 이동이 가능하고 좌측으로 가면 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 백산은 전체가 묘지로 이루어진 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밀양시청이 있는 북쪽 방향을 보면 팔봉산(해발 391m)이 우뚝 솟아있는 모습을 본다.




산행 초입에서 바라 본 밀양시청 방향



잘 남아 있는 봉수 집터 흔적


경상도에서는 화살의 재료가 되는 가늘고 곧게 자라는 대나무를 시누대라 말하는데 한자로는 산죽(山竹)’이라 표기하며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표준어로는 신우대라고 쓴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시누대라는 우리민족의 표준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벼과의 여러해살이풀인 시누대는 화살, 복조리, 꽹과리채, 소금(小琴) 등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데 특히 전통시대에는 화살을 만들기 위해 절이나 군대가 있는 진영 및 봉수군이 머물던 봉수집 근처에 심었다. 봉수대를 찾아다니다 보니 시누대가 있는지도 봉수대가 있는 근거로 보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밀양 백산봉수와 녹산 성화례산봉수의 시누대는 의미가 있다.




백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봉수 집터 위치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2015년)』에서 발행한 「경남지역 봉수Ⅲ」 밀양시 백산봉수대의 기록은 비지정문화재이고 봉수노선은 제2거 간봉(8)에 속하며 봉수관련 시설은 미확인 되었다고 한다.




백산 정상의 민간신앙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돌무지와 당산집-동남방향에서



북서방향에서 본 돌무지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교통편 봉수조에는

고려 때 시작되어 [의종(毅宗) 기사년(己巳年 1149)에 봉수(烽燧) 방식이 정해졌는데 평시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하나씩 피우되 이급(二級)이면 2, 三級이면 3, 사급(四級)이면 4번으로 했다. 각 곳마다 방비하는 장정이 200명인데 장정 20명에게 각 사례대로 평전(平田) 1()을 주었다. 조선조의 법전에는 평시에 1, 적의 모습이 나타나면 2, 경계에 가까워 오면 3, 경계를 범하면 4, 접전이 일어나면 5거를 올리고 연일 접전이 일어나면 섶을 쌓아놓고 이리 똥(狼糞)을 사용하여 밤에는 불을 들고 낮에는 섶을 태웠다. 서울에서는 남부장(南部將)이 병조(兵曹)에 고하여 입계(入啓)하고, 지방에서는 봉장이 주진(主鎭)에 고하였다.] 속대전(續大典)에는 불이 끊어진 곳의 봉졸(烽卒)은 극변(極邊:먼 변방)의 군사로 충당되었고, 도적이 쳐들어 왔는데 봉화를 알리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하고, 거짓으로 봉화를 올린 자는 일률(一律:사형에 처하는 죄)로 하였다. 고종 갑오(甲午-1894)에 팔도의 봉수가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따랐다. 본부(本府)에서는 백산(柏山)-남쪽으로는 김해의 자암봉수에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남산봉수에 호응한다. 남산(南山)-북쪽으로는 추화산봉수에 호응한다. 추화(推火)-북쪽으로는 분항(盆項)봉수에 호응한다. 분항(盆項)-북쪽으로 청도의 남산봉수에 호응한다. 이제 금산과 청운의 봉수는 읍지에 보이지 않으므로 비워 둔다.

 

烽燧始于高麗 毅宗己巳定烽燧式平時夜火晝烟各一 二急二 三急三 四急四 每所防丁二百丁二十人 各例給平田一結 國朝典平時則一炬 賊現形則二炬 近境則三炬 犯境則四炬 接戰則五炬 連日接戰則積柴用狼糞夜則擧火晝則燔柴 京則南所部將告兵曹入啓外則熢將告主鎭 續大典絶火處烽卒極邊充軍 賊到不報火者處斬 僞擧熢火者用一律 高宗甲午廢八路烽燧

國朝因之本府則 柏山南應金海子庵 北應南山 南山北應推火 推火北應盆項 盆項北應淸道南山 今金山靑雲烽燧不見於誌故閑之

 




攬秀亭十二景(남수정십이경)
金九峰先生詩(김구봉선생시)

栢山夕烽           백산의 저녁 봉화
落照移山暝色寒 산에 석양지니 어두운 빛 차가운데
黃昏點火照江干 황혼에 불을 켜 강 언덕을 비춘다.
海暗鯨鯢腥塵宿 바다가 어두우니 흉악한 왜놈 티끌 비린내 잠들고
歲遠龍蛇兵燼殘 세월이 오래되어도 임진왜란 잔재는 남아있다.
經綸不借郵傳疾 경륜은 역전(驛傳)처럼 신속함을 빌리지 못했고
消息非關道路難 소식은 도로의 어려움에 관련됨은 아니었다.
千里邊奇知一夕 천리 변방의 기이함을 하루 저녁에 알았으니
太平烟月照長安 태평연월은 장안을 비추리라





가덕도 천성연대봉수 ⇔ 부산 강서구 성화례산봉수 김해 분산봉수 김해 자암봉수 밀양 백산봉수 밀양 종남산 봉수대 밀양 추화산봉수 밀양 상동 분항봉수 [제2거 간봉(8)]




하남평야와 대산평야 뒤로 정병산과 비음산, 대암산, 용제봉 등이 배경이 된다.



김해 분산 천문대와 마주한다.



김해 진영읍 봉화산 자암봉수



삼랑진 철교와 천태산




해동지도(海東地圖) 밀양부의 봉수에는 이처럼 기록했다.

분항봉수 북쪽으로 30리에 있는 청도 남산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15리에 있는 성황봉수와 서로 응한다.

성황봉수 북쪽으로 15리에 있는 분항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20리에 있는 남산봉수와 서로 응한다.

남산봉수 북쪽으로 20리에 있는 성황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20이에 있는 백산봉수와 서로 응한다.

백산봉수 북쪽으로 20리에 있는 남산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30리에 있는 김해 자암봉수와 서로 응한다.


盆項烽燧 北距淸道南山烽三十里去應南距城隍烽十五里來應

城隍烽燧 北距盆項烽十五里去應南距南山烽二十里來應

南山烽燧 北距城隍烽二十里去應南距柏山烽二十里來應

柏山烽燧 應北距南山烽二十里去應南距金海自庵烽三十里來





1872년 지방지도 밀양부지도에도 백산봉대(柏山烽臺), 남산봉대(南山烽臺), 추화산봉대(推火山烽臺), 분항산봉대(盆項山烽臺)가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