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창원시 내서읍 달성서씨 증산서원 甑山書院

천부인권 2018. 4. 29. 08:12



2018.4.23. 내서읍 원계리 증산서원


회원구 내서읍 원계증산길 57-11(원계리 523번지)에 창건된 증산서원(甑山書院)은 충열공 창계 서응시(忠烈公 昌溪 徐應時 ; 1531)을 배향하는 곳으로 6·25사변으로 소실된 것을 1953년에 다시 복원하여 대지 200평에 건평 60평으로 세운 목조와가(木造瓦家)로 2003년 태풍 매미로 인해 강당이 파손되자 그해 11월에 복원하였다. 강당은 4칸, 별묘 3칸, 고사 3칸으로 구성하였고 매년 음력 삼월 초팔일에 유림들과 함께 향례(享禮)를 올리고 있다.
창계 서응시(昌溪 徐應時公)의 스승은 중봉 조헌선생(重峯 趙憲先生)으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상소했으나 조정 신료들에 의해 묵살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조직하였고 이때 공이 참모역할을 하다 금산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를 하여 사적 제105호인 칠백의총에 안치 되었다.





증산서원 출입문인 수재문(修齊門)



수재문(修齊門) 편액



수재문(修齊門)에서 바라 본 증산서원(甑山書院)



증산서원(甑山書院) 편액



증산서원중수기(甑山書院重修記)


증산서원중수기(甑山書院重修記)

