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시 의창구 의안로59번길 10에 위치한 창원향교(昌原鄕校) 대성전(大成殿)은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창원향교는 조선시대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수령이 파견된 지역에 설치한 향교로 유교(儒敎) 교육기관이다.
창원 향교의 창건 연대에 대하여는 다양한 설이 제시되어 있으나 최초의 이건(移建)은 알기 어려우며 대체로 1705년(숙종31) 부사 신명식이 부의 서쪽 5.89㎞에 있는 내상리(內廂里 : 현 합성동 제2금강산 입구) 청룡산(靑龍山) 아래에 옮김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1705년(숙종 31)에 이읍(移邑) 논의가 있어 부사 신명식(申命式)이 도감(都監) 박태윤(朴泰潤)과 함께 향교를 천주산(天柱山) 아래의 50보(步)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창원부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신명식(申命式)은 을유(乙酉 : 숙종 31-1705년) 2월에 부임하여 정해(丁亥 : 숙종 33-1707년) 7월에 교체되었다. 신명식 부사의 공덕을 칭송한 비문이 창원 용지공원 비림에 있어 옮겨 본다.
부사 신후 명식 이교불망비(府使申侯命式移校不忘碑)
猗歟我侯 오! 훌륭하신 우리 원님이여!
爲政在要 고을 다스림에 갖출 자질 다 지니셨네.
毁撤佛事 절을 헐어 치워버리고
移建聖廟 향교를 옮기어 지으셨다.
功重士林 선비사회에 큰 공을 이루었고
悳及鄕黨 고장 백성들에게 큰 덕이 미치었네.
故玆鐫石 이런 까닭에 이를 돌에 새겨두나니
永恩不忘. 영원히 그 은혜 잊지 않으리이다.
무자(1708)년 2월 일에 세우다.
*부사 신명식이 절을 없애고 향교를 지었으니 선비들이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숭유억불’ 정책을 실천하는 것이 당대에는 미덕이었음을 알려 주는 자료이다.
지금의 창원향교는 1748년(영조 24)에 부의 동쪽 태을산(太乙山) 아래의 용이 남쪽을 굽어보는 형국에 터를 정하고 부사 이윤덕(李潤德)이 여론을 수렴하여 이듬해 정월에 이건하였다.
'부사이공윤덕이교불망비(府使李公潤德移校不忘碑)' 「역주 창원부읍지」 p209에는 “이윤덕(李潤德)은 정묘년(丁卯年), 영조 23(1747)년 3월에 부임하여 기사년(己巳年)인 영조 25(1749)년 여름에 폄귀(貶歸)되었다. 부사 이윤덕이 무진년(戊辰年 1748)에 내상에 있던 향교를 창원도호부에서 동쪽으로 1리에 옮겨지었다.”[경상도읍지, 창원읍지 학교 편에는 鄕校在府東一里 初在府四十里內廂 戊辰府史李潤德移建于此]라 기록하고 있다. 창원향교 입구에 위치한 비의 제하(題下)에는 이처럼 새겼다.
字惠淸德 銘在口碑 은혜롭게 길러주신 그대의 맑은 덕 고을 백성 칭송하여 비명에 새기었네.
誠篤聖廟 首移校基 문묘를 받드는데 참되고 독실하여 으뜸으로 향교의 터전을 옮기셨네.
民歌來暮 士有去思 백성들은 늦게 오신 원님을 노래하고 선비들은 떠나가신 원님의 비 세웠네
借宼無路 遺愛在玆 훌륭하신 우리 부사님 다시 뵐 길 없으니 여기에 사랑 남겨 빗돌 세워 기리리라
1) 不忘碑는 善政碑, 頌德碑, 功德碑, 去思碑, 遺愛碑라고도 한다, 碑銘의 韻은 碑, 基, 思, 玆('支' 平韻)
2) 구비는 萬口是碑라는 의미로 백성들의 칭송이 비를 세운것과 같다는 말이다.
3) 성묘는 文廟, 즉 공자님 사당을 의미한다.
