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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두척동 경주최씨 두곡서원 斗谷書院

천부인권 2018. 4. 25. 04:32



2018.10.19 창원 두곡영당



2018.4.18 두곡서원 입구모습


2018년 4월 18일 두곡서원(斗谷書院)에서 향례를 올리는 날이라 찾았다.
두곡서원(斗谷書院)은 창원시 마산회원구 두곡길 54(두척동 637번지)에 위치했으며, 헌종12년(1864)에 창건하였고, 고종4년(1867)에 이건(移建)한 문창후 고운 최치원(文昌侯 孤雲 崔致遠)을 배향하는 곳이다. 34개의 계단을 오르면 두곡서원의 외삼문인 경앙문(景仰門 : 덕망이 높을 사람을 위해 우러러 보라)을 만난다.
최치원선생이 가야산(伽倻山)에서 선화(仙化)하기 전까지 우리지역 인근에 많은 흔적을 남겼으니, 진해구의 청용대각석(靑龍臺刻石), 합포구의 월영대(月影臺)와 돝섬(楮島)의 전설, 성산구의 강선대 등이 그것이다.




두곡서원 외삼문 경앙문



경앙문(景仰門) 편액



두곡서원(斗谷書院) 강당


斗谷影堂記
我國 國於海在 檀厖而箕晰 疇敎敍而有仁賢之化 降自三韓灑以來 干戈日尋世難極矣 而至於文學 則寥無聞矣 羅季眞聖王時 有文昌公 崔海雲先生者記 自兒小時 風表灑落 才思超逸 年甫十二 入中國以高某官 騈從事官製一檄掃黃巢亂 登中朝某官 文章動天下及還東土東土 狹隘 不足以展其蘊抱 乃日 人間要路通津 眼無開處 物外靑山綠水 夢有歸時  終無仕進之意 托跡於山水之間 文昌月影臺 實先甥杖屨之所 而千載如昨 尙帶遺芬 退陶先生所詠 至今猶有高臺月留得 精神向我傳 者是也州人立廟 而楬眞像以俎豆之 戊辰撤院之後 移安影幀于雲仍所居斗谷里 而歲月寢久 綃本糜缺將盡遠孫大柱惟是之懼齋鄕省間通文將立影堂庚子春 先構齋舍 以爲臨時 權安之所而今夏 聞眞影 又在河東鄕校 大柱乃跋涉炎程 賚畵師繪摹而來 爲先奉安于齋 因訪余于 花山之第 要一言以記之 余惟大柱 尊賢追先之誠 誠勤矣 但詘於力 未畢志願 殊若可恨 然一此心以往絡豈無攸遂也 姑書此以歸之 而其餘顚末大槪 待他竣事而更記之
晩休 金萬鉉 撰


두곡영당기(斗谷影堂記)
우리나라는 바다 동쪽에 나라를 세워 단군은 순후하였고 기자는 밝아 홍범구주(洪範九疇)로 질서를 가르치니 어질고 현명한 교화가 있었다. 삼한(三韓)에서부터 고구려 백제 이래로 전쟁이 날마다 이어져 세상이 지극히 어지러웠다.
문학에 있어서도 적막하여 이름난 자가 없었다. 신라 말 진성왕(眞聖王) 때 문창공(文昌公) 최해운(崔海雲) 선생이 일어나 어려서부터 기풍과 기골이 맑고 재능과 생각이 뛰어나 나이 열둘에 중국으로 들어가 고모(高某)의 從事官으로 벼슬하여 황소(黃巢)의 난을 격문 한편으로 평정하여 중국 조정에 벼슬을 하고 문장으로 천하에 울렸다. 우리나라로 돌아오니 나라는 좁아서 그 쌓아놓은 것을 펼치기에 부족하였다. “인생에서 나루로 통하는 중요한 길이 눈에 보이는 곳이 없으니 세상 밖 청산녹수(靑山綠水)로 꿈속에서나마 돌아갈 때이다.”하고 끝내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고 그 자취를 산수(山水)에 남기며 유람하였다. 문창(文昌) 월영대(月影臺)는 실로 선생께서 행적을 남기신 곳이다.
천년의 세월이 어제와 같아 오히려 그 남겨진 향기가 남은 듯하고 퇴계(退溪) 도산(陶山) 선생이 시를 읊었다. 지금 오히려 높은 대(臺)에 달이 남아 있어 그 정신이 나를 향해 전해진다는 것이 이것이다. 고을 사람들이 묘우(廟宇)를 세워 그 진영(眞影)을 걸고 제사를 드렸다. 무진년 서원을 철폐한 뒤 그 후손들이 두곡리(斗谷里)에 그 영정을 편히 모시고 세월이 오래 지나 본래의 자손과 그 모습이 점차 흩어져 사라지게 되었다. 먼 후손인 대주(大柱)가 이를 두려워하여 시골과 도시에 통문을 돌려 장차 영당(影堂)을 세우려 하였다.
경자년 봄에 먼저 재실을 갖추고 임시로 영령을 모시는 장소로 삼고 올해 여름에 진영(眞影)이 하동향교(河東鄕校)에 있다는 말을 듣고 대주가 멀고 험한 길을 여행해 화공(畵工)에게 부탁하여 그대로 베껴서 돌아와 우선에 재실에 봉안하였다. 이에 화산(花山)의 집으로 나를 방문하여 한마디 기문(記文)을 적어주기를 청하였다. 내 생각에 대주(大柱)가 현인을 존경하고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을 생각하니 진실로 감동이 되었다. 다만 힘이 모자라 그 원했던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할 것이나 이 한 가지 마음으로 이왕 나아갔으니 어찌 끝내 이루는바가 없으리오. 이에 이것을 글로 써서 그에 부치니 그 나머지 일의 시작과 끝의 대략은 다음에 하던 일을 성취하기를 기다려 다시 기문을 쓸 것이다.
만휴(晩休) 김현만(金萬鉉) 짓다.