「무학산(舞鶴山)이 우뚝 솟아 천수에 푸르러고 광려천(匡廬川)이 출렁출렁 만세(萬世)토록 맑구나. 생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는 서릿발 같은 절의(節義)는 완연히 만고(萬古)의 달빛처럼 맑구나. 상서(祥瑞)로운 빛과 구름서리고 아름다운 기운이 엉킨 버들엔 내낀 천가의 새벽이요. 꽃바람 부는 온천하의 봄이로구나. 이 땅에 산이 푸르고 물 맑은 내서의 원계리(元溪里)가 있으니, 달성서씨(達成徐氏) 현감공파(縣監公派) 후손이 죽음으로 의(義)를 지킨 창계공(昌溪公) 응시(應時)가 대대로 세거(世居)해온 땅이다. 고려 때 봉익대부 판도판서 달성군 휘 진(奉翊大夫 版圖判書 達成君 諱 晋)이 시조이며, 구계선생(龜溪先生)이 5대손(5代孫)이다. 창계공은 1531년(중종 신묘)에 태어나 중봉 조헌선생(重峯 趙憲先生)의 문인으로 율곡선생의 이론을 따랐으며, 스승이 귀양을 갈 때 의자를 메고 조선생의 뒤를 따르는 등 10년을 하루 같이 모셨다. 선조 24년(1591)에 왜국사신(倭國使臣)인 승려 현소(玄蘇)와 유천(柳川) 등이 부산항에 입항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조중봉선생이 도끼를 들고 궁전 앞에 엎드려서 임금에게 왜구사신 처단을 상소하고 왜국군(倭國軍)이 침략할 것이니 그들의 침범에 대비하기를 주장하였으나, 묵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임진년(1592)에 사상미증유(史上未曾有)의 칠치난(漆齒亂)이 돌발하여 섬오랑케 20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 근역 호산을 짓밟으니 조국은 시체의 산과 피의 내를 이루었다. 이때 조중봉선생은 분(憤)을 참지 못하여 창의(倡義)하니 창계공은 스승을 따라 나서 기허대사군과 합세하여 적을 쳐서 청주를 수복(收復)하는공을 세웠다. 임진년 8월 18일에 이르러 왜적 고바야가와다까가게의 대군을 금산 경양대(錦山 景陽臺) 아래에서 만나 분전(奮戰)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適)으로 모든 의사(義士)들이 조선생을 따라서 북녘을 바라보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700의사(義士)와 함께 하늘을 가리키고 땅에 그리면서 나라와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안전을 기원하면서 충의정신으로 700의사(義士)가 목숨을 던지니 어찌 거룩하지 않으랴. 금산에 있는 칠백의총이라는 무덤은 사적 제105호로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친 조중봉선생과 기허영구대사 휘하(麾下) 칠백의사의 유골봉안 묘소다. 창계공(昌溪公)은 조중봉선생의 참모로 칠백의사 중 한 영령(英靈)이다. 충장공(忠莊公) 유림(柳琳)이 인조16년(1638)에 삼가 순절비(殉節碑)와 종용사(從容祠)를 창건하여 해마다 음력 8월 18일에 칠백의사의 정충의절(貞忠儀節)을 추도(追悼) 찬앙(讚仰)한즉 단말마적(斷末魔的) 일제(日帝)가 최후 발악으로 문득 금산 순의비(殉義碑)와 가야산 해인사 송운비(伽倻山 海印寺 松雲碑)를 파괴하고 말았으나 미구(未久)에 왜적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하여 조국광복이 되자 지방관민이 정성과 공경심을 바쳐 순의비와 종용사를 복원건립하니 칠백의총(七百義塚) 위의 달빛과 함께 만고에 길이 멸(滅)하지 않으리라. 숙종13년(肅宗 1687)에 추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시(追贈 資憲大夫 吏曹判書 諡)는 충열(忠烈)이라 하였다. 고종3년(1866)에 광려 증봉(匡廬 甑峯)의 북쪽 두산(斗山) 아래 원계(元溪) 위에 재사(齋舍)를 이건하였는데 그때 주손 진우(冑孫 鎭祐)가 정성을 다하였다. 1950년에 6·25동란이 발발하였을 때 재사건물(齋舍建物)이 모두 불타 버렸으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으랴. 1953년에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고 공경(恭敬)함을 바쳐 복원중건(復元重建)하였다. 이때 사림의 공의(公議)를 얻어 재사(齋舍)에서 서원(書院)으로 승격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2003년 5월에 갑자기 폭풍우의 재난을 입어 서원강당이 크게 파괴되고 사우(祠宇)와 대문만 다행히 재해를 면하였다. 이에 동년 강당을 중건하여 2003년 11월 25일에 입주상량(立柱上樑)하였고, 2004년 2월에 준역(竣役)하니 기쁘지 않으랴. 일전(日前)에 공의 후손 장수(長洙) 정보(正保) 인근(仁根)보(甫)가 와옥을 내방(來訪)하여 저에게 증산서원 중수기(重修記)를 위촉하므로 아는 것도 적고 불문(不文)이긴 하나 이 기문(記文)을 짓는다. 한 뿌리 천 송이로 핀 후윤(後胤)들은 창계공(昌溪公)의 인간상도의 교훈과 의절(義節)을 천명함으로써 힘차게 매진하며 친목하고 나태하지 않으며 바라건대 효도하고 충신하며 조상을 숭배하고 어진이를 존경하며 이익 앞엔 정의 그리며 형제간에 우애 깊고 생명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는 사도(士道)를 선양하기를 비옵나이다. 여기에 큰 이름은 적지 않고 길이길이 변함없고 나라 위해 생명 받친 능상절의 저 양귀비꽃 보다 붉은 마음 그 단심(丹心)은 저 한청상(汗靑上)에 길이 빛나리라. 이로써 애오라지 기문으로 삼을 뿐이다.
단기(檀紀) 4337년 갑신(甲申) 4월 18일
경북대학교 명예교수(慶北大學校 名譽敎授)
문학박사(文學博士) 서수생(徐首生) 삼가 쓰다.」