4)來暮之頌, 來何暮의 준말, “어찌 이다지도 늦게 오셨는가!” 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이 칭송하는 말 『後漢書』
창원향교 대성전은 지대석 위에 3단의 석축을 쌓고 3곳에 계단을 두었다. 초석은 돌의 형태에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를 하였고, 민흘림한 원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이다.
昌原鄕校 移校序-원문
夫學校者 敎化興衰之本原 斯文消沮之關會也 基地有不吉聖廟有未安 擇地移建 古有其道 而移建體重 首非邑宰之罄心殫力 不可得 本校 舊在今校宮五十步 而雩在歲乙酉 有移邑之議 故先爲校於府西十五里 靑龍山下 是其也 高山峻壓 而勢傾仄 石角嶙峋 奔環逼近 每當霖 療殿宇之滲湘 墻壁之衝破 類非平地比也 鄕士之悔恨危惧 隣境之瞻聆咨嗟 有不可言者 雩四十年戊辰南公諱泰良 按節本道 李侯諱潤德知府 府之章甫以移校事 告于侯 侯曰 某日吾將往奉審 侯之行老少靑衿踵焉 侯奉審語諸生日 滲湘衝破 雖所可憂 傾頹之患 亦不多年 重移之擧 勢豈得己耶 諸生 因請卽報 侯曰諾 遂枚報營門 儒生曺大淵 李義福等 隨報而呈狀 果報題焉 侯語生日 巡相己啓 可經始緩 於是拔邑之望 以盧世琬爲擇地有司 盧世煥 .爲成造都監 安聖輯 掌財 金震桓 金章大 董役不佞及 鄭漢杰 曺大淵 金光鼎 叅在校任 亦同時鞅掌 定址于太乙山下 坎龍午向之原 時則戊辰 十二月 是月初八日 香祝自京師降 十七日 移安于客舍東軒翌年己巳 正月八日 竪柱 九日上樑 侯出錢數百緡 買聖廟基地 又買墻外水田 八斗地 以未訖侯理武陵 太守柳一章 以兼官至 董役以誠 亦右斯文眷意也 二月初 我侯還府 三月初三日 還安一鄕衿紳齋會以落之 噫 微李侯慕聖崇儒之誠誰能損俸周章 訖此大役乎 侯有尊聖之功 士伸積年之願 事固待人 時亦有會 鄕之人 立石以頌 銘曰
字惠淸德 銘之口碑
誠篤聖廟 首移校基
民歌來纂 士有去思
借冠無路 遺憂在玆
士之入是校者指之曰 李侯尊聖之碑 丁亥 歲 以令甲踣之 事在旣往 舊蹟無徵 時齋任曺大淵 成守道 李益燁 蜀余記蹟 刊以楣之 余辭不獲 遂叙顚末 以示後
歲在黃鼠孟春下浣 蓬山 鄭漢杰 記
창원향교 이교서-해문
무릇 학교는 교화가 흥하고 쇠하는 근원이며 사문(斯文)이 소통되고 막히는 중요한 곳이다. 그 터가 불길하여 성묘(聖廟)가 편하지 못하면 땅을 골라서 옮겨 세우는 도(道)가 예부터 있었다. 그러나 옮겨 세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여 고을 관청의 힘이 아니면 이를 수 없다.
우리 향교는 옛날에 지금 향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저 을유년(1705)에 고을 관청을 옮기는 의론이 있었다. 그리하여 먼저 향교를 창원부의 서쪽 15리쯤인 청룡산 아래로 옮겼다. 이 자리는 높은 산이 누르고 형세가 경사지고 뾰족한 돌이 빙 둘러 가까이 서있으며 매번 장마에 건물이 물에 젖고 담장과 벽이 무너지니 평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고을 선비들은 후회하고 두려워하였고 고을에서도 염려하는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우제를 지낸 40년 뒤 무진년(1748)에 경상도 안절사는 남태량이고, 창원부사는 이윤덕(李潤德)이다. 고을 선비들이 향교의 이전을 부사에게 건의하니 부사가 말하기를 “내가 장차 가서 살펴보겠다.”하고 부사가 행차하는 날 고을의 선비들이 함께 모였다. 부사가 말하길 “물에 잠기고 무너지는 것이 염려라고 하니 다시 옮기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으리오.”하였다. 이에 여러 선비들이 안찰사에게 보고해 주기를 청하고 부사가 승낙하여 경상도 감영에 보고하게 되었다.