두곡서원(斗谷書院) 편액




두곡서원 주련

[주련 해문]-可欲 신희철 
春祀秋嘗導萬古   봄제사 가을제사를 오랫동안 지내니
(춘사추상도만고)
錫士子功名陰隲   훌륭한 학생에게 공명을 하사하시고 음으로 도와 주시도다.
(석사자공명음척)
顕大人報應文章   대인을 나타내시어 문장으로 보답에 응하게 하였으니
(현대인보응문장)
孫枝蕃衍喜聯科   자손이 번창하여 기쁘게 연달아 과거에 급제하여
(손지번연희련과)
堂勢尊嚴昭奕代   사당의 존엄스런 기세가 여러 대에 빛나리라
(당세존엄소혁대)

 



두곡강당(斗谷講堂) 편액



중화당(中和堂) 편액



추모당(追慕堂) 편액




文昌公崔先生影堂記
夫追遠報祀之禮 而類而感 以類而應 故 謝上蔡曰 祖考之精神 卽子孫之精神 蓋以此也 文昌崔先生 以羅大名賢 文章德業 爲百世之師表 而衿韻豪爽雅好佳 山水左海數千里 名塢勝區 杖屢殆遍遺舃之墟 或賢賢而畏壘 或親親而廟亨 如泰仁之武城鶴林之西岳 河東之琴川 指不勝 僂而昌原之月影臺其一也 天年古臺 水月空留 此間虫魚石木 猶爲人愛惜 況裔仍之曠感於先躅者乎 在昔憲宗之丙午 郡居後孫在勳氏 詢謀鄕士 設院而尸祝之 後値闕齾之厄 俎豆中撤 乃距壹十許里 追構數椽影堂 於府西斗谷之村後 以寓羹墻之慕 越三十五年 太上之壬寅 本孫斗錫甫 增修是閣 煥然重新 以舊影歲久漫漶 改模新本而揭虔焉 卜三九兩丁 鄕人士駿奔在庭 歲薦時享 幹其事者 斗錫之從孫昶模也 日裏吐遠涉屬升澤而述 其楣顧斯 文役義難終辭 遂援筆而諗于 仁門諸賢曰 夫尊祖象德影 幀之奉尙矣 朱夫子曰 先朝影像諸子孫各傳一本自隨不妨 由是言之 先生之神 如水之在地中 洋洋陟降以類感 應七分遺像 若千載朝暮遇向 所謂先朝精神 卽子孫之情神 不其然哉 今桑海飜波 學術岐貳 舊家世族 日變於夷 夫肯構之道 無大於繼述其事 入是堂也 讀先生之書而勿 墜詩禮之學 追先生之志 而推廣友睦之風 乃本業耕織 致力於菽水之歡備物於蘋藻之享 以引以翼 勿替大祖典型 則 崔之門安得不昌大 乎是爲記以貽其後之人
玉山 張升澤 記


