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도고헤이하치로 친필 금석문 두개

천부인권 2018. 2. 1. 07:05

창원시 진해구청에 있는 진해산덕환사

 

일본 연합함대사령장관 도고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27.~1934.5.30)는 오늘의 일본을 있게 한 군신(軍神)의 위치에 있는 일본의 영웅이다. 그는 세상의 열강들이 식민지 쟁탈에 열을 올릴 때 조선의 땅을 두고 러시아와 전쟁(1905년~1906년)을 하여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발틱함대를 격파하고 명실공이 일본을 열강의 대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이러한 도고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친필이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데 창원시 진해구청에 있는 ‘진해산덕환사(鎭海山德丸寺)’라는 비석과 거제 송진포의 러일전쟁 승전기념탑에 부착되어 있던 비석으로 지금 거제시청에 있다. 이 비석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수치스런 물건일지 몰라도 일본에서는 국보급 물건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약탈해간 유물과 비석을 바꾸는 것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이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와의 은원관계를 살펴 신중해야 한다.

 

진해산덕환사(鎭海山德丸寺)
창원시 진해구청 지하실에는 2008년 4월 23일 4개의 나무상자가 도착을 했다. 그 나무상자 중 하나에는 가로33cm×세로33cm×높이194cm인 화강석의 전면에 진해산덕환사(鎭海山德丸寺)라 새기고, 측면에는 해군대부백작동향평팔랑서(海軍大符伯爵 東鄕平八郞書)라 음각으로 쓴 비석이 들어 있었다. 이 비는 진해로 덕환관음(德丸觀音)이 오게 된 유래에서 알 수 있다.
1900년대 중국의 의화단을 중심으로 부청멸양(扶淸滅洋)의 운동이 펼쳐지자 위기를 느낀 8개국 연합국(일,러,영,프,독,미,오,이)이 공동 출병하여 북경을 점령하였다. 당시 북경근처 진해사(鎭海寺)라는 일본 절이 있었는데 소실되어버리고 절 주지가 본존불과 관음불을 모시고 일본공사로 피난을 와서 그 관음불을 일본 통역관 도쿠마루에게 전하였다
통역관 도쿠마루는 우리나라 진해에 군항이 설치되는 것을 알고 소실된 진해사라는 명칭과 연관이 있다하여 이곳 진해에다 절을 창건하고자 모금 운동을 하다가 죽고 그 부인이 불상을 진해학교조합에 기증하여 마츠오시게노부 등 당시 일본 진해유지들이 성금을 내어 1923년 기와로 지은 덕환사(德丸寺)라는 절을 준공 하였다. 그 절 앞에 석비를 세웠는데 도고헤이하치로의 친필을 받아 세웠다. [출처 : 진해구청 관광자료]

 

거제시청에 보관하고 있는 러일전쟁 전승기념탑의 도고헤이하치로 친필 금석문

 

거제도 송진포에 세웠던 러일전쟁 전승기념탑의 전면에 부착했던 이 금석문은 미군이 다이너마이트로 기념탑을 폭파를 했다. 이후 이 비석은 거제도 장목면의 파출소 입구를 지나는 다리로 사용되어 오다가 거제시에서 도고헤이하치로의 친필 비문임을 알고 거제시청 창고에 보관하게 되었다. 이 전승기념탑에는 도고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러일전쟁 당일의 기록을 썼던 글귀를 자신이 직접 쓴 글씨로 화강암에 새겨 기념탑에 부착했던 것이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接敵艦見之警報聯合(접적함견지경보연합) 적 함대를 맞아 모든 함대에 알린다.
艦隊欲直出動擊滅之(함대욕직출동격멸지) 즉시 출동하여 적을 격멸하고자 한다.
本日天氣晴朗波高(본일천기청랑파고)        오늘 날씨는 맑으나 파도는 높다.
平八郞(평팔랑)



그림출처 : 거제근현대문헌총서Ⅱ p419

일본해 해전도고함대 근거지 진해만 송진포기념비 비문 사본 1928년 5월 27일 그의 휘호

 

奮勵努力(분려노력) 마음과 기운을 다해 노력
平八郞書(평팔랑서) 헤이하치로 씀

 

皇國興廢在此一戰(황국흥폐재차일전) 나라의 흥망이 이 일전에 달렸도다.
各員一層奮勵努力(각원일층분려노력) 각자 더한층 분투노력하라
平八郞書(평팔랑서) 헤이하치로 씀

 

가조도 옥녀봉에서 본 취도 모습

거제 송진포기념비의 전면에는 위 그림처럼 3개의 금석문을 새겨 배치했을 것이다. 미군의 기념비 파괴 이후 휘호와 우측 금석문은 소실되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현존하는 것은 거제시청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당시 이 기념비를 서로 세우려 탄원서도 올리고 폐 무기를 활용하여 충혼비 앞에 배치케 하는 등 성역화 사업을 했다. 진해탑과 취도의 기념비도 거의 때를 같이해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