유생 조대연(曺大淵) 이의복(李義福) 등이 부사의 보고에 뒤이어 장계를 올렸다. 부사가 선비들에게 말하기를 “순찰사가 이미 조정에 알렸으니 향교의 이안향축(移安享祝)에 관한 허가가 곧 내려올 것이니 일의 시작을 늦출 까닭이 없다.”하였다. 이에 고을의 뜻에 따라 노세완(盧世琬)을 택지유사로 노세환(盧世煥)을 성조도감으로, 안성집(安聖輯)을 장재로 김진환(金震桓) 김장대(金章大)를 동역으로, 정한걸(鄭漢杰) 조대연(曺大淵) 김광정(金光鼎)을 교임으로 두어 일을 관장하게 하고 태을산 아래에 터를 정하였다. 이때가 무진 12월이다. 이 달 8일에 향축이 서울로부터 내려오고, 17일에 객사의 동헌에 이안(移安)하였다. 다음 해 을사(乙巳 : 1749) 정월 7일에 기둥을 세우고 9일에 상량하였다. 부사가 돈을 내어 터를 매입하고 또 담장 밖의 논을 사들여 더하였다. 공사가 끝나지 않았는데 부사가 무릉(武陵)으로 전근하여 가고, 태수 류일장(柳一章)이 겸관으로 와서 정성으로 일을 감독하니 유학을 권장하는 뜻이 돈독 하였다.
2월초에 부사가 다시 돌아왔고 3월초에 공자의 위패를 봉안하여 모든 고을의 선비들이 다 모여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아! 이윤덕 부사의 성인을 사모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정신이 아니었다면 누가 돈을 내어 이 큰 역사를 마치게 할 수 있었겠는가? 부사의 성인을 공경하는 공을 선비들이 널리 알리고 싶은 뜻이 수년간 쌓였다가 드디어 고을의 인사들이 돌을 세워 기리니 자애로운 은혜가 맑은 덕을 비석에 새기노니 성인의 사랑을 돈독히 살피시어 먼저 향교의 터를 옮기시다. 백성들이 사모하여 노래하고 선비들이 기릴 것이다. 이 향교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성인을 존중한 이윤덕 부사의 공덕비라고 말할 것이다.
정해(丁亥)년 재임이던 조대연(曺大淵) 성수도(成守道) 이익엽(李益燁)가 나에게 사적을 기록하게 하여 향교에 걸도록 부탁하였다. 나는 사양치 못하여 그 전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인다.
무자년(戊子年 : 1768년) 1월 하순 봉산(蓬山) 정한걸(鄭漢杰) 기(記)
昌原鄕校 文廟重修記-원문