문창공최선생영당기(文昌公崔先生影堂記)
무릇 먼 조상을 기리고 그 은덕에 감사드리는 예는 같은 혈족으로서 감동하고 같은 혈족으로서 응대하는 것이다. 사상채(謝上蔡)*¹께서 ‘조상의 정신은 곧 자손의 정신이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문창 최선생은 신라대의 이름난 현인으로 문장과 덕업(德業)이 백세(百世)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가슴에 품은 시문(詩文)은 웅대하고 깨끗한 산수(산水)를 아름답게 수놓았다. 우리나라 천리에 이름난 경승지를 지팡이 짚고 두루 돌아다녔으니 그 발자취가 남은 곳에는 그 어질고 맑은 것이 외루(畏壘)*²와 같고 그 친하고 아름다운 이들은 묘당에 모시고 향사를 드리는데 태인(泰仁)의 무성(武城)이나 계림의 서악(西岳)이나 하동(河東)의 금천(琴川)과 같은 곳이 그곳인데 일일이 손꼽아 헤아릴 수 없다. 창원의 월영대는 그 중의 하나이다.
천년이나 된 높은 누대에 멀리 바닷물과 덩그런 달만 부질없이 남았고 그 중에 보이는 산천초목과 금수들은 오히려 사람들을 애달프게 한다. 하물며 후손으로서 선조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겠는가.
옛날 헌종(憲宗) 병오(丙午, 1846)에 창원군에 사는 후손 재훈(在勳)이 고을의 선비들과 의논하여 서원을 세우고 향사를 드렸으나 뒤에 서원철폐의 액을 당하여 향사를 드리는 일이 중도에 철폐되었다. 이에 월영대에서 10리 거리에 부의 서쪽 두곡(斗谷)마을 뒤에 몇 칸의 영당을 추증해 지어서 제사를 드리는 추모하는 마음*³이 깃들게 되었다.
이후 35년을 넘어서 고종 임인(高宗 壬寅, 1902)에 본손(本孫) 두석(斗錫)이 각(閣)을 중수하여 그 모습이 환하게 거듭 새로워졌다. 옛 영정은 세월이 오래 되어 낡아서 알아 볼 수 없게 되어 다시 새롭게 모사(模寫)하여 정성들여 걸게 되었다. 3월과 9월 양 정일(丁日)을 정하여 고을 여러 선비들이 이 뜰에 모여들어 매년 천신 제향을 하였다.
그 일을 주간(主幹)한 사람인 두석의 종손(宗孫) 창모(昶模)가 어느 날 그 일에 관한 전말을 싸서 들고 먼 걸음을 하여 나에게 문 위에 걸 기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사문(斯文)의 공역을 생각하니 의리상 끝까지 사양할 수 없어서 드디어 붓을 당겨 어진 유학의 문도인 여러 현인들에게 고하게 되었다. 조상의 형상을 존숭하는 덕은 영정을 봉안 하는 것이다. 주부자(朱夫子)께서는 조상의 영정은 여러 자손이 각각 한 본으로 전하여 스스로 따르면서 어긋남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이것으로 말한다면 선생의 신령은 물이 땅속으로 흐르는 것 같이 도도하게 오르내리니 같은 동류로써 서로 감응하니 곧 완연히 남겨진 그 형상이 마치 천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아침에 보고 저녁에 보는 듯하다. 앞에서 이른바 선조의 정신이 곧 자손의 정신이라 한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상전벽해가 되어 학문이 유학과 서구학으로 나누어지고 오랜 전통 있는 문중이 오랑캐로 일변해 버렸다. 무릇 선조의 일을 계승하는 도리로 그 사업을 이어서 계승하는 것이 가장 크다. 이 당에 들어서서 선생의 글을 읽고 시예(詩禮)의 학문이 실추되지 않게 하고 선생의 뜻을 좇아서 우애롭고 화목한 풍도를 미루어 넓혀야 할 것이다. 농사짓고 베짜는 본업을 지키며 콩을 먹고 물을 마시더라도 효성을 다하는 즐거움에 힘을 다하고 떠도는 후손들이 의탁하여 제향을 드릴 수 있는 제물을 갖추고 서로 당기고 펼쳐서 위대한 조상의 전형(典型)이 쇠퇴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최씨 문중이 어찌 창성하지 않겠는가. 이것으로 기문을 삼아 후세의 사람들에게 주노라.
융희(隆熙) 후(後) 계축(癸丑 1913) 삼월 상순
옥산(玉山) 장승택(張升澤 1838-1916) 씀.


