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20 양촌리 대정마을 남평문씨 산천재와 한천재 모습
창원시 진전면 양촌리 921번지는 남평(南平) 문씨(文氏) 봉사(奉事) 문덕립(文德岦), 도정(都正) 문자악(文自岳), 첨사(僉使) 문도신(文道新) 등의 충효와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건립한 천산재(天山齋)가 있다. 또한 한 울타리 안에 첨사(僉使)와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낸 문도환(文道桓)도 함께 기리고 있는데, 그를 모시는 재실은 바로 옆에 지은 한천재(寒泉齋)이다. 천산재(天山齋), 한천재(寒泉齋)의 입구인 솟을삼문에는 참된 마음으로 공경한다는 뜻을 담은 성경문(誠敬門)이라는 편액이 붙어있다. 천산재에는 정종호(鄭宗鎬)의 천산재기(天山齋記)와 하계휘(河啓輝)의 천산재상량문(天山齋上樑文)이 있고, 제영(題詠)으로는 후손 문정룡(文正龍)의 천산재(天山齋)와 문한영(文翰永)의 원운(原韻)과 문봉호(文鳳鎬)의 차운(次韻) 등 시판이 있다.
2018.3.20 양촌리 대정마을 남평문씨 산천재와 한천재의 입구 솟을대문
참된 마음으로 공경한다는 뜻을 담은 성경문(誠敬門) 편액
담장 넘어로 본 산천재와 한천재
천산재기 해문
함안(咸安)의 진산(鎭山)이 여항산(艅航山)이다. 그 한 줄기의 우뚝한 기상(氣像)이 동쪽으로 뻗어 십리(十里)를 못가서 또 꺾이어 서쪽에 우뚝 솟은 것이 천주산(天柱山)인데 모든 물건(物件)이 다 잘자라고 오환(五患)이 침입(侵入)하지 않았다. 그 산을 바라보면 분묘(墳墓)가 즐비(櫛比)하여 *¹)소목(昭穆)을 이룬 것이 남평(南平)문공(文公) 봉사(奉事) 휘(諱)덕이(德吏)와 도정(都正) 휘(諱)자악(自岳)과 첨사(僉使) 휘(諱)도신(道新)의 무덤이다. 봉사공(奉事公)은 인조(仁祖)정축(丁丑 1637)년에 훈련원(訓鍊院)에 공직(供職)하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청(淸)나라와 화친(和親)을 맺었다는 것을 듣고 *²)강개분발(慷慨奮發)하여 벼슬을 버리고 의령(宜寧)으로 돌아와 스스로 조용히 지냈다. 도정공(都正公)은 부모의 덕행(德行)을 따라 가정(家庭)을 잘 다스려 효우(孝友)와 인(仁)으로 소문이 나서 향리(鄕里)에서 감복(感服)하였다. 첨사공(僉使公)은 아우 구례현감(求禮縣監) 휘(諱)도환(道桓)과 함께 용맹(勇猛)과 지략(智略)이 뛰어나서 *³)부절(符節)을 받들고 나숭대(羅崇大)의 난(亂)을 토벌(討伐)하여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아름답게 여겨 세자(世子)로 있을 때 하사(下賜)한 시(詩)에 칼을 어루만지며 병서(兵書)를 읽어 난을 토벌(討伐)함은 다 제공(諸公)의 고절(苦節)한 훈업(勳業)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살아서는 조정(朝廷)과 재야(在野)에서 우러러 보았고 돌아가서는 후인(後人)의 *⁴)긍식(矜式)이 되었으니 하물며 살아서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다하지 못한 슬픔이 있었고 죽어서는 선대(先代)의 묘역(墓域)에 장사(將事)하였으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감회(感懷)가 지하(地下)에 까지 이르렀으니 천륜(天倫)의 즐거움이 누가 이와 같았겠는가? 이를 일러 생전에 못 다한 효도(孝道)를 사후(死後)에까지 이었다고 할 것이다. 