甑山書院重修記
舞鶴巍巍千古碧 匡廬汨汨萬年淸 舍魚取熊傲霜節 百世宛如蟾魄祥 光郁靄佳氣葱蘢 烟柳 千家曉風花百里 春玆土有山紫水明 內西元溪里迺卽 達城徐氏縣監公派 後胤取熊義士 諱應時號昌溪公之 奕世世居地也 鵠嶺奉翊大夫版圖判書達城君諱晋 爲肇祖龜溪先生五代孫也 昌溪公中宗辛卯生(一五三一年) 從遊重峯趙憲先生門讚究于氣發理乘設竄謫之日 公擔椅子隨 後十載如一日 宣祖辛卯年 倭國使臣僧玄蘇柳川 入釜山港 重峯先生 持斧伏闕前上疏于 倭使處斷主倡 倭之侵掠對備 官不容納矣然 而翌年宣祖壬辰突發 史上未曾有之 漆齒亂島夷二十萬 渡海蹂躪於 槿域能化屍山血河 趙重峯先生奮起倡義 昌溪公從師 便合騎虛擊敵迺 收復淸州樹功矣至 八月十八日也 遂將遇倭敵小早川隆景大軍于 錦山景陽臺下奮戰 以衆寡不敵 從先生望北泣血 與七百義士指天畵地 祈願社稷 白民之安全 以忠義殉國 胡不聖哉諶是 七百義塜者錦山所在 以史蹟百五號 忠國取熊士趙重峯先生 與騎虛大師麾下 七百義士之遺骸奉安墓所 昌溪公重峯先生之參謀 七百義士中一英靈也 忠莊公柳琳仁祖戊寅(一六三八) 謹竪殉義碑  與創建從容祠 年年歲歲八月十八日 追悼讚仰厥 貞忠義節 則斷未魔的 日帝輒破殉義碑 曁松雲碑未久倭帝敗戰 迨祖國光復也 地方官民 竭誠盡敬復元竪碑祠塚上 與月萬古長不滅 肅宗丁卯 贈資憲大夫吏曹判書諡忠烈 高宗丙寅 匡廬甑峯之 北斗山下元溪上移建齋閣 胄孫鎭祐殫誠 大韓民國 庚寅突發 六二五動亂 辰全燒燬盍心痛 癸巳後胤絜誠展敬復元 重建爰得士林公議從 此齋舍迺昇書院 闔說哉癸未五月 我被颶風雨之災 大破講堂 而祠宇曁大門免災幸矣迺重修 講堂十一月념五日立 主上樑甲申二月竣役 奚不說哉不日前公之後裔長洙 正保仁根甫 來訪蝸廬囑俺重修記謏識不文 而撰之焉一根千朶公之後胤 以闡昌溪公彛訓 義節贔屭亹和不倦庶 冀禱于孝悌忠信 崇祖尊賢 見利思義 塤篪雅奏 舍生取義之士道喧楊也 曰若哦厥大名 不朽長無 古殉節丹心照汗靑是 以聊以爲記文而耳
檀紀 四三三七年 甲申 四月 十八日
慶北大學校名譽敎授文學博士 徐首生 謹撰




증산서원 뒤쪽의 숭절사(崇節祠)



