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양촌리 대정마을 남평문씨 산하정 山下亭

천부인권 2018. 3. 24. 06:56

 

2018.3.20 대정마을 산하정 전경

 


창원시 진전면 의산삼일로 33-1에 위치한 산하정(山下亭)은 남평문씨(南平文氏) 외암옹(畏庵翁)을 추모(追慕)하여 그의 아들 문정각(文正覺)씨가 1960년에 지은 정자(亭子)이다. 외암옹(畏庵翁)은 한천서당(寒泉書堂)을 창건(創建)하여 많은 후학들을 배출 하는 등 선행을 베풀었다.

 

 

 

2018.3.20 산하정 솟을삼문

 

 

솟을문에는 청류문(聽流門) 편액이 걸려 있다.

 

남평문씨 산하정 전경

 

 

 

 

 

산하정 마당에서 본 풍경

 

 

 

산하정(山下亭)

 

 

외암헌(畏庵軒)

 

 

 

 

山下亭記
舊咸州之治三十里天皇山下大井之坊有新構而翼然翬華者曰山下亭文君正覺慕其先考畏庵翁而作也翁南道望族也以文行爲世氈而翁能謹守無替隱居行義又以獎後進爲已任創建寒泉塾爲子弟肄業之所繼而營小築爲晩年頣養之計未果而沒世此正覺君之所以明發不寐追成其遺志也其可謂肯構肯堂者乎亭凡六間中爲堂而兩夾爲室環之垣而門於正面凉燠出入之位備矣以其在天皇山之下扁之以山下工旣訖其姻親郭種珪甫千里遠涉問記於余余謝不獲審問其形勝乃歎曰地不能自美惟人能美之㫰昔此地之未亭也過而覽者只認爲名門世庄之隙之耕而菜圃可也栽爲花砌足矣而一朝爲賢人寓慕之亭於是焉山川增輝洞府益明有若昔無今有之別墅向所謂人能美之者非耶而況環大井某水累邱無非畏翁杖屨之地一草一木無非芬馥之被而今皆獻媚於軒楹之間孝子之所以憑欄記慕僾然如見其儀型如聞其警咳者自不能己甄氏之思亭奚獨傳美於古哉然此則因外物之耳目者而慕之也若乃慕其德行之媺則淹貫經傳及時而實踐本之孝友推及於睦姻者乃畏翁之所一生慥慥也今亭之左右鱗鱗接庄皆畏翁當日睦恤之親則幸與之晨夕于亭隱做花樹之樂而講畏翁所讀之書勉畏翁所行之睦思所以物替焉則此慕之至者也仰又思之亭之額雖因地形乎而其義亦有所可言者也盖公自庚戌國變更杜門謝事戊午國恤痛哭于大漢門外以洩其悲憤自後益隱身自靖以終其餘年其忠魂毅魄宜無幽明之彝則安知不涉彼天皇山上膽望漢阿以寓風泉之感也耶然則是亭之在是山之下誠亦不偶爾也故敬書之爲山下亭記
歲庚子(一九六十)年 正月 十五日
安東 權相圭 記

 

산하정기 역문(山下亭記 譯文)