후손(後孫) 상목(相穆)이 삼백리(三百里)를 달려와서 허리를 굽혀 말하기를 「천주산(天柱山) 기슭에는 우리 여러 선조(先朝)의 분묘(墳墓)가 있은지 수백년(數百年)을 지났으나 아직 재사(齋舍)가 없어서 종족(宗族)이 모여도 산만(散漫)하여 기강(紀綱)이 없고 제계(齊戒)하고 유숙(留宿)할 때에 경건(敬虔)하지 못하여 후손들이 사문(四問)의 재실(齋室)을 짓기로 의론(議論)하여 공사(工事)를 완공(完工)하고 천산재(天山齋)라고 현판(懸板)한 것은 그 지명을 따른 것입니다라 하고 그대는 그 사연(事緣)을 기문(記文)으로 지어 빛내 주소서」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내 또한 감회(感懷)가 없겠는가?」 산의 이름을 따른 것뿐만이 아니다. 주역(周易)에서 말하기를 천산(千山)은 둔괘(遯卦)이니 간하건상(艮下乾上)으로 하늘 아래 산이 있는 형상(形像)으로 지금 천지(天地)가 간하(艮下)의 이음(二陰)은 아래에서 점점 자라고 건상(乾上)의 사양(四陽)은 위에서 차차 물러가는 형세(形勢)이므로 이는 정말로 대인군자(大人君子)가 마음을 너그럽게 먹고 욕심이 없이 세상을 피하여 은둔(隱遁)할 때인데 하물며 선대(先代)의 여러 어른들의 충효를 마음속으로 알고 있으니 어찌 노력이 든다고 하여 성취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재실(齋室)이 마침 이때에 이루어졌고 산의 이름과 우연(偶然)히 주역(周易)의 효사(爻辭)와 합치(合致)하였으니 이 어찌 인력(人力)으로서 재사(齋舍)의 이름과 산의 이름이 합치(合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묘소(墓所)에 제사(祭祀)를 지낸 것은 오래 되지 않았다.진(秦)나라와 한(漢)나라가 이후(以後)로 효자(孝子) 자손(慈孫)이 그 선조에 대한 추원(追遠)감시(感時)는 혹 연정(戀情)에서 생기고 의리(義理)에 따라 일어나는데 송(宋)나라에 이르러서 여러 노선생(老先生)이 다 허락(許諾)하여 의리(義理)에 해(害)롭지 않으므로 우리나라의 사대부(士大夫)들의 집에서도 따라서 행하였다. 그러나 술잔(玉瓚)도 규격(規格)에 맞지 않으며(黃流) 제사드릴 수 없고 악기(樂器)도 청묘(淸廟)가 아니면 연주(演奏)할 수 없고 제사(祭祀)에는 정성(精誠)과 공경(恭敬)으로 하지 않으면 귀신(鬼神)이 어찌 흠향(歆饗)하겠는가?
주자(朱子)가 「제사(祭祀)는 공경하지 않으면 귀신을 모독(冒瀆)하는 것이다. 하고 또 정성이 없으면 귀신(鬼神)도 없다.」라고 하였으니 제삿날에는 반드시 술을 마시지 말고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산만(散漫)한 것을 정제(整齊)하여 재계(齋戒)를 극진(極盡)하며 사당(祠堂)에 들어가 어렴풋이 조상(祖上)을 신위(神位)에서 봄이 있으며 제기(製器)와 술잔을 올릴 때에는 엄숙(嚴肅)히 조상(祖上)의 거동(擧動)하는 소리를 듣는 듯이 하여 제사(祭祀)를 지내고 음복(飮福)을 마시고는 자손(子孫)이 노약(老弱)과 나이 차례대로 앉아 혹 종족(宗族)과 조례(條例)를 강질(講質)하고 혹 조선(祖先)의 옛 자취를 담설(談說)하여 효제(孝悌)로 행실(行實)이 있는 사람은 표창(表彰)하고 학문(學問)으로 업(業)을 이룬 사람은 장려(獎勵)하여 군자(君子)와 같이 친(親)한 이를 친(親)히 여겨 조종(祖宗)의 의(義)를 본 받고 소인(小人)과 같은 즐거워 해줌을 즐거워 하는 서양(西洋)문물(文物)의 풍조(風潮)를 끊은 연후(然後)에라야 거이 신령(神靈)이 척강(陟降)하시어 양양(洋洋)하게 옆에 계시는 것 같이 드러날 것이며 신진(新進)의 무리들은 조심하고 조심할 지어다.