我朝國 昔在新羅聖德王十六年太監守忠入唐 開元五年 求文宣王及十哲七十二弟 子畵像置太學東邦之學盖昉於是也時佛敎熾盛漫不知儒術享國至一千年而 惟有薛弘儒崔文昌二侯而已高麗則以佛爲得國燃燈以祈福入關以事天寺宇 㙮廟之盛勝於新羅雖曰立國學而無作成之效忠烈王三十年贊成事晦軒先生 言於朝曰宰相之職莫先於敎育人材今庠序大毁養賢庫殫竭請各出銀布以存 敎養之資兩府從之事聞王出內庫錢以助之七舘十二徒諸生橫經受業者以數 百計其季葉圃隱先生倡明理學爲東邦儒宗逮于我朝鮮則列聖繼作群賢迭 興始乃崇正學闢異端明天理淑人心內建太學成均外設州序黨庠雖窮陬遐裔 莫不有學其學焉者無不有以知孔孟程朱之學而不可一日而不講且明也所以 五百年文明之治可以侔三代之盛矣降自叔季王章一壞綱常斁滅天地閉矣
宗社屋矣 正學廢而異端 興天理昧 而人心惑今之 爲吾儒者凉凉焉無地 可依歸也 鄕之士曺君秉翼喜正安君庚錫金君鍾台 及吾弟相正會明倫堂相與語之曰 古之禪伯有慮 其學之無傳 而至於感泣流涕者 况吾輩生長禮義之邦小少讀 孔孟程朱之書講孔孟程朱之道 日用彜倫動作云 爲無非吾夫子之敎 而今去聖已 遠斯文幾乎墜盡 豈可諉之 以氣數而晏然坐視 而不之救乎 要與鄕中同志 作儒契嚴條約契旣成 又相與語之曰 殿廡荒廢棟宇 傾撓籩豆尊俎之屬 歲久剝落每 春秋釋菜惶懼不寧 盍修理焉以是詢于 鄕老老曰 唯唯謀諸太守全泰興守曰 盛事遂欣然諧協與之周旋得校中舊塩稅錢一千幾百金 又門排錢幾 百金合計 爲 二千餘百於 是五君者 與前郡守甘麒鉉幹 其事蕫其役斬材 以易之陶瓦 以覆之甎土崇垣墉斲石 固庭砌漆三十九位椅卓粉四十四楹軒壁至於門樓厨舍無不 增葺軆勢宏敞甍桷杈枒赤白之餙紛照玲瓏南山之草樹東郊之烟雲倍增顔色 州之吏民聞而趨走相與咨嗟曰此乃貴賤公共之役 而使我無一日之勞一錢之費 而何壯偉閎燿之 若是其極也 是年夏校任庚錫 走書徵記於余 余斂袵作 而曰盛矣哉 諸君之爲是擧也 足令人醒長夜之夢也 不敢辭畧述 其顚末 又從而頌之曰 鄕之校卽國之太學也 先王所以建學立 師者敎民 以孝弟忠信 使趨於善 而以復其性 其朝夕所 以講習者 無非治國平天下之道 故有司取以備 公卿大夫百執事之列 此皆先聖先師 爲萬世開 太平之功 則后之人廟 而祀之以著 其不忘也 其學有詩書六藝 鄕射飮酒春秋合樂 尊賢養老選能攷芸 課農訊囚出兵獻醎之法 諸君實欲 爲斯文扶世敎導卛鄕之 子弟復先王舊章濡之 以仁磨之 以義使麤率 偸頑之習革 以至於淳厚溫良入 其里長幼知孝慈之道行于 路班白不負荷觀于 野耕者讓畊然后可以知敎化行而禮俗成也傳曰一家仁一國興仁一家讓一國 興讓諸君其勉乎咸曰諾遂爲之書諸壁窃擬夫同安縣學告諭云
柔兆執徐七月旣望 商山 金相頊 記
창원향교 문묘중수기(昌原鄕校 文廟重修記)-해문
옛날 신라 성덕왕(聖德王) 16년에 수중(守忠)이라는 사람이 당(唐)에 들어가서 공자와 10명의 철인(哲人)과 72명 제자들의 화상을 구하여 태학에 비치하니 우리 동방국의 학문이 이로서 밝게 되었다.
이 때는 불교가 융성하여 모두 유교를 알지 못하였고, 나라가 생긴지 1천년 동안 오직 설홍유(薛弘儒 : 설총)와 최문창(崔文昌 : 최치원) 두 분이 있었을 뿐이다. 고려도 역시 불교로 나라를 일어킨터라 연등회로 복을 빌고 팔관회로 하늘을 섬겨 사찰과 사탑의 융성함이 신라보다 더 하였다. 충렬왕 30년 찬성사(贊成事) 회헌(晦軒)선생이 나라에 간하였다.