증산서원 내문인 숭절사(崇節祠) 출입문



절사(崇節祠) 편액




숭절사상량문(崇節祠上樑文)
밝히건대 도학(道學)은 의사(義士) 칠백(七百) 위에서 으뜸이니 웅어(熊魚)*¹를 앙모(仰慕)하여 취사(取士)함은 하늘이 도운 바이며, 저법(底法)*²은 대하(大廈) 천만(千萬) 간(間)에서 어울리니 휘조(翬鳥)를 흔첨(欣瞻)하여 비혁(飛革)함은 하루가 못되어 이루어졌도다. 삼가 생각건대 창계(昌溪)서공(徐公)은 달성(達城) 영현(英賢)으로 부월(斧銊)를 잡고 통곡하며 참소(讒訴)를 입은 스승을 멀리까지 모셨으니 하늘에 치솟는 행실이 있으며 휘하(麾下)에서 흰 칼날을 무릅쓰고 열열하게 생삼(生三)*³에서 한번 죽었으니, 죽음에 이른 정성은 종용사(從容祠)에 형상(形像)이 설치(設置)되었도다.
중봉(重峯)의 고제(高弟)로 북을 두드리며 용약(踊躍)하여 병사를 써서 대첩(大捷)하였으며 청주(淸州)의 전역(戰役)에서 궁중(宮中)에 자니(紫泥)를 내려 만천년(萬千年)에 황황(煌煌)*⁴하니 충성에 포상(褒賞)하는 은전(恩典)으로 사액(賜額)이 준분(駿奔)*⁵하였도다.
원우(院宇)의 조두(俎豆)는 금산(錦山)에서 쟁영(崢嶸)*⁶하고 최외(崔嵬)*⁷하며 항장(骯髒)한 유골은 의총(義塚)에서 썩지 않도다. 장대(將臺)와 경양(景陽)에서 한번 통쾌하게 죽은 깃발에는 활동이 혁혁(赫赫)하였으니 더욱 묘예(苗裔)들이 선조를 절실히 추모(追慕)하도다. 음양(陰陽)과 풍우(風雨)가 화회(和會)하여 회산(檜山)의 원계(元溪)에서 상지(相地)*⁸하였으며, 동량(棟樑)과 최각(榱桷)*⁹은 모두 새롭고 큰 재목을 살펴서 가져왔으니 후손들이 능력을 모두 다하였도다. 인근(隣近) 현인(賢人)들의 봉영(封塋)은 자애롭고 효성스러운 도리가 척강(陟降)하는 것을 보는듯하며 명성(名聲)이 천하의 영토에 떨쳐 양양(洋洋)하니 오직 병사들의 무목(武穆)만을 날배(涅背)*¹⁰하지는 않도다. 우리는 우리 장사(將士)들에게 제향(祭享)하며 삼가 짧은 노래를 바치는 도다.
사우의 금신(襟紳)*¹¹은 은한(銀漢)이 밝게 돌아 저쪽을 밝히니 어찌 은하를 당겨 수족(手足)을 나눌 수 있겠는가? 월정(月汀)과 우암(尤菴) 두 선생의 필치(筆致)로 천양(闡揚)*¹²하여 남김이 없으니 어찌 사우가 후세에 전하지 않겠는가? 일월(日月)과 성신(星辰)이 돌고 돌아 명정(蓂庭)의 구력(舊曆)*¹³에 측천(測天)하였으며 규구(規矩)의 준승(準繩)이 이루(離婁)*¹⁴의 공교로움을 다했으니 여러 선조들의 영령(英靈)이 거의 흠격(歆格)하리라. 구원(久遠)한 군자(君子)의 유택(流澤)은 정충(精忠)한 절의를 소명하게 발양(發陽)하며 귀신은 땅속 물처럼 재재하니 어찌 다만 한문공(韓文公)*¹⁵에개만 피발(被髮)*¹⁶하겠는가? 여기서 보답(報答)함이 편안하여 도움을 받아 대들보를 올리도다.
아랑위 들보 동쪽을 바라보니 칠백의사의 소리가 일편단심이구나.
아랑위 들보 서쪽을 바라보니 사문(師門)에서 당일에 주통(朱統)*¹⁷을 전수하였구나.
아랑위 들보 남쪽을 바라보니 인의(仁義)에 배불러 숙포(宿飽)*¹⁸한 듯하구나.
아랑위 들보 북쪽을 바라보니 참삼(參三)이 하나가 되어 하늘에 있구나.
아랑위 들보 위쪽을 바라보니 용사(龍蛇)*¹⁹에서 경양대(景陽坮)를 추상하도다.
아랑위 들보 아래쪽을 바라보니 의뜸가는 용사(勇士)를 잃고 온몸을 채찍질하도다.
용취(聳翠)한 중봉(甑峯)에 떠오른 해 붉은데 단충(丹忠)은 만고에 그와 더불어 같도다.
광려(匡廬)의 산색은 끝이 하늘과 가지런하며 백록동(白鹿洞)*²⁰ 규범 중에 다섯 가지 교화로다.
노적봉(露積峯) 푸르고 석름(石廩)*²¹에는 아지랑이, 곰을 취하는 심사(心事)로 삶을 즐겨 버렸도다.
감천(甘川)은 밤낮으로 끊임없이 흐르는데 바다로 모이는 물은 같으며 별은 북극(北極)을 받쳤도다.
옥형(玉衡)*²²을 저앙(低仰)*²³하니 선기(璿璣)*²⁴가 씩씩한데 점점(点点)마다 하괴(河魁)*²⁵는 대방을 빛내도다.
세상 등급(等級) 퇴파(頹波)*²⁶하니 어찌하겠는가? 적막(寂寞)한 궁음(窮陰)*²⁷은 용(龍)이 싸우는 들판이로다.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이후로는
해는 떠오르고 달은 항구(恒久)하여 사람마다 충효를 과책(課責)*²⁸하여 삼강을 부지하고 오륜을 밝히게 하소서. 해마다 풍년들고 도(道)는 넉넉하여 집집마다 시서(詩書)를 송독(誦讀)하여 천년까지 열독(閱讀)하고 만세까지 전하게 하소서.
유조(柔兆) 섭제격(攝提格)*²⁹ 대려(大呂)*³⁰ 상한(上澣)*³¹에
강양(江陽) 이직현(李直鉉)은 삼가 찬술하노라.


