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양촌리 초계변씨 우우정 友于亭

천부인권 2018. 3. 21. 15:37



2018.3.20 양촌마을 골목에서 만난 우우정


우우정(友于亭)이 있는 창원시 진전면 양촌1길 34는 양촌마을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우우정(友于亭)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처음 초계(草溪) 근암공(謹菴公) 변상학(卞相學)이 생전에 효행과 우애와 자선을 행하면서 살던 집이다. 변상학은 그의 형 송강공(松岡公)과 함께 이불을 덮고 자는 등 우애가 대단히 깊었다고 한다. 변상학이 죽은 후 1940년 아들 변순섭(卞純燮)이 부친의 뜻을 기려 ‘우우정(友于亭)’이라는 정자로 바꾸었다.
기문이나 상량문 편액은 걸려 있지 않으나 당시 전라북도 무주의 적상산(赤裳山) 아래에 사는 송증헌(宋曾憲)에게 기문을 부탁했다. 우우정의 오른쪽에 ‘근암(謹庵)’, 왼쪽에는 ‘송강(松岡)’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형제의 우애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담장 넘어로 바라 본 우우정



솟을삼문인 우우정의 대문



우우정 건물 모습



우우정 마루 풍경


우우정 기문


우우정기(友于亭記)

내가 일찍 남쪽의 바닷가로 놀이를 갔다가 회산 근암 상학군(檜山 謹菴 相學君)의 효우(孝友)와 자선(慈善)이 한 고을에서 칭송(稱頌)을 받고 있다는 것을 듣고 내 혼자 말하기를 세상에서 어찌 좋은 사람이 없다는 무호인(無好人)3자를 즐거이 말할까? 여영공(呂榮公)의 말이 진실로 옳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1940(庚辰) 봄에 그 일족 되는 상완(相完) 종권(種權)(전라북도 무주군에 있는) 적상산 중(赤裳山 中)의 나를 찾아 와서 근암(謹菴)의 일을 상세히 말하고 바로 우우정(友于亭)의 기문을 청()하였다. 이는 근암공(謹菴公)이 평생에 기거하던 사랑(舍廊)으로 그 형 송강공(松岡公)과 함께 같은 이불을 덮고 잠자던 곳으로 이름을 우우정(友于亭)이라고 한 것은 그 아들 순섭(純燮)이 중수(重修)하던 날 모인 자리에서 사우(士友)들이 논하여 이름을 지었다. 나는 바야흐로 붓을 놓고 잠복(潛伏)하여 별안간 세상일을 잊어버렸는데 바닷가에서 들은 바를 기뻐하여 억지로 일어나서 글을 짓기를 효우(孝友)는 수신(修身)하는 일이다. 이것이 없으면 가정(家庭)이 가정이 되지 않고, 나라가, 나라가 될 수 없으므로 성인이 사람을 가르칠 때에 한 가지는 오직 부모에 효도와 형제의 우애를 정사(政事)에 베풀며 또 한 가지는 효우와 육행(六行)의 첫째로 꼽아 빈객(賓客)으로 천거(薦擧)를 하였으니 효우의 중차대(重且大)함이 이와 같은데 근암공(謹菴公)이 이 두 가지를 소유하여 우애(友愛)로서 그 정자(亭子)의 이름으로 한 것은 우애를 하면은 효도(孝道)까지도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과 관()과 대()와 해()는 고금에 어찌 한계(限界)가 있을까마는 인편(人便)에 효우로 이름을 준 것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 변씨(卞氏)가 홀로 향당(鄕黨)의 여론(輿論)에서 우우(友于)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무엇이 특이(特異)하겠는가? 향당에서 근암(謹菴)의 덕행을 느낀 것이 또한 우우에 있고 향당이 후생(後生)에게 면여(勉勵)한 것도 우우에 있다. 이는 저 변씨(卞氏)들이 마땅히 함께 번영(繁榮)할 일이니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지금 변씨(卞氏)의 자제(子弟)들이 효우를 이어서 쇠()하지 않고 이어가면 그 감응(感應)하는 효과가 장차 종인(宗人)이 생계를 위하여 타향(他鄕)에 나가면 남은 종인들이 그 가족을 돌봐주고 그 종인이 돌아오지 않으면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게 될 것이니 그때가 되면 자사(刺史)가 천거하고 사관(史官)이 채록(採錄)할 것이 시간문제인데 어찌 지금 한 고을에서 그 유택(遺宅)에 이름을 함에 그치겠는가? 모든 卞氏들은 생각할 지어다.

경진(1940)6월 하순 덕은 송증헌(德殷 宋曾憲) 기록하다.

 

友于亭記

余嘗南遊海上聞檜山下謹菴相學甫之孝友慈善爲一鄕所稱誦私自語曰世何喜言無好人三字乎呂榮公之言誠是矣後幾年庚辰春其族相完種權訪余于赤裳山中語謹菴事甚詳仍請于亭記亭是謹菴平生攸居舍廊與其兄松岡同枕被之所而名以友于者因其嗣子純燮重修日會席士友論也余方閣筆潛伏頓忘斯世喜其聞海上所聞而强起書之曰孝友是修身事也而無是家不家國不國故聖賢之敎人也一則曰惟孝友于兄弟施於有政一則以孝友爲六行之首而賓興之孝友之重盖如是矣謹菴能兩有之而以一名其亭者擧此見彼也夫亭觀臺榭今古何限而未聞有人便以孝友錫其名者而今卞氏之獨得此於鄕黨與論何其異哉鄕黨之感謹菴德行亦在是也鄕黨之勵謹菴後生亦在是也是其非諸卞氏之所當共榮而胥勖者耶便繼今爲卞氏之者弟者又孝又友勿贊引之則感應之效將見鷄犬之養於家者一出求而覆其子一不至而諸亦不食矣及其時也如刺史之薦史氏之採亦朝暮事耳奚止今一鄕黨之命名其遺宅哉諸卞氏其念之

時上章執徐遯之下浣德殷宋曾憲記

 

* 呂榮公 ; 北宋(북송)때의 학자로 본명은 希哲(희철)

 

[출처 및 참조]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양촌리 우우정

                          마산문화지(2004) - 마산문화원





송강(松岡)



근암(謹庵)




友于亭
先人志事炳然明  선인께서 소명하신 일 소명컨대
當日斯亭豈偶成  오늘의 이 정자 어찌 우연히 이루었으랴.
直是塤箎同樂意  곧 이 풍악소리는 동락하는 뜻
不徒薖軸自娛情  한갓 풍축 쓰며 스스로 즐거워하는 정이 아니다.
山容特秀筵禽景  산세 특히 수려하여 좋은 경치 안았고
村俗皆良果協名  촌 풍속은 모두 어질고 화합해 이루었다 소문났네.
舊慣仍新新額耀  옛 관습 이어서 새롭고 새 편액 빛나니
敢云斷述盡微誠  감히 말하노니 계술하는 작은 정성이외다.
不肖孤 純燮 謹稿 불초자식 순섭 삼가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