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향교와 뿌리

창원향교 풍화루기와 풍화루 영역

천부인권 2018. 8. 3. 15:54

 

 

 

2016.11.7 창원향교 홍살문과 풍화루가 있는 풍경

 

창원향교가 청룡산(靑龍山) 아래에서 이곳 태을산(太乙山) 아래로 이건 한 후 가장 나중에 세운 건물이 출입문인 풍화루 이다. 풍화루를 창건한 임익창(任益昌) 부사는 경진년(庚辰年 : 1760) 2월에 부임하여 임오년(壬午年 : 1762) 7월에 교체 되었다. 손사익(孫思翼)선생이 소양(癸未年 : 1763) 3월에 쓴 풍화루기(風化樓記)는 기록만 있고 현판은 없다. 풍화루 앞에는 “부사임후익창풍화루창건비(府使任侯益昌風化樓剏建碑)”가 세워져 있으며 비문은 부사가 떠난 3년 후인 1765년 당시 삼도수군통제사가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017.2.11. 창원향교 풍화루

 

風化樓記

 

於休遠哉 三代敎法 家有塾 黨有庠 州有序 國有學 無適非學而蓋所以 風化天下 試考我東文敎 則如麗時 數間荒草 可知其陋甚 聖朝以來 肇文其陋 上自王宮國都 外曁窮鄕僻邑 莫不設庠序學校以敎之 寔倣三代道制 其制廟而祀先聖先師 仍 享諸賢 繼以堂揭明倫 處師儒以講道 又翼以東西兩齋 俾學者羣至如歸 於是自堂徂門 以出入之 而門有樓焉 所謂風化樓者是也 豈非以敎人之法 莫先於學校 而學校之設 最關於風化也歟 然則有聖廟 方可有黌堂 有黌堂 方可有東西兩齋 有廟宇堂序 而後亦不可無 風化樓也瀋矣 惟是檜山一府 雖瀕海卑邑 而素以東方鄕魯 稱嶠南大都會 大物事爲之盛 視他州宣若優然 而第自黌序之制自戊辰 移設以後 略略修學 至於風化樓 有未遑焉 己爲累睋隨典 而實錄事力之 不逮也 一州人士 恒以是病之 歲庚辰春 西河任公益昌 來一位是邦 勤勤職事 旣興滯補弊 尤以右文興學爲最初要務 每當雨丁大享及月朔之禮 必齋宿將事 以致其虔 旣又坐黌堂 延多士 顧瞻堂宇規撫曰學校 實一邑矜式之地 文樓爲多士遊息之所 面是州獨無風化樓 非所以重校堂 而係觀瞻也 諸君子苟與吾同志 盍圖之以恢舊觀 遂以邑中之望 推士人金震桓 庀其事 仍辨需費 計役徒量事功 而監事焉 歷數月而工告訖 橫凡三楹 縱亦如之 複桷重欄之制悉中儀規 公乃大會郡章甫以落之 周旋揖讓于其上 己而 公 秩滿歸歸且屬金震桓曰 是樓也非爲景物觀也 亦非顧其名與義 豈止如海山岩洞等閑之區 名樓傑構爭奇而鬪勝 騷人韻士 之所留連而吟賞而己者哉 子其文 而實其事 以顔是樓 震桓 遂遺人來徵 記於思翼思翼 瞿然謂凡校院之有記文古也 雖先輩耆碩 有不敢容易秉筆 如退陶集中 伊山迎鳳諸院之記 其推誘猶如此 卽不佞 金震桓 甫又累索 而不己曰 子以爲記文之作 必待先輩耆碩則季世己降 唐更無記文耶 但据其實而叙其顚末 卽此是記 非必如立言垂後 胡曲讓乃爾 余旣辭不獲 則遂唶爾曰 今日學校之頹廢 士風之偸壤甚矣 任公 能於兜牟中 敦儒化 不以脂膏自潤 而潤色學宮 可謂有古循吏風 蜀人難治 張公以齊魯待之 而猶靡然從化 況以鄕魯 待鄕魯 宜其倡導之易 而興起之速也 且凡學校莊修之易 必勤敏善幹事 而爲公議之所 屬望者乃能任 其事而竣其功焉 如金仲文之 致力於雲洞 李大用之 見推於畵巖是己 余於金震桓甫 地限衣帶一水 未及修士相見禮 而其有 勞於學宮 乃如此 則其人亦可尙矣 雖然 學校之制 環吾東數千里 在在相望 門樓之扁以風化 者何限 而詞華功令之習 旣壤人心術 名利誘奪之害 又誤了後生 以至禮讓之風掃地 敦撲之化蔑如 則所謂風化者 靡靡是一文具耳 有何足損益於學校哉 苟能使遊於斯 學於斯 而倡 率於斯者 庶幾倣朱夫子之 規鹿洞張南軒之 望麓學者 于以攝齊周旋從事於爲巳工夫 而以臨眺玩 樂之意 做得風舞雩氣味 則其漸涵浸漬之效 亦豈止風化一方己也 然後 風化樓始可以稱其名 登斯樓而覽是記者 但當体先民訽堯之義 而不問作記 者之誰某則又幸甚