“재상의 직분 중에 인재를 가르치고 기르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지금 상서(庠序)가 크게 퇴폐하고 양현고(養賢庫)가 모두 고갈 되었으니 청컨대 은포(銀布)를 각출하여 인재를 가르치고 현인을 봉양하는 자산으로 삼아야 합니다. 양서서에서 이를 돕는다면 일이 성사됩을 볼 것입니다.” 이에 왕이 내고(內庫)에서 돈을 내에 그를 도우니 칠관(七館)과 십이공도(十二公徒)의 학생들이 경서를 끼고 수업을 하는 자가 수백 명에 달했다.
고려 말기에 포은 선생이 이학(理學)을 주창아혀 동방 유교의 종주가 되었고 조선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여러 성인이 연이어 일어나고 현인이 틈틈이 생기니 비로소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이단을 막아서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정숙하게 하였다. 안으로는 태학과 성균관을 세우고 밖으로 주에는 서(序)를, 당(黨)에도 상(庠)을 세워 비록 궁벽한 시골의 비천한 자손들이라 하더라도 배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 그 배운 자가 공맹(孔孟) 정주(程朱)의 학문을 알지 못함이 없었고 하루라도 강론하고 밝히지 않음이 없었다. 이러한 때문에 조선 오백년 문명이 다스려진 것이며 가히 삼대(三代)의 성대함에 버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말기 아래로 내려가면서 왕도정치는 문득 무너지고 기강과 윤리가 민멸하니 천지가 막히고 나라의 종사(宗社)가 무너졌다. 또한 정학(正學)이 피폐해지고 이단이 흥성하여 천리가 어두워지고 인심이 현혹되게 되었다. 지금 우리들 유학자라는 사람들이 냉냉해져 발디딜 땅이 없으니 어느 곳에 의지할 것인가. 이 고을 사람인 조병익(曺秉翼)과 조희정(曺喜正), 안경석(安庚錫), 김종태(金鍾台), 나의 동생 김상정(金相正) 등이 명륜당(明倫堂)에 모여서 서로 의논하여 말하였다. “옛 말에 부사들이 그 학문이 전해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하물며 우리들이 예외를 아는 땅에 태어나 자라고 어려서부터 공맹과 정주의 책을 읽고, 그 도(道)를 강론하였다. 그러므로 날로 떳떳한 도리를 실천하고 언행을 함에 있어 모두 공맹정주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 지금 성인이 떠나신지 오래되어 유학이 타락한 것이 몇 번이니 어찌 시류(時流)나 운수를 탓하며 좌시(坐視)하면서 구원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이에 고을의 여러 동지들에게 구하여 유계(儒契)를 만들고 조약(條約)을 엄하게 하였다. 계(契)가 이미 결성된 뒤에 또 말하기를 “문묘의 전(殿)과 무(廡)가 황폐하였고, 기둥이 기울어지고 제사의 기물이 오래되어 껍질이 벗겨졌으니 매번 춘추에 석채(釋菜)를 올릴 때마다 두렵고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으니 이를 수리하여야 할 것이다.”하였다. 이에 고을 어른들에게 고하니 고을 어른들이 좋아하고 태수 전태흥(全泰興)에게 청하기로 하였다. 태수가 말하기를 “성대한 일이다.”하고 흔쾌하게 협조하여 함께 주선하였다.
향교 중에 남아있는 옛날 염세전(塩稅錢) 일천 몇 백금과 문배전(門排錢) 몇 백금을 합하니 이천여백금이 되었다. 이에 다섯 사람과 전에 군수를 한 감기현(甘麒鉉)과 그 일을 주관하고 그 노역을 감독하였다. 재목은 잘라 기둥을 바꾸고 기와를 구어 지붕을 입히고 벽돌을 찍어 담장을 높이고 돌을 깎아서 계단을 굳게 하고 39위 위패와 의탁(椅卓)을 새로 칠하고 44기둥과 벽에 분토칠하고 부엌에 이르기까지 손질하지 않은데가 없었다. 그 몸체와 기세가 웅장하고 지붕과 석가래 기둥 등등에 적색과 백색이 뚜렷하여 현란하고 영롱하니 남산의 초목과 동쪽 들판의 아름다운 구름에 어울러져 형색이 더욱 고왔다. 고을 향리와 백성들이 소문을 듣고 앞 다투어 찾아와 서로 찬탄하며 말하기를 “이 일은 양반이나 아랫사람 모두가 하는 공공(公共)의 일인데, 내가 하루의 노역이나 한 푼의 돈도 거들지 않았음에도 굉장하고도 찬란함이 어찌 이리도 지극한가.”하였다. 이해 여름 교임(校任) 경석(庚錫)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부탁하니 내가 단정히 옷깃을 여미고 다음과 같이 지었다.
