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진전면 양촌리 효부청송심씨행적비

천부인권 2018. 2. 16. 22:32



2016.10.17. 함포구 진전면 효부 청송심씨 행적비


합포구 진전면 양촌리 193-1번지는 양촌리 변씨 삼강려 성지 옆에 위치한 곳이다. 팔의사로(옛 국도2호) 위쪽 우측을 보면 붉은 벽돌로 담장을 하고 그 안에 비대, 비신, 가첨석을 갖춘 비가 서있다. 이 비의 정면에는 「효부청송심씨행적비(孝婦靑松沈氏行蹟碑)」라 새겼다.
초계 변문연(卞文淵)의 처 청송 심씨의 열행을 기록한 비이다. 이 비문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여기 동산리 대송전 하원임좌(東山里 大松田 下原壬坐)에 부군 초계변공 휘 문연 자 장로(章魯)와 쌍분정토(雙墳淨土)에 영면 하시는 이분은 청송심씨 상서(相瑞)의 女로서 丙申西紀一八九六年 출생이며 오문(吾門)에 입가(入嫁)하여 丙午西紀一九六六年에 타계하셨다. 충효열전진양지속수권이(忠孝烈傳晉陽誌續修卷二)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성품이 매우 날카롭고 엄격한 시부(媤父) 휘 종택(諱 鍾宅)께서 악성난치안병(惡性難治眼病)으로 앞을 보기 어려워 신고막심(辛苦莫甚)인데도 애주(愛酒)하시며 면장 등 고을 유지들과 교우를 단속하셨기에 손발이 되어 길을 인도하느라 때로는 하루 삼십리를 걷는 고행을 십여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며 또한 시모(媤母) 강양이씨(江陽李氏)께서 두종(頭瘇)으로 고통이 극심하시자 환부를 혀로 핥아 완쾌케 하였으니 감천지성(感天至誠)의 유례(類例)가 없는 효행을 칭송하는 소리 드높았고 종문의 집론(集論)으로 표창하여 영원한 효부귀감(孝婦龜鑑)으로 드높이 받들었다. 우리 변문은 고려성종 때 문하시중 시조 문열공 팔계군 휘 정실(庭實)의 혈통을 이어받아 천년세월 동안 중신명관 문호절필 충효열의(重臣名官 文豪絶筆 忠孝烈義)의 찬란한 거성거목이 무수히 청사를 수놓았다. 시조공슬하(始祖公膝下)에는 諱 광(光), 요(耀), 휘(輝) 삼형제가 계셨다. 장파(長派)의 후손은 여말대충절 두문동 72현 휘 윤(贇) 이조 한성판윤 휘 남용(南龍) 이조참판 휘 효경(孝敬) 동복현감(同福縣監) 휘 온(溫)으로 이어져 15세손 진사 휘 국수(國秀)께서는 자장흥(自長興)으로 진주양전(晉州良田) 즉 현재의 경남 의창군 진전면에 이주정착하게 되었다. 17세손 병조판서 휘 연수(延壽) 자 좌승지 휘 립(笠)은 임진란 때 오문의 외손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막하(幕下)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으며 정유란 때 재출정하여 부자동순(父子同殉) 하시자 휘 립의 처 안동김씨가 식음전폐(食飮全廢)로 하조(下從)함으로써 충효열의 귀감으로 삼아 삼강려에 봉안하여 길이길이 숭앙토록 하였다. 18세손 통정 휘 효(崤)의 혈계를 따라 휘 흥학(興嶨) 훈련판관 휘 춘업(春業) 휘 연광(延光) 휘 완신(完信) 휘 원봉(元鳳)으로 계승되었고 휘 종규(宗圭)는 시조부(媤祖父)이시다. 아래로 삼남이녀를 얻으셨으며 장자 상노(相瑙)와 자부(子婦) 밀양손씨 사이에 양섭(良燮), 유섭(有燮), 성호(誠晧), 종섭(宗燮) 등 4남과 2녀를 두었는데 각각 청송심씨 전주이씨 경주최씨에게 출가 하였다.
양섭(良燮)과 의령남씨 사이에 재응(在應), 재경(在競), 준식(俊植)이 있고 유섭(有燮)과 청송심씨 아래 지현(智鉉), 성철(星鐵)이 있다. 차자(次子) 상순(相淳)과 진양강씨 사이에 천섭(千燮), 영섭(英燮), 한섭(漢燮), 기섭(起燮),을 두었고 천섭(千燮)과 김해김씨 사이에 민성(敏誠)이 태어났으며 영섭(英燮)과 청송한씨 밑에 동돈(烔惇)을 얻었다. 삼자 상천(相千)과 의령남씨 사이에 3녀를 두었다. 女 담양전학대 함안조대제 김해김근찬(潭陽田鶴大 咸安趙大濟 金海金根贊)과 각기 결혼하였다. 이렇게 지무엽성(枝茂葉盛)하였다. 여번불록(餘煩不錄)한다. 명(銘)에 이르되 충효열의 무량무변 가승(忠孝烈義 無量無邊 家乘)의 맥통(脈統)이며 위시부모 구환봉양(爲媤父母 救患奉養) 뉘라서 쉽다더뇨 설중죽절(雪中竹節) 심연리(深淵鯉)도 감복(感服)코 자래(自來)러니 효부귀감 진양지에 알알이 별 같도다.』


西紀 1988년 무진삼월 일
족손 초계 변로섭 근찬(族孫 草溪 卞魯燮 謹撰)
족손 초계 변만섭 근서((族孫 草溪 卞萬燮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