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고사리 거락마을 경주박씨 낙동재 洛東齋

천부인권 2018. 3. 25. 06:00

 

2018.3.20. 경주박씨 낙동재 전경

창원시 진전면 의산삼일로 146에 위치하는 낙동재(洛東齋)는 경주박씨(慶州朴氏)의 재실(齋室)이다. 조선(朝鮮) 때 저작(著作)을 지낸 박앙(朴盎)이 단종애사(端宗哀史)로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평광리(平廣里) 백이산하(伯夷山下)에서 은거(隱居)하였다. 그의 십오세손(十五世孫) 박영벽(朴永壁)이 이곳 고사리 거락동(巨洛洞)에 세거(世居)하여 문중(門中)을 이룬 곳이다.

 

담장 넘어에서 본 낙동재

 

낙동재 솟을 삼문

 

솟을삼문의 앙모문(仰慕門) 현판(懸板)

 

낙동재(洛東齋) 편액

 

 

洛東齋事實記
경주박씨(慶州朴氏)는 신라(新羅)성왕(聖王) 휘(諱)혁거세(赫居世)시조(始祖)로서 오대엄마왕(五代淹摩王)의 자손(子孫) 충열공(忠烈公) 휘(諱) 제상(提上) 호(號) 관설당(觀雪堂)이 중조(中祖)이시고 이조(李朝)에 이르러 휘(諱) 연(盎)께서는 세종조(世宗朝)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로 신미년(辛未年; 一四五一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야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셨는데 을해년(乙亥年; 一四五五年) 단종(端宗)께서 왕위(王位)를 손위(遜位)함에 이군불사(二君不事)의 충정(忠靖)으로 관직(官職)을 버리시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서산(西山) 유자수(柳自湄)와 수양산(首陽山)에 은둔불취정명(隱遯不就廷命)하시다. 말년(末年)에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평광리(平廣里) 백이산하(伯夷山下)에서 은거(隱居) 두문불출(杜門不出)로 불굴절기(不屈節氣)하셨다. 공(公)이 함안(咸安) 경주박씨(慶州朴氏)의 파조(派祖)이시다. 저작공(著作公) 십오세손(十五世孫) 휘(諱) 영벽(永壁)께서 평광리(平廣里)를 떠나 이곳 거락동(巨洛洞)에 후손(後孫)의 세거지지(世居之地)로 정(定)한지가 우금이백여년(于今二百餘年). 그 동안 많은 후예(後裔)가 번성(繁盛)되여 현재(現在) 약(約) 칠십여호(七十餘戶)로 시대(時代)의 변천(變遷)으로 대거이향(大擧離鄕)하여 전국각지(全國各地)로 혹(或)은 외국등지(外國等地)로 분산거주(分散居住)하고 있다. 그러나 거락문중(巨洛門中)은 아직 조상(祖上)을 추모(追募)하고 종사(宗事)를 의론(議論)하는 종실(宗室)이 없어 우리 문중(門中)에도 종실(宗室)을 건립(建立)하는 것이 선대(先代)로부터 대숙원(大宿願)이든 중 거년묘제시(去年墓祭時)에 종친(宗親)들의 중의(衆意)를 모아 후손들의 참여(參與)와 표성(表誠)으로 동년이월(同年二月)부터 역사(役事)를 시역수개월후(始役數箇月後)에 완공(完工)을 보아 낙동재(洛東齋)라 현판(懸板)하였다. 조상(祖上)이 누거(累居)하신 거락동주기(巨洛洞主基)에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위용단정(威容端正)한 낙동재(洛東齋) 사방(四方)에 조상의 묘소(墓所)가 위치(位置)한 중심부(中心部)이다. 구천(九泉)의 조상(祖上)께서 하여감회(何如感懷)할 것이며 우리 후손역시(後孫亦是) 이 흔희(欣喜)를 하처(何處)에 비(比)하리요 후손의 정성(精誠)으로 건립(建立)한 종실(宗室) 잘 관리보존(管理保存)하여 후세(後世)에 영원무궁전승(永遠無窮傳乘)될 것이며 번창(繁昌)과 영화(榮華)가 있을 지어다.
丁卯(一九八七年) 立秋節 後孫 甲守 謹記

 

낙동재사실기
경주박씨(慶州朴氏)는 신라(新羅) 성왕(聖王) 휘(諱) 혁거세(赫居世)가 시조(始祖)이며 오대(五代) 엄마왕(淹摩王)의 자손(子孫)인 충열공(忠烈公) 휘(諱) 제상(提上) 호(號) 관설당(觀雪堂)이 중조(中祖)이다. 이조(李朝)에 이르러 휘(諱) 연(盎)께서는 세종조(世宗朝)에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로 신미(辛未;1451)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야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셨는데 을해년(乙亥年;1455) 단종(端宗)께서 왕위(王位)를 손위(遜位)함에 이군불사(二君不事)의 충정(忠靖)으로 관직(官職)을 버리시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서산(西山) 유자수(柳自湄)와 수양산(首陽山)에 은둔(隱遯)한 뒤 조정에서 불러도 나아가지 않으셨다. 말년(末年)에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평광리(平廣里)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은거(隱居)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로 불굴절기(不屈節氣)하셨다. 이로써 공(公)이 함안(咸安)의 경주박씨(慶州朴氏) 파조(派祖)가 되셨다. 저작공(著作公) 십오세손(十五世孫) 휘(諱) 영벽(永壁)께서 평광리(平廣里)를 떠나 이곳 거락동(巨洛洞)에 세거지(世居地)를 정(定)한 지가 지금까지 이백여년(于今二百餘年). 그 동안 많은 후예(後裔)가 번성(繁盛)하여 현재(現在) 약(約) 칠십여호(七十餘戶)로 시대(時代)의 변천(變遷)으로 대거(大擧) 이향(離鄕)하여 전국각지(全國各地)로 혹(或)은 외국등지(外國等地)로 분산거주(分散居住)하고 있다. 그러나 거락문중(巨洛門中)은 아직 조상(祖上)을 추모(追募)하고 종사(宗事)를 의론(議論)하는 종실(宗室)이 없었다. 우리 문중(門中)에도 종실(宗室)을 건립(建立)하는 것이 선대(先代)로부터 큰 숙원(宿願)이엇는데 지난해 묘제(墓祭) 때에 종친(宗親)들의 중의(衆意)를 모아 후손들의 참여(參與)와 표성(表誠)으로 같은 해 이월(二月)부터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몇 개월(數箇月) 뒤에 완공(完工)을 보아 낙동재(洛東齋)라 현판(懸板)하였다. 조상(祖上)이 대대로 거주하신 거락동(巨洛洞)에 주된 터에 간좌(艮坐) 곤향(坤向)이다. 위용단정(威容端正)한 낙동재(洛東齋)는 사방(四方)에 조상의 묘소(墓所)가 둘렀는데 그 중심부(中心部)에 위치한다. 구천(九泉)의 조상(祖上)께서도 매우 감격하실 것이며 우리 후손 역시 이러한 기쁨을 어디에 비(比)하리요. 후손의 정성(精誠)으로 건립(建立)한 집안의 재실이니 잘 관리보존(管理保存)하여 후세(後世)에 영원무궁(永遠無窮)토록 전승(傳乘)될 것이며 번창(繁昌)과 영화(榮華)가 있을 지어다.
丁卯(정묘,1987)년 입춘절(立秋節) 후손(後孫) 갑수(甲守)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