성대하도다. 제군(諸君)들이 이 거사를 해냄이여! 족히 사람들로 하여금 긴 밤의 꿈에서 깨어나게 하도다. 감히 사양할 수 없어 일의 전말을 약술하고 또 따라서 송(頌)하기를 고을의 향교는 나라의 태학과 같다. 옛 왕들께서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모신 것은 백성을 효제(孝悌)와 충신으로 가르치고 선(善)으로 나아가게 하여 그 본성을 회복하게 합니다. 그곳에서 조석으로 강습하는 것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러한 까닭으로 유사(有司)가 공경(公卿)과 대부(大夫)와 백 집사(執事)의 서열로서 취하니 이 모든 것이 선대의 성인과 스승들이 만세토록 태평성대의 공을 연 것이다. 그러므로 후세에 사람들은 묘(廟)에 나아가 제사를 모시고 그 잊지 않음을 표하는 것이다. 그 배움에는 시서육예(詩書六藝), 향사음주(鄕射飮酒), 춘추합락(春秋合樂)과 현인을 존중하고 노인을 봉양하는 것과 능력 있고 재주 있는 자를 선발하는 법과 농사를 연구하고 죄인을 심문하는 것과 출병(出兵)하고 목 베는 법이 있다.
제군(諸君)은 실로 사문(斯文 : 儒學)을 위하고 세교(世敎)를 지탱하여 고을의 자제들을 인도하고 선왕의 옛 법을 회복하고 인(仁)으로써 젖어들게 하고 의(義)로서 단련하여 거칠고 경솔하며 완약한 습속을 개혁하여 순후(淳厚)하고 온량(溫良)함에 이르게 한 것이다. 마을에 들어가면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효자(孝慈)의 도를 알게하고 길에는 늙은이가 짐을 진 사람이 없게 하고, 들판에는 밭가는 사람들이 서로 두렁을 양보하게 된 이후에야 가히 교화(敎化)가 행해지고 예속(禮俗)이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한 집안이 겸양(謙讓)을 행하면 한 나라가 겸양을 행할 것이다. 제군(諸君)들은 그에 힘써라. 하니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 이것을 써서 벽에 붙인다. 저의 동안현(同安縣)의 학고유(學告諭)를 본받았다.
병진년(丙辰年 : 1916) 7월 16일 상산 김상욱(金相頊) 쓰다.
*물와(勿窩) 김상욱(金相頊) : 1857년(철종 8) 11월 24일 사시(巳時)에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석산리에서 출생하였다.
선조 때 선무원종1등공신에 녹훈된 김명윤(金命胤)은 김상욱의 10대조이다. 1936년 12월 17일 병환이 들어 같은 달 24일 인시(寅時)에 임천각(臨川閣)에서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애를 일관하여 성리학의 학문적 사상을 흠모하며 심도 있게 이해하고 도달하고자 노력하였다. 물와선생문집(勿窩先生文集)이 있다.
