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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동산리 김원택효행비

천부인권 2017. 12. 2. 06:00



2015.9.10. 진전면 동산리 삼거리의 김원택 효행비


유학김원택효행비(幼學金元澤孝行碑)가 위치한 곳은 진마대로(현 국도2호)에서 팔의사로(옛 국도2호)로 들어가는 삼거리인 합포구 진전면 동산리 17-1번지이다. 진전천을 가로지르는 세월교를 넘어 사거리에 가면 П형태로 화강암을 쌓고 밖은 흙을 덮은 모양을 하고 그 안에 2개의 비를 세웠는데 비의 전면에는 유학김원택효행비(幼學金元澤孝行碑)라 적었다.





이 비의 주인공 김원택(金元澤)은 김녕김씨로 의창구 동정동 세한재(歲寒齊)에서 향사를 올리는 백촌 김문기(白村 金文起)의 14세손이다. 그는 아버지는 일찍 잃었지만 어머니의 병환에 봉양함이 대소변을 직접 맛보아 병세를 파악했고, 더운 여름에는 어머님을 업고 시원한데로 피서했다. 그 효행을 기리고자 이 지역 선비들의 뜻을 담아 전 사헌부지평 변응수가 효행비문을 찬하였다.





김원택 효행 비명(金元澤 孝行 碑銘)


군(君)의 자(字)는 무겸(武兼)이니, 김녕인(金寧人)으로 충의공(忠毅公) 백촌선생(白村先生) 휘(諱) 문기(文起)의 十四세손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효도로 자모(慈母)를 봉양하였으며, 집이 가난해도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밭 갈고 나무하여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니 동생(董生 : 中國 漢나라 孝子 董仲舒)과 같은 사람이로다.
더운 여름에 어머니를 업고 서늘한 데로 피서(避暑)하니 강혁(江革 : 中國人 孝子)과 다름이 없으며, 늙어서 상(喪)을 당하여 몸이 야위고 목에 피가 나도록 울었으니 옛날 효자들의 자취를 추월하였다.
고인(古人)의 글을 읽지 아니하고도 능히 고인(古人)의 행실을 다 하였으니 천성(天性)이 순수(純粹)하지 아니하면 능히 이와 같이 하겠는가. 인근 마을에 사는 인사(人士)들이 그의 행실에 감동하여 혹시 장차 인멸(湮滅)됨을 애석하게 여겨 그의 조카 윤권(允權)과 함께 의논하여 비석(碑石)을 준비해 놓고 그의 행적을 나더러 써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임금님께 알리려 해도 알릴 길이 없고 사기(史記)에 실어 전하려 해도 바랄 수 없으니 돌에 새겨 아름다운 행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오히려 그만 두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그대가 사는 마을이 또한 효자리(孝子里)와 가까우니 기록할 것이 많아서 반드시 증거가 될 것이니 어찌 명(銘)을 지어 전(傳)하지 않으리오.』하였다.
그윽이 생각해 보건대 예전에 자양(紫陽) 주부자(朱夫子)께서 만년(晩年)에 궁벽한 여리(閭里)에서 일생(一生)을 마치셨는데, 작은 이야기까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으니 대개 그때 세상(世上)이 쇠태(衰態)해져 있기 때문이다.
군의 잠겨있는 빛과 숨어있는 덕이 시대를 잘못 만나 떨치지 못하니 뒷날 현안(玄晏)을 기다리기로 하고 드디어 명하여 이르기를 「철중(鐵中)의 금(金)이요, 자갈 가운데 옥(玉)이로다.
많은 선비들의 입에 오르내리니 풍속이 쇠퇴하고 속된 가운데에 우뚝한 산처럼 돋보이구나.」


갑인(甲寅) 三월
전지평 변응수 찬(前持平 卞應洙 撰)





幼學金元澤孝行碑銘-원문


君字武兼金寧人忠毅公白村先生諱文起十四代孫少孤孝奉慈母家貧志軆備養耕樵旨供董生之儔歟嘗痢禱代黔婁其人歟夏日避暑負母就凉江革同歸衰暮丁憂柴毁泣血二迹可追不讀古人書而能盡古人之行非天得之粹然能之乎隣近人士感其行惜其將湮與其猶子允權合謀伐石誦其行於不曰聞天路史傳難望鐫石褒美猶賢乎已子之居亦近孝子里誌記必多徵行足矣盍銘傳念昔紫陽晩年終閭里細行不錄之盖衰世意也君之潛光隱德何不於武夷九曲之間而窮途相遇甚可惜願俟後日之玄晏遂銘曰鐵中之金礫中之玉多士口碑足山幼頹俗


甲寅三月
前持平卞應洙撰





출처 및 참조
김녕김씨 충의공파 대종회-효행편:어머님을 업고 피서 한 원택(元澤)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