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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오서리 안동권씨 사정려각 四旌閭閣

천부인권 2018. 1. 30. 08:54

 

 

 

2017.1.14. 진전면 오서리 4정려각 원경

 

창원시 진전면 대실로 57-27[오서리 1039]에는 전통시대 효·열을 장려했던 흔적으로서 당시의 윤리적 지향과 국가 정책에 대해 알 수 있는 비지정문화 유적인 ‘오서리 사정려각(五西里 四旌閭閣)’이 있다. 정려각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고 월안마을 보강산[197m] 남동쪽 구릉 말단부에 해당한다.

 

 

 

 

오서리 4정려각 모습


오서리 4정려각은 조선 인조 시기의 월암 권용현, 영조 시기의 모헌 권정래, 숙종 시기의 농계 권중엄 및 권석의 처 밀양 박씨 등 4효열을 기리는 정려이다. 3인은 그들의 특이한 행적으로 정려되었고, 권석의 처 밀양 박씨는 시집온 지 3년 만에 남편이 병을 얻어 세상을 뜨자 같은 날에 자결하여 열부의 정려를 받았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가 이 집안 출신이다.

 

 

 

 

효열각

 

상산商山 김인섭金麟燮이 기록한 사정려기四旌閭記


진전면 오서리 사정려기 四旌閭記 [해석]

진해현은 바닷가에 있는 조그마한 고을로 권씨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곳이다. 후손들이 매우 부지런하고 효제(孝悌)의 행실을 행하여 향방(鄕邦)에 소문이 난 것은 조선(祖先)의 덕과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肅宗) 때에 휘 용현(諱 龍見), 자 기이(字 杞爾), 호 월암공(號 月巖公)이 어려서부터 성품(性稟)이 어질었는데 소학으로 몸을 수양하는 법도(法度)로 하면서 한훤당선생(寒暄堂先生) 김문경공(金文敬公)의 사람됨을 힘껏 사모하여 그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기를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자식으로서 허물이 없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는 한결같이 고자고(高子皐)와 대연 소연(大連 小連)과 같이 시마복(緦麻服)에 이르기 까지 거상(居喪)하기를 잘 하였으며 한 집에 살면서 분가하지 않은 것은 장공예(張公藝)와 같은 덕이 있었다. 이를 조정에서 듣고 아름답게 여겨 부역(賦役)을 면제해 주고 뒤에 특별히 좌승지(左承旨)의 증직(贈職)을 내려 향인들이 살던 곳에 담을 쌓아 사모하다가 사당을 지어 향사를 받는 사실이 삼강편(三綱編)과 읍지에 실려 있다. 증손 정래(曾孫 正來)와 현손 중엄(玄孫 重儼)에 이르러 부자가 또 효로서 조정에 알려져 모두 동몽교관(童蒙敎官)의 증직을 받았다.
고종 7년(庚午 1870) 봄에 많은 선비들이 임금에게 청원하는 글을 올리어 월암공 이하 3세에 정려를 내리고 또 그 세손 석(奭)의 부인 박씨의 열행도 정려(旌閭)를 받게 되어 한 문중에서 정려가 해산의 사이에 빛나고 원근에서 감동하면서 우러러 보았다. 공의 여러 후손들이 나에게 그 사적을 차례로 짓게 하여 그를 대들보에 걸어 무궁하게 후세에 전하여 지기를 도모 하였다.
나는 오직 효는 사람에 있어서 가장 큰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효 아니면 어버이가 없고 어버이가 없으면 내가 태어 날 수 없다. 자고로 자식이 되어서 효도를 다하는 것은 나의 성품에 본래 있는 것이고 직분(職分)으로서 마땅히 할바이므로 인위적으로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교화(敎化)가 쇠퇴(衰頹)하고 오륜이 불명(不明)함으로서 그 어버이에 있어서 이미 너와 내가 따로 있게 되어 간혹 오륜에 어긋나고 인도(人道)가 없어지게 되었다.
공이 홀로 능히 소학의 가르침을 준수(遵守)하고 선사(先師)의 실행을 좇아 효로서 삼세(三世)를 한 행적(行蹟)으로 서로 전하였으니 90된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봉양한 것은 옛날 노래자(老萊子)가 비단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새 새기를 부모 곁에서 희롱(戲弄)하여 부모를 기쁘게 하기를 아버지의 상을 당할 때까지 하였다.
종신토록 어린아이처럼 사모하고 아버지 봉양하기를 50여년에 몸소 농사짓고 고기 잡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바치는 것이 다 날마다 쓰는 평상적인 행동 밖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이렇게 하기가 어렵다.
정성이 감동되면 사물(事物)이 따라 응하였으니 그 자취가 더욱 빛나고 괴이한 일이 나타나는 것은 아버지가 병들어 황어(黃魚)를 생각하니 황어가 스스로 이르고 여막(廬幕)에서 맹수가 스스로 호위하며 얼음이 갈라져 고기를 얻었고 부엌에 들어 온 꿩을 잡은 것이 기전(記傳)에 실린 바인데 왕상(王祥)과 맹종(孟宗) 등 여러 사람들의 괴이한 일들이 서로 닮아 함께 천고에 칭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문화가 한창 발달하고 세상을 잘 다스린 임금은 정려를 나타내고 아름다움을 숭상하여 한 시대의 이목을 권면(勸勉)한 것이 이와 같다. 시경(詩經) 대아(大雅)편에 「효자불궤영석이류(孝子不匱永錫爾類)(효자는 끊임없이 길이길이 복을 받으리라)」 한 것은 다 이를 두고 말한 것인저!
박씨가 조용히 그 남편을 따라 죽은 것은 비록 열장부(烈丈夫)라도 할 수 없는 것을 교화하여 교훈을 세우게 된 것을 특별히 연서(連書)하여 후세에 고하노라.
통정대부 행 사간원 정언 상산 김인섭 기록하다.
(通政大夫行司諫院 正言 商山金麟燮 記)

 

 

 

 

사정려이건기(四旌閭移建記)

 

 

 

 


학생권석처열녀밀양박씨지려

 

 


효자증동몽교관조봉대부권중엄지려

 

 

 

효자증동몽교관조봉대부권정래지려

 

 

 

효자증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권용현지려

 

 

 

 

 

출처 : 디지털 창원문화대전-오서리 사정려각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 발행-사정려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