*¹웅어(熊魚) : 생선회를 버리고 곰 발바닥 요리를 취한다고 한 것을 사어취웅(捨魚取熊)이니 곧 사생취의(捨生取義)를 뜻한다.
*²저법(底法) : 근본(根本)이 되는 법도(法道)
*³생삼(生三) : 하늘과 땅. 천지(天地)
*⁴황황(煌煌) : 밝게 빛나는 모양
*⁵준분(駿奔) : 준마(駿馬)처럼 매우 빠르게 달림.
*⁶쟁영(崢嶸) : 높고 험한 모양. 재주나 기상이 매우 뛰어난 모양.
*⁷최외(崔嵬) : 전각(殿閣)이나 누대(樓臺) 따위가 높이 솟은 모양.
*⁸상지(相地) : 지질(地質)이나 지형(地形)을 관찰함. 땅의 생김새를 따져보고 길흉을 판단하는 일.
*⁹최각(榱桷) : 서까래
*¹⁰무목(武穆)만을 날배(涅背) : 무목은 악무목(岳武穆). 곧 악비(岳飛)의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을 새긴 충성이 여기 무목날배(武穆涅背)라 할 수 있다.
*¹¹금신(襟紳) : 금대(襟帶). 산과 강이 옷깃과 허리띠처럼 둘러막음. 험한 지세의 비유.
*¹²천양(闡揚) : 드러내어 밝혀서 떨쳐 일으킴.
*¹³명정(蓂庭)의 구력(舊曆)=명력(蓂曆) : 일력(日曆). 명협(蓂莢)은 전설상의 달력풀. 초하룻날부터 매일 한 잎씩 나서 자라고 16일부터는 매일 한 잎씩 져서 그믐이 되면 다 떨어졌는데 이것을 보고 달력을 만들어 달력풀이라고 하였음.
*¹⁴이루(離婁) : 황제(皇帝) 때 사람. 눈이 아주 밝아서 100보(步)의 거리에서도 털끝을 구별하였다고 함.
*¹⁵한문공(韓文公) : 한유(韓愈). 당의 등주(鄧州) 남양(南陽) 사람. 자는 퇴지(退之) 시호는 문(文),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육경(六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함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병려문(騈儷文)을 반대하며 고문(古文) 부흥에 힘씀. 그의 글을 문인 이한(李漢)이 편집한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 50권이 전함.
*¹⁶피발(被髮) : 머리털을 풀어 헤침. 몹시 황급하여 의관(衣冠)을 단정히 할 겨를이 없는 모양. 또는 오(吳)와 월(越) 일대 남방(南方) 민족의 풍속.
*¹⁷주통(朱統) : 주희(朱熹)의 전통.
*¹⁸숙포(宿飽) : 늘 배가 부름.
*¹⁹용사(龍蛇) : 진(辰)해와 사(巳)의 해. 흉년. 또는 어진 사람이 곤란하고 위태로운 때를 이름. 여기서는 임진년(壬辰年), 계사년(癸巳年)의 왜란(倭亂)을 일컬음.
*²⁰백록동(白鹿洞) :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송대(宋代) 사대(四大)서원의 하나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 오로봉(五老峯) 밑에 있음. 오대(五代) 남당(南唐) 때 이곳에 학관(學館)을 지었고, 송(宋) 때 주희(朱熹)가 수리하여 강학(講學)하였음. 백록동 이라는 이름은 당대(唐代)의 이발(李渤) 형제가 여기에 은거하여 흰 사슴을 기른 데서 유래함.
*²¹석름(石廩) : 중국 호남성 형산(衡山)에 있는 석름봉은 봉우리의 모양이 창름(倉廩)과 같이 생겼으므로 이렇게 이름 하였다.
*²²옥형(玉衡) : 고대(古代)의 천문 관측기.
*²³저앙(低仰) : 낮았다 높았다 함. 또는 내렸다 올랐다 함.
*²⁴선기(璿璣) : 천문(天文)의 운행을 관측하던 기계. 옥(玉)으로 장식했음.
*²⁵하괴(河魁) : 하늘 9성 중의 문곡성(文曲星) 또는 북두칠성의 한 별.
*²⁶퇴파(頹波) : 쇠퇴(衰頹)한 풍조(風潮)나 사물이 쇠락(衰落)하는 추세(趨勢)의 비유.
*²⁷궁음(窮陰) : 겨울의 마지막. 궁동(窮冬)
*²⁸과책(課責) : 책무를 부과(賦課)함.
*²⁹유조(柔兆) 섭제격(攝提格) : 고갑자(古甲子)로 병인년(丙寅年)을 가르킴(1926년).
*³⁰대려(大呂) : 음력 12월.
*³¹상한(上澣) : 상순(上旬)