이것을 두려워 하면 하늘이 복(福)으로서 선에 보답(報答)하는 것을 기대(期待)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것이다. 문씨(文氏)는 앞으로 신안(新安)의 진씨(陳氏)와 람전(藍田)의 여씨(呂氏)와 숭안(崇安)의 호씨(胡氏)와 같이 되어 조금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이렇게 되면 재실(齋室) 또한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상목(尙穆)이 「그렇습니다.」하여 이 말을 엮어서 천산재(天山齋)의 기문(記文)으로 삼는다.
정축년(丁丑 1937) 소춘절(小春節) 청주 서원 정종호(淸州 西原 鄭宗鎬)가 기록(記)하다.
담장 넘어로 본 한천재
골목에서 본 산천재
天山齋記
巴陵之大鎭曰餘航其單傳亭毒之氣東走不能十里又折而西堀起爲天柱之山也品物咸亨五患不侵望之若堂焉若斧焉櫛比而爲昭爲穆者南平文公奉事諱德吏道正諱自岳僉使諱道新之藏也奉事公當長陵于丑方供職訓練聞翟亂媾成慷慨憤發棄官自靖于宜春都正公克家猛肖孝友仁聞爲鄕里所感服僉使公與弟求禮縣監諱道桓勇畧絶倫奉節討崇大之亂莊祖嘉之自春邸賜詩曰撫釰讀兵書凡此諸公之苦節勳業生而爲朝野聳觀死而爲後人矜式況復寄世之風樹有病則從先兆而陪食處幽冥而氣感地下天倫之樂孰與前生也此所謂追不及之養而繼未盡之孝也後孫相穆踔三百里傴僂而之曰天柱麓實吾諸祖衣履之藏而世累百丙而無舍其會族也散而無紀齊宿也褒而不專玆諏於同祖爲築五棟四架扁之以天山盖因地名而襲之也子可以疏其楣而賁之余應之曰不亦有感乎非惟山名也易曰天山遯目今天地閉塞陰道浸長此政大人肥遯之秋也況以先諸公之忠孝將略而靈若有知寧不容身困而道亨乎齋之適成於此時山名之偶合於爻辭豈容人力於其間哉然墓之有祭非古也秦漢而降凡孝子慈孫之追感於其祖先者或戀情而生由義而起至有宋諸老先生皆許之以不害義理故我東士大夫家亦遵而行之然玉瓚非黃流不能薦朱瑟非淸廟不能奏祭祀而不以誠敬鬼神其亨諸朱子曰祭而不敬猶瀆神也又曰無其誠則無其神齋之日須不飮不葷散而齊其外致而齊其內僾然而思肅然而臨及至將事而餕訖姓孫老弱序齒而坐或講質宗案條例或談說祖先古蹟孝悌而有行者表之學問而有業者獎之親其親而體祖宗之義樂其樂而絶新潮之風然後庶幾陟降之靈洋洋乎如在而褒然新進之徒惴惴焉是懼則天翁福善之報不期然矣文之氏其將與新安之陳藍田之呂崇安之胡可竝聳而不悖苟如是齋亦不爲無助尙穆曰唯唯遂綴其辭爲天山齋記
丁丑小春節 西原 鄭宗鎬記
[출처 및 참조]
디지털창원문화대전 – 양촌리 천산재
마산문화지(2004) - 마산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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