 

昭陽季春下浣 後學 密陽 孫思翼 記

 

풍화루기-해문

 

멀도다. 하·은·주(夏·殷·周) 삼대의 교법이여! 가문에는 숙(塾)이 있고, 향당(鄕黨)에는 상(庠)이 있고, 고을에는 서(序)가 있으며, 나라에는 태학(太學)이 있으니 적절히 배우지 않음이 없었다.
대개 천지에 풍화가 미치는 까닭은 우리나라의 문교(文敎)로 살펴보노라면 고려 때는 몇 칸 초옥 같은 것은 비우함이 매우 심함을 알겠고 조선 이래에는 그 누추한 것을 빚내었다.
안으로는 왕궁과 도읍에서부터 밖으로는 궁벽한 시골의 향리에 이르기 까지 상서(庠序)와 학교를 지어 가르치지 않음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삼대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고 묘(廟)를 지어 선성과 선사에 제사하며 여러 현인들을 흠향케 하였다. 또 당(堂)에 명륜을 높이 걸고 스승과 유생을 있게 하여 도(道)를 강론하였다. 또 양쪽 동서로 두 재각(齋閣)을 두어 날개로 삼아 선비들이 이르게 하여 당에서 문(門)에까지 출입하게 하였다.
문(門)에는 루(樓)가 있는데 소위 풍화루라는 것이 이것이다. 사람을 가르치는 법으로 학교보다 우선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학교를 세우는 것이 풍속(風俗)을 교화하는 관건이다. 성현의 묘(廟)가 있음으로써 횡당(黌堂)이 있고 횡당이 있음으로써 동서 양쪽의 재가 있고 묘우와 당서가 있은 이후에 풍화루가 없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 회산의 한 부가 비록 바다의 작은 읍이지만 본디 동방의 추노(鄒魯)로서 교남(嶠南)의 큰 도회라 칭해지고 문물과 사업의 성대함이 다른 고을보다도 단연 우월하나 학교를 처음 세우면서부터 또 무진(戊辰)년에 옮겨 세운 이후부터 조금씩 수선하였지만 풍화루는 아직 세울 겨를이 없었다. 이미 여러해 일을 추진하였지만 실로 사적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온 고을의 선비들이 항상 이것을 아쉬워했다. 경진(庚辰)년 봄에 서하(西河) 임익창(任益昌) 공이 우리 고을로 부임해 와서 직무에 힘을 다하여 침체된 것은 일으키고 폐단이 있는 것은 고쳐 보완하였다. 더욱이 문을 숭상하고 학을 일으키는 일을 필수 임무로 삼았다.
매번 두 번의 문향과 월삭의 예를 행함에 이르러서는 엄숙하게 이를 주관하고 그 정성을 지극히 하였다. 또 횡당에 앉아 여러 선비들을 불러 이야기 하면서 당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학교는 실로 한 고을의 모범이 되는 곳이고 문루는 많은 선비들이 쉬고 교우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 고을에 아직 풍화루가 없으니 교당을 중히 여기고 우러러는 바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군자들이 나와 뜻을 같이하여 대개 옛 모습을 갖추자.”라고 하였다. 드디어 고을 백성들의 바람으로 선비 김진환(金震桓)을 추천하여 그 일을 주관케 하였다. 소비되는 경비를 마련하고 노역군을 계산하고 공사를 도량하여 일을 감독케하였다. 몇 달이 지난 뒤 완공을 고하니 가로세로 세 칸으로 하고 겹 서까래에 중첩난간으로 만들었는데 모두 법도에 맞게 되었다. 동공이 이에 군의 선비를 모아 낙성식을 크게 열어 풍화루 위에 주선하고 읍양하였다.