崇節祠上樑文
述夫 道學冠於 義士七百 上仰慕取舍乎熊魚 自天佑也 底法協于大廈千萬間 欣瞻飛革之翬鳥 不日成之 恭惟昌溪徐公 達城英賢 持斧痛哭 而被譴遠陪 摩天之行 冒白刃於麾下 烈烈生三死一致之誠
象設從容 重峯高弟 擊鼓踊躍 而用兵大捷淸州之戰 降紫泥於宮中煌煌於萬斯千褒忠之典 駿奔賜額 院之俎豆 錦山崢嶸而崔嵬 不朽骯髒骨於義塚 將臺景陽一快死之旗活動有赫 尤切苗裔之慕先 陰陽風雨和會相之 於檜山之元溪 棟樑欀桷盡是狙來新甫之材共竭後昆之力 隣近賢肖封塋如見慈孝道之陟降 名振天下土而洋洋不獨涅背兵武穆 我享我將 恭疏短頌 祠之襟紳 銀漢昭回而倬 彼安得決手於挽河 月汀尤庵兩先生之筆闡揚無餘 詎無祠宇之傳後 日月星辰回旋測 天於蓂庭之舊曆 規矩準繩殫其離婁工倕之巧 庶格列祖之靈 久遠君子流澤發揚貞忠節之昭明 神若地中水而在在豈特被髮韓文公是妥是侑 助擧脩樑
兒郎偉 抛樑東 七百義聲心一片
兒郎偉 抛樑西 師門當日傳朱統
兒郎偉 抛樑南 飽義飽仁如宿飽
兒郎偉 抛樑北 參三爲一在乎天
兒郎偉 抛樑上 龍蛇追想景陽坮
兒郎偉 抛樑下 喪元勇士策全軀
聳翠甑峯出日紅 丹忠萬古與之同
匡廬山色極天齊 白鹿規中五敎兮
露積峯靑石廩嵐 取雄心事舍生甘
甘川日夜流無息 宗海水同星拱極
玉衡低仰璿璣壯 点点河魁光大方
頹波世級何爲也 寂寞窮陰龍戰也
上願上樑之後
日升月恒 人人課忠責孝 扶三綱而明五倫 年豐道泰 家家誦詩讀書 閱千載而傳萬世
柔兆 攝提格 大呂 上澣 江陽 李直鉉 謹撰