*¹사상채(謝上蔡) : ‘사양좌(謝良佐)’를 출신지를 붙여 달리 이르는 말인데, 중국 북송의 유학자(1050~1103)로 자는 현도(顯道)이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頥)의 제자이며, 정문(程門)의 네 선생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에 《논어설》, 《상채어록(上蔡語錄)》 등이 있다.
*²외루(畏壘) : 춘추 시대 노(魯)나라 지역의 산 이름이다.
*³갱장지모(羹墻之慕) : 순(舜)임금이 죽은 요(堯)임금을 사모한데서 유래하며, 즉 국에서 요임금이 보이고, 담벼락에도 보였다 한다.





講堂跋
夫人受天地中以 生秉彜良心則 慕先竭力於 人道大矣者也 而或有力能可爲而 不爲著力不能可爲而 爲之者可爲而 不爲者無其誠心者也 不能爲而 爲之者存其誠心者也 惟我文昌公 先祖院宇 吃立月影臺久矣 中間撤亨而 後孫在勳 詢謨僉同略干 鳩材移搆所居本 社之後而 妥靈于玆五十年所矣 勳侄斗錫 踵武殫誠 迺爲重修而 舊影糢糊 新本改模 則事巨力綿 春享秋獻 凡百未備在於 士林猶爲 慨嘆而 況其雲仍者乎 宗人監祭敬基爲 具方圓之器 齊明之服以 奉享儀 是豈非慕 先堨力之 道乎 駿奔之儀 蘋蘩之節於 斯觀美矣 日我僉宗 公像在堂念 玆在玆勿替 引之
癸丑 暮春 上院 後孫 相鼎 謹誌



강당발(講堂跋)
인간이 천지간에 좋은 천성을 지니고 태어남으로써 곧 조상을 숭모(崇慕)하는데 힘을 다함이 인간의 도리이리라. 혹은 능력을 가졌으나 그렇지 않은 자는 성심이 없는 자이다. 그러한 자는 성심을 지닌 자이다.
우리 문창공 선조를 모신 서원이 월영대에 오래도록 우뚝하나니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향(撤亨)되었으나 후손 재훈(在勳)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으고 약간의 재목을 모아 공이 거쳐하시던 집 뒤편에 옮겨 지어 신주를 섬겨 모신지 이미 50년이라.
재훈의 조카 두석(斗錫)이 그 뒤를 이어 정성을 다하여 중수(重修)에 이르게 되니 옛 모습은 사라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제사 모시는 일이 크게 이어져 춘추로 향례를 모시고 무릇 백가지 부족한 것은 오히려 사람이라고 개탄하는 바, 황차 그 후손이야 오죽하랴. 종인이 잘 살피고 공경함이랴.
재구를 갖추고 심신을 깨끗이 하여 다 같이 새벽 일찍 제복을 갖추어 입고 향사 드리는 의절이 어찌 조상 숭모(崇慕)가 아니며 앞질러 수범하는 도리라 아니하리. 달려와서 제사하는 법도와 제수가 변변찮다는 예절은 아주 아름다움을 보는 것인즉 오늘 우리 모든 종인들은 공의 영정이 이 사당에 계신다는 마음을 바꾸지 말지어다.
계축(1913) 3월 상순 후손 상정 삼가 쓰다.


[출처 및 참조]
최치원이 드리운 합포의 달그림자-마산문화원(2016.10.26.)
창원향교지-창원향교(2004.11.1.)





두곡강당(斗谷講堂) 편액


두곡강당(斗谷講堂) 편액을 쓴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3.19 ~ 1919.11.27)은 조선 말기의 문신, 서예가, 정치인이자 성리학자이며 대한제국의 정치인, 일제 강점기의 관료, 조선귀족이며 민족의 역적 매국노이다.




운수재(雲樹齋) 편액



내삼문으로 영당(影堂) 출입문인 도광문(道光門)



문창후최선생영당(文昌侯崔先生影堂)



문창후최선생영당(文昌侯崔先生影堂) 편액



문창후최선생영정(文昌侯崔先生影幀)



문창후최선생가묘(文昌侯崔先生假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