공이 임기가 다 차서 돌아갈 때 김진환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이 누각은 경치구경하고 사물을 감상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며 또 놀고 잔치를 베풀 자리도 아니다. 그 명분과 의의로 본다면 어찌 바닷가 산골짝 같은 한적한 곳에 그치겠는가. 이 이름난 누각의 웅장한 모습이 기이함을 다루고 명승을 겨루니 시인과 묵객들이 연일 머물러 시를 읊고 감상하는 것에만 그쳐서 되겠는가. 그 문에 힘쓰고 그 일을 실질로 실천하여 이 누각을 빛내어야 할 것이다.” 진환이 사람을 보내어 사익(思翼)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두려워 이르기를 “무릇 교원(敎院)에 기문이 있음은 오래된 일이다. 비록 선배 어른들과 석학들이 쉽게 붓을 들지 못함이 있고 퇴계집 중에 이산영봉제원(伊山迎鳳諸院)이라는 기문도 사양함이 이러한데 못난 내가 어찌 감히 기문을 쓰겠는가.”하였다. 김진환이 또 여러번 부탁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기문을 짓는 것은 반드시 선배 어른과 석학을 기다려야 된다고 여기지만 그렇다면 세상에 말세가 된 이후로 마땅히 기문(記文)은 더 이상 나오지 말아야 되지 않겠는가. 다만 사실에 의거하여 그 일의 전말(顚末)을 서술하여 이것이 곧 기문이니 반드시 말을 세워 후세에 남기는 것과 같지 않으니 어찌 곡진히 사양만 하겠는가.”하였다.
내가 이미 사양할 명분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더디어 탄식하여 말하였다. 지금 학교가 퇴폐하고 선비의 풍도가 퇴락함이 심하다. 임공(任公)은 무덕(武德)도 능하고 유교의 교화를 돈독히 함에도 능하여 재물로서 자신을 살찌우지 않고 학궁을 윤택하게 빛내니 옛날 충실한 관리의 풍도가 있다고 할 것이다. 촉나라 사람들이 다스리기 어려워서 장공은 제나라 노나라 사람을 기다렸는데도 오히려 교화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추노(鄒魯)로써 추노(鄒魯)를 기다리는 것을 앞에서 창도(唱導)하기 쉬운 일이고 후세 사람들이 흥기(興起)하여 빠를 것이다.
또 무릇 학교를 장대히 수선하는 역사는 반드시 근면하고 민활하며 일을 잘 주관하여야 한다. 공공의 의론으로 촉망 받는 사람은 능히 그 일을 맡아 그 공력을 다하여야 한다. 김문중(金仲文)이 운동(雲洞)에 그 공력을 지극히 한 것과 이대용(李大用)이 화암(畵巖)에 추대 받은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나는 김진환과는 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선비로서 서로 만남의 예를 갖추지 못하였지만 그 학궁(學宮)에 노력을 다함이 이와 같으니 그 사람 또한 존경할 만하다. 비록 그러하나 학교의 법제가 우리 동방 수천리에 모두 있어 있는 곳들이 서로 보이나 문루에 풍화라고만 편액하는 것으로 제한했겠는가. 시 짓고 문서 꾸미는 것을 농사로 여기는 습관이 이미 사람의 심술(心術)을 타락시키고, 명리에 마음을 뺏기는 훼방 또한 후생들을 오도시켜 예양지풍(禮讓之風)이 온 세상에 쓰러져 가고 돈박한 교화가 멸망함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풍화라는 것이 하나의 문자로 갖추어 있을 뿐 어찌 족히 학교를 손해되고 이익 되게 함이 있겠는가.
진실로 여기서 교유하게 하고 여기서 배우게 하고 여기서 장수하게 하는 것은 주자의 백록동 규칙을 본받고 장남헌의 앙악록 학규를 본받을 것이다. 이에 두루 배워 자신의 본연을 밝히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종사하고 배움의 뜻으로서 공자의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다는 뜻을 채득한다면 점점 함양되어 가는 효과가 또한 어찌 한 고을을 풍화함에 그치겠는가. 그런 뒤에 ‘풍화루’라고 그 이름을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루(樓)에 올라서 기문을 보는 자가 마땅히 옛 사람들이 자신을 낮추어 천한 사람에게도 모르는 것을 묻는 자세를 본받고 이 기문을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는다면 또한 다행이겠다.

 

소양(癸未年 : 1763) 3월 하순에 후학 밀양 손사익(孫思翼) 쓰다.