숭절사기(崇節祠記)
숭절사(崇節祠)는 창계(昌溪) 서공(徐公)에게 제사지내는 장소인데 서공은 바로 종용사(從容祠)의 칠백의사 가운데 한 분이다. 칠백의사는 살아서는 마음을 함께하고 죽어서는 절의를 함께하였으며 형해(形骸)가 한 무덤에 함께 갈무리되었고 조두(俎豆)가 한 사당에 함께 배향되었다. 지금 분리하여 나눈다면 분리되는 신령(神靈)이 결연(缺然)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더라도 제(齊)나라의 오백장사(五百壯士)는 그들이 상화(霜花)에 있었을 때에는 열렬한 기상이 우주(宇宙)에 미치도록 응취(凝聚)하였으며 그들이 향리(鄕里)에 있을 때에는 그 집안에서 존앙(尊仰)하였던 바이었으니 제사(祭祀)라는 것은 또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동방(東方)의 육신(六臣)*¹과 삼학사(三學士)*² 같은 분들도 대개 동일한 사원(祠院)이었다. 그렇지만 성문충공(成文忠公)*³은 창녕에 이문간공(李文簡公)은 한산(韓山)에 유충목공(兪忠穆公)은 강령(康翎)에 김청간공(金淸簡公)은 춘천(春川)에 홍충정공(洪忠正公)은 부안(扶安), 고령(高靈), 평양(平壤)에 배향되었으니 모두 분이(分異)되었으나 사람들이 괴이(怪異)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회산(檜山)에 숭절사(崇節祠)를 창건하는 것은 실제로 이러한 뜻이다. 공은 문열선생을 사사(師事)하여 문장과 행실을 겸비한 것으로 일컬어졌는데 문열선생이 부월(斧銊)을 잡고 대궐에 엎드렸을 때에는 자리를 받들고 모셨으며 문열선생이 북쪽 변방으로 귀양을 갔을 때에는 도보(徒步)로 따라갔다. 임진년(壬辰年) 7월에 이르러 문열선생이 기고(旗鼓)를 세우고 서원(西原)으로 진병(進兵)했을 때에는 공이 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으며 8월에 문열선생이 승장(僧將) 영규(靈圭)와 성문(城門)에 이르렀을 때에 공은 여러 장수와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당시에 감사(監司) 윤선각(尹先覺)은 문열선생을 싫어하여 무릇 모병(募兵)에 응하여 문열선생의 위하에 있던 자들에게는 부모(父母)와 처자(妻子)를 거두어 공격하였으므로 문열선생의 의병들은 모두 흩어지고 따르기를 원한 자는 겨우 칠백인이었다. 진신(搢紳)의 반열로는 이광륜(李光輪), 임정식(任廷式), 이려(李勵)이며 편비(褊裨)로는 김절(金節), 변계원(邊繼元), 양응춘(楊應春), 곽자방(郭自防), 김헌(金獻), 김인남(金仁男), 이양립(李養立), 정원복(鄭元福), 강충서(姜忠恕), 박봉서(朴鳳瑞), 김희철(金希哲), 이인현(李仁賢), 황삼양(黃三讓), 박춘년(朴春年), 한기(韓琦), 박찬(朴贊)이다. 문인(門人)으로는 공(公)과 박사진(朴士振), 김선복(金善復), 복응길(卜應吉), 신경일(辛慶一), 윤여익(尹汝翼), 김성원(金聲遠), 박혼(朴渾), 조경남(趙慶男), 고명원(高明遠), 강몽조(姜夢祖), 김충남(金忠男)이다. 문열선생 아들 완기(完基) 또한 선생을 따랐고 대둔사(大芚寺)에서 공반(共飯)하던 승려(僧侶) 또한 삼인이며 그 나머지는 다 기록할 수 없다.
27일 금산(錦山)에 이르자 왜적이 이미 핍박(逼迫)하므로 문열선생이 ‘오직 죽음 하나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군중에게 영(令)을 내리니 여러 장수(將帥)들이 명을 받고 힘을 다해 싸웠다. 한참 만에 화살이 떨어지자 문열선생은 갑주(甲冑)를 버렸으며 여러 장사들은 한 사람도 요행(僥倖)이 죽음을 면한 자가 없었다. 나흘 뒤에 문열선생의 가인(佳人)이 진영(陣營)이 있던 곳에 들어가 문열선생의 시신(屍身)을 깃발 아래에서 거두었는데 장사들은 모두 그 곁에 죽었지만 안색(顔色)이 살아 있는듯하였고 노기(怒氣)가 발발(勃勃)하였다. 금산 칠백의사의 이름이 열국(列國)을 진동시키자 조정(朝廷)에서는 종용(慫容)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下賜)하였는데 사우(祠宇)가 지금은 철폐(撤廢)되었으므로 숭절사(崇節祠)를 건설하게 된 까닭이다. 후손 진우(鎭祐)가 상직(相稷)에게 그 일을 기록하기를 부탁하므로 드디어 어찌 다만 공에게만 제사(祭祀)를 지낼 따름이겠는가? 칠백의 정령(精靈)들이 함께 자리에 있는듯하니 장차 일을 도모할 즈음에 여러 장사(將士)들이 당일 마음을 먹은 바를 생각하면 “나라의 존망(存亡)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는데 어찌 감히 우리 몸을 지키겠는가? 스승이 죽었는데 우리가 감히 홀로 살겠으며 우리에게는 부모가 살아 있는데 감히 전진(戰陣)에서 용기 없는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반드시 말했을 것이다. 이것이 깃발 아래에 모여서 죽으면서도 노기가 오히려 발발하여 살아있는 듯하게 된 까닭이리라. 의(義)를 저버리고 살기를 찾았던 사람들이 이 사당(祠堂)에 들어오면 그 이마에 반드시 땀이 맺힐 것이니 어찌 그 마음을 고치지 않겠는가?
병인년(丙寅年) 청명절(淸明節)에
광주(光州) 노상직(盧相稷)이 삼가 쓴다.