2014.1.1. 창원향교 명륜당과 대성전 풍경
昌原鄕校 聖廟上樑文-원문
文不在玆乎方隆 聖世之尊尙 新者有舊也 更覩廟貌之奐輪 不但士林之觀瞻 實是吾道之顯晦 竊惟 夫子之將聖 亦一天道之自然 無聲可聞無臭 可尋猶秋冬春夏 所存者神所遇者化自南北東西 三綱五常亘古今而以正 萬殊一本探物理而無窮 彼一時此一時雖或有秦漢焉唐宋焉迭作 由百世等百世孰不曰 日月也天地也難名 肆爲百王之所尊 豈特一方之攸敬 所以名敎之地 係是風化之源 外側州縣內側成均祀宇如一 潔爾牢醪馨籩豆享祀以時 顧玆禮義之邦 逖矣嶺海之表 素稱人材之府庫 尤切尊聖之誠心 配從有差秩駿奔之禮 左右如在肅肅登降之儀 纓弁爲之藏修庠序 以之枓合豈料四桷之易朽 殊非一本之可支 地勢傾危己欠庭陛之平衍 巖根逼近豈無風雨之磨滲 涓吉權安縱無假於外貌 援禮荀簡實有憾於中情 屬余知州急務在此 多士揚袂疾聲以呼 斲其峻而夷之 考其制則舊也 四表天作何煩心上經營 庶民子來忽見眼前突亢昔曾重構纔經三十年間 今又新成可期千萬代後 靈儀若舊載啓崇祠 列侍如初有光儒苑 西河皀帶重聞絃誦之聲 北海靑矜再蹄禮讓之俗 乾維上照懷睿化而翹心 地絡傍淸想弘規而動色 恭䟽短引 助擧脩樑 兒郞偉抛樑東 朝暮扶桑一望中 日月麗天俱啓道 光明萬古可無窮 兒郞偉抛樑南 山光海色碧於藍 從來雲霧連還斷 變態無常造化參 兒郞偉抛樑西 人去臺空草自萋 月影閒多金窟樣 兒郞偉抛樑北 洛水溶溶流不極 聖澤與之誰淺深 想應洙泗遙相續 兒郞偉抛樑上 心將太虛看一樑 右文造士不難幷 霽月光風無盡藏 兒郞偉抛樑下 撲地閭閻樂耕稼 壽域春光屋可封 人材異代何須借 伏願上樑之後 家家顔孟 戶戶程朱賢館平安 天與我時地與我 所神物扶護山增而厚水增而深
崇禎紀元後己巳春正月 上浣 幼學 李宜翰 製
창원향교 성묘상량문-해문
문(文)은 바야흐로 융성한 성세에 높이 받들어 숭배하는 이곳에 있지 않겠는가. 새로운 것에 옛것이 있어 사당의 모습 성대함을 다시 보겠나니, 다만 사림의 우러름뿐만이 아니라 실로 이는 나의 도(道)가 드러남과 숨겨짐이로다. 가만히 생각건대 부자(夫子)께서는 장차 성인으로 한결같이 하늘의 도(道)와 같은 자연의 이치로다. 소리가 없어도 들을 수 있고, 냄새가 없어도 찾을 수 있으니 춘하추동에 같으며, 보존한 것은 신(神)이며 만나는 것은 변화하니 동서남북에 존재한다.
삼강오륜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른 것이고 만수일본(萬殊一本 : 각양각색으로 다르나 근본은 하나의 이치라는 말)은 만물의 이치를 찾아 무궁하도다. 저것도 한때이고, 이것도 한때인데 비록 진한(秦漢)과 당송(唐宋)이 있어 번갈아 일어났으나, 백세로 말미암아 백세에 같으니 누가 일월과 천지라 하지 않는다고 형용하기 어렵겠는가. 펼쳐서 백왕의 존중한 바가 되었으니 어찌 다만 한 고을의 공경하는 바이겠는가. 유교의 바탕은 풍속과 교화의 근원을 이어가는 것이니 밖으로 주현(州縣)에서 안으로 성균관에 이르기 까지 사당에서 한결같이 정결히 하여 향기로운 술과 제물로 제때에 제사를 지내왔도다.
돌아보건대 이는 예와 의로움을 따르는 지방으로 먼 영남의 바닷가에서도 드러나도다. 본래 인재(人材)의 고향이라 일컬으니 더욱 성현을 높이는데 성심을 다하였도다. 배향과 종향에 차례로 달려 나아가는 예(禮)가 있고, 좌우에는 엄숙하게 오르내리는 의식이 있도다. 선비들 학문을 닦게 하여 향교로 모으니 어찌 사방의 기둥이 쉬이 썩겠으며, 서로 달라도 한 근본의 지엽(枝葉)이 아니겠는가.