옛 함주(咸州)의 군청(郡廳)에서 삼십리(三十里) 쯤 떨어진 천황산(天皇山) 아래 있는 대정(大井)마을에 새로 지은 좌우(左右)가 넓고 으리으리하며 화려(華麗)한 집이 산하정(山下亭)이다. 문군(文君) 정각(正覺)이 그 선친(先親) 외암옹(畏庵翁)을 추모(追慕)하여 지은 것인데 옹(翁)은 남도(南道)에서 명망(名望)이 있는 가문(家門)이다. 문행(文行)으로 대(代)를 이어 가보(家寶)로 하였는데 옹이 능히 삼가 지켜 쇠(衰)하지 아니하였으며 은거(隱居)하면서 의리(義理)를 행하였다. 또 후진(後進)을 장려(獎勵)하는 것을 자기(自己)의 임무(任務)로 하여 한천서당(寒泉書堂)을 창건(創建)하여 자제(子弟)들이 학문(學問)을 닦는 장소(場所)로 하고 이어서 또 따로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지어 만년(晩年)에 수양(修養)할 계획(計劃)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것은 정각군(正覺君)이 그 유지(遺志)를 자나 깨나 생각하여 추성(追成)한 것이니 그 조상의 뜻을 이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자(亭子)는 무릇 육간(六間)인데 중간(中間)에는 마루를 양쪽에는 방(房)을 만들었다. 담을 둘러싸고 정면(正面)에는 대문을 내어 서늘하고 따뜻하며 출입(出入)할 위치(位置)가 갖추어졌다. 정자(亭子)가 천황산(天皇山) 아래에 있고 편액(扁額)을 산하(山下)로 하였으며 공사(工事)를 마치고 나서 그 인척(姻戚)되는 곽종규군(郭種珪君)이 천리(千里)길을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나를 찾아와서 기문(記文)을 물어 내가 사양(辭讓)하여도 되지 않았다. 그 형상(形狀)을 상세(詳細)히 물어 보고 탄식(歎息)하기를 땅은 스스로 아름다울 수 없으나 사람이 그 지역(地域)을 아름답게 할 수 있다.
옛날에 이 정자를 짓기 전에는 지나가면서 보는 사람이 다만 명문(名門)이 대를 이어 살아온 변두리 지방(地方)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경작(耕作)하여 채마밭이 될만하고 돌계단에는 꽃을 심기에 충분(充分)하여 하루아침에 현인(賢人)을 위하여 사모(思慕)하는 정(情)을 붙일 정자가 우뚝 서니 산천(山川)이 빛을 더하고 동부(洞府)가 더욱 맑아 예전에 없었던 별서(別墅)가 지금 생겼으니 사람이 능히 그를 아름답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물며 대정(大井)은 산수가 외암옹(畏庵翁)이 지팡이를 짚고 한가(閑暇)롭게 거닐던 땅으로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가 다 향기(香氣)를 입었으며 지금 난간(欄干)과 기둥 사이에 아름다움을 받치고 있으니 효자가 난간에 기대에 추모하는 마음이 생겨 어렴풋이 그 의형(儀型)을 보는 것 같고 그 기침 소리를 듣는 것 같은 것을 스스로 그칠 수 없다.
견씨(甄氏)의 사정(思亭)이 어찌 홀로 옛날에 아름다움을 혼자 차지하였을까? 그런즉 이는 외물(外物)의 경치(景致)로 인하여 사모하는 것이고 그 덕행(德行)의 아름다움을 사모하는 것은 경전(經傳)을 널리 통달(通達)할 때에 실천하고 본성의 효우(孝友)를 인척(姻戚)에게까지 미루어 화목(和睦)하는 것이 외암옹(畏庵翁)이 일생에 독실(篤實)한 바이다.
지금 정자의 좌우에 비늘같이 산듯하고 고운 집터가 접(接)한 것은 다 외암옹(畏庵翁)이 당시(當時)에 친척(親戚)들과 화목(和睦)하고 구휼(救恤)한 것이니 다행(多幸)히 조석(朝夕)으로 정자(亭子)와 함께 화수(花樹)의 즐거움을 은근히 만들어 외암옹(畏庵翁)이 읽던 글을 읽고 외암옹(畏庵翁)이 행하던 화목(和睦)에 힘쓸 것을 생각하여 쇠(衰)하지 않으면 이것이 지극(至極)히 사모(思慕)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면 정자(亭子)의 편액(扁額)의 뜻을 생각하면 비록 지형(地形)으로 인(因)하였지만 그 뜻을 말할만한 것이 있다.
공(公)은 경술(庚戌 1910)국치(國恥) 이후(以後)로 곧 두문불출(杜門不出)하여 다른 일은 사절(謝絶)하였고 무오(戊午 1918)년에 고종황제(高宗皇帝)가 돌아가자 대한문(大漢門) 밖에서 통곡(痛哭)하면서 그 비분(悲憤)을 삭인 후로는 더욱 은신(隱身)하여 스스로 조용히 지내면서 그 여생(餘生)을 마쳤다.
그 충신(忠臣)의 영혼(靈魂)과 영웅(英雄)의 기백(氣魄)이 생사(生死)에 변함이 없으니 어찌 저 천황산(天皇山)위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유명(幽明)의 느낌을 부치지 않음을 알겠는가? 그런즉 이 정자(亭子)가 이 산 아래에 있으니 진실로 우연(偶然)이 아니다. 그러므로 삼가 써서 산하정(山下亭)의 기문(記文)으로 삼는다.
세(歲)경자(庚子 1960)년(年) 정월(正月) 십오일(十五日)에
안동(安東) 권상규(權相圭)는 기(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