*¹육신(六臣) : 조선 세조때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던 신하들로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을 이른다. 사육신은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이고, 생육신은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이다.
*²삼학사(三學士) : 조선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한 세 학자,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
*³성문충공(成文忠公), 이문간공(李文簡公), 유충목공(兪忠穆公), 김청간공(金淸簡公), 홍충정공(洪忠正公) :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김상헌(金尙憲), 홍익한(洪翼漢),


崇節祠記
崇節祠者 祀昌溪公之所 公卽從容祠中 七百義士之一人也 七百義士 生而同心 死而同節 形骸同藏於一塚 俎豆同享於一祠 今分而異之 分之靈得不缺然 雖然齊之五百壯士 在霜花則烈烈之氣 窮宙而凝聚 在其鄕 其家所尊仰 所祭祀者 亦不能者已也 若我東六臣及三學士 槩是同一祠院 然成文忠之昌寧 李文簡之韓山 兪忠穆之康翎 金淸簡之春川 洪忠正之扶安高 靈平壤之享 俱分異而人不爲怪 檜山之刱殉節 實此義也 公師事文烈先生 以文行兼備見稱 文烈持斧伏闕 則奉席而陪之 文烈先生建旗鼓進兵西原 公先後之 八月 文烈先生與僧將靈圭 薄城門 而公與諸將士 冒死直前 時監司尹先覺嗛文烈先生 凡應募在文烈麾下者 收擊父母妻子 文烈兵皆散 願從者只七百人 搢神之列 則李光輪 任廷式 李勵也 褊裨 則金節 邊繼元 楊應春 郭自防 金獻 金仁男 李養立 鄭元福 姜忠恕 朴鳳瑞 金希哲 李仁賢 黃三讓 朴春年 韓琦 朴贊也 門人 則公及朴士振 金善復 卜應吉 辛慶一 尹汝翼 金聲遠 朴渾 趙慶男 高明遠 姜夢祖 金忠男也 文烈之子完基亦從焉 大芚共飯僧 又三人 其餘不能殫錄 二十七日 抵錦山 賊已逼迫焉 文烈先生令軍中 曰只有一死 諸將唯命而進力戰 良久矢盡 文烈先生捐甲冑 諸將士無一人幸免者 後四日 文烈家人 入陳所收文烈尸于旗下 將士皆死其側 顔色如生 怒氣勃勃 錦山七百義士之名 動于列國 朝庭嘗賜額從容 祠今掇廢 崇節祠之所以建設也 後孫鎭祐屬相稷記其事 遂略書外史所載 俾齋於斯者 知公從師赴國 捨生殉義之實 噫此豈但祀公云乎哉 七百精靈 如共在座 將事之際 以思諸將士 當日所以爲心 必曰國之存亡在朝夕 不敢有吾身也 師死吾不敢獨生也 吾有父母 不敢爲戰陣無勇之人也 此所以聚死旗下 而怒氣猶勃勃如生也 彼背義求生者 入此祠其顙必泚 盍有以改其心哉
丙寅 淸明節 光州 盧相稷 謹書


[출처 및 참조]

증산서원지-증산서원(2014.3.25)

창원향교지-창원향교(2004.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