지세는 기울어 위태하고 정원의 섬돌이 고르지 못하며 낭떠러지에 가까우니 어찌 비바람에 쓰러져 감이 없겠는가. 좋은 날 가려 임시로 모시니 겉으로는 가식이 없으나 예를 취함에 실로 마음에 서운함이 있도다. 내 고을의 수령을 맡으니 급한 일이 이에 있어 많은 선비들 달려와 질성(疾聲)으로 부르짖는다. 높은 곳을 깎아 평탄하게 하고 모양을 살펴 예와 같이 하였도다. 사방에서 모여 자연히 이루어지니 어찌 마음에 경영함이 번거롭겠으며 백성들이 자식처럼 와서 홀연히 눈앞에 우뚝함을 보게 되었다. 지난 날 중수한 것이 겨우 30년 밖에 되지 않았으나 지금에 또 새롭게 지어 천만년 후를 기약하노라.
영령을 모시는 의례는 예와 같이하여 비로소 제사를 받들고 배향은 처음과 같이하여 선비들에게 빛이 됨이 있도다. 서하(西河)의 선비들 학문하는 소리 거듭 들리고 북해(北海)의 유생들 예양(禮讓)의 풍속 다시 행하여지도다. 하늘의 빛을 받아 밝은 교화를 품어 마음에 늘 간직하고 땅에 맑음이 이어져 큰 가르침을 생각하고 얼굴빛이 변하리라. 공손히 짧은 시를 지어 들보 돌리는 것을 돕는다.
어기여차 떡을 들보 동쪽으로 던져보니, 아침 부상(扶桑)의 동쪽 바다 아득하네. 해와 달 아름다운 하늘에 일깨움이 갖추어졌고 만고에 밝은 빛 다함이 없으리라.
어기여차 떡을 들보 남쪽으로 던져보니, 산과 바다의 경치 쪽빛보다 푸르구나. 예로부터 구름과 안개 이어졌다가 다시 끊어지고 변화무상하여 조화가 서로 차이나네.
어기여차 떡을 들보 서쪽으로 던져보니, 사람이 떠나니 누대는 비고 풀은 절로 무성하네. 달그림자 한가하여 금굴(金窟)의 모양이고 부질없이 남긴 자취 비석에 쓰게 하네.
어기여차 떡을 들보 북쪽으로 던져보니, 낙동강 유유히 흘러 그치지 않네. 임금의 은택 함께하니 누구에게 얕고 깊겠는가. 응당 수사(洙泗)를 생각하여 아득히 서로 이어 가리라.
어기여차 떡을 들보 위로 던져보니, 마음이 태허(太虛)하니 하나의 들보를 보겠네. 학문이 선비를 만들어 함께함이 어렵지 않으니 광풍제월(光風霽月 : 비가 갠 뒤에 맑게 부는 바람과 맑은 달이라는 말로 마음이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품을 평한 데서 유래한다.) 다함이 없으리라.
어기여차 떡을 들보 아래로 던져보니, 땅에 모인 백성들 집엔 농사가 즐겁네. 장수의 봄빛이 집집마다 드리워지니 인재는 시대가 다르다고 빌릴게 뭐있겠는가.
삼가 원하건대 들보를 올린 후에는 집집마다 안자(顔子) 맹자(孟子)가 나고 집집마다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나서 관아가 평안하고 하늘과 내가 함께하는 때가 되고 땅과 내가 함께하는 곳이 되게 신령께서 돕고 보호하옵시고, 산은 더욱 두터워지고 물은 더욱 깊어지게 하옵소서.
숭정 기원후 기사년(1689) 봄 정월 상순에 유학 이의한(李宜翰) 지음.
창원향교 대성전 문화재 증서
[출처 및 참고]
역주 창원부읍지-창원문화원(2005.12.30.) 민긍기
창원향교지(하권)-창원향교(2004.11.15.) 향교지편찬위원회
창원향교 기록화 조사보고서-창원시(2013.3)
디지털창원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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