 

*임익창(任益昌)은 정숙량(鄭肅良)의 뒤를 이어 경진년(庚辰年) 영조 36(1760)년 2월에 부임하여 임오년(壬午年)인 영조 38(1762)년 7월에 전광훈(田光勳)과 교체된 부사이다. 창원향교 풍화루 앞에는 “부사임후익창풍화루창건비(府使任侯益昌風化樓剏建碑)”가 세워져 있으며 비문은 부사가 떠난 3년 후인 1765년 당시 삼도수군통제사가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출처 : 역주 창원부읍지 p211]

*손사익(孫思翼,1711~)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성모(聖謨)이다. 손수민(孫壽民)의 아들이며 영조(英祖) 16년(1740) 경신(庚申) 증광시(增廣試)에 진사(進士) 3등(三等) 4위를 했다.

 

 

 

 

2018.3.26. 풍화에 걸려 있는 풍화루서재중수기

 

風化樓西齋重修記

 

吾鄕風化樓 與西齋 朽傷有年 重葺是圖而時詘擧嬴 爲多士之齋志未遂者矣 何幸府使李公定鉉 來一位是邦 以興滯補弊爲己任 而尤致意於右 文興之道 每月朔瞻禮之餘 必宣言於校中曰 學校 乃一邑 矜式之所也 而門樓與西齋之若是朽敗者 不但爲士林之欠典 抑亦守宰之責也 盍重修之 遂具由稟於巡相國洪公在喆 則洪公特損五百金 俾完是役 猗歟休戰 學校之設 環吾嶺七十州 在在相望而洪公遺愛之偏 深於吾州者 實由於吾侯弛張之道 而亦莫非洪公治敎之盛意也 時不倭冣鎭忝在校任 與李君景馹 安君斗維 同幹工役 閱數月而告訖 輪哭之美 結構之精 悉中儀觀聳動瞻聽 則庶可使吾鄕之縫掖 遊於斯學於斯 而禮讓之風 敦朴之俗彬彬作興矣 鄕中諸長老 俾余爲文以記顚末 余固辭不敗 則僉曰 當初庠宮移建之時 子之會王考公 實主其役 而記蹟尙存焉 則子無庸固辭 余乃忘僭略書梗慨如右 爲頌巡相國 乃賢太守右文之化 彌永久而不忘 且俾來者 有所考覽云 上之卽位元年

 

上之卽位元年 辛丑季夏 後學 金海 金冣鎭 記

 

풍화루서재중수기-해문

 

우리 고을의 풍화루와 서재가 썩고 상한지 몇 년이 되어 중수를 시도 하였으나 시절이 나빠 재물을 모으기 어려워 많은 선비들이 뜻을 가지고 있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다행이 부사 이정현(李定鉉) 공이 이 고을에 부임하여 침채된 것을 일으키고 피폐한 것을 보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고 더욱이 문장을 숭상하고 학문을 높이는 도에 뜻이 있어 매 월삭(月朔)에 문묘제사를 드린 뒤에 반드시 향교에서 말하였다. “학교는 한 고을의 모범이 되는 곳이다. 문루와 서재가 이와 같이 삭아 퇴락한 것이 비단 사림(士林)의 법이 이지러진 것 만이겠는가. 또한 다스리는 사람의 책임이다. 그것을 중수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드디어 순행하던 관찰사 홍재철(洪在喆)이 공에게 품의(稟議)하니 홍공이 특별히 오백금을 마련하여 이 역사(役事)를 완성하게 되었다. 아름답도다! 학교의 설립은 우리 영남 칠십주에 두루 이루어져 있어 서로 바라보이니 홍공이 우리 고을에 내린 특별한 사랑이 매우 깊은 것은 실로 우리 부사의 융통성 있는 도에서 비롯된 것이나 또한 홍공의 치교(治敎)의 성대한 뜻이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이때 못난 내가 향교에 교임으로 있다가 이경일(李景馹)과 안두유(安斗維)와 같이 공역을 주간하여 몇 달만에 마치게 되었다.
외형의 아름다움과 구조물의 정치함이 모두 법식에 맞아 놀랍고 볼만하니 우리 고을의 문사들이 이곳에서 놀고 이곳에서 학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양의 풍속과 돈독하고 순박한 습속이 잘 어울러져 일어나니 고을의 여러 어른들이 나에게 기문을 지어 일의 전말을 기록하라 하여 굳이 사양하였으나 모두 말하기를 “당초 학교를 옮길 때에 그대의 증조부께서 실제 그 일을 주관하여 내 이에 졸렬함을 잊고 일의 대강을 이와 같이 서(書)하여 홍공과 어진 태수가 문명(文名)을 존중하는 교화를 칭송하고 또 그들의 공적을 영히 잊지 않고 후세 사람들이 생각하고 관람하게 하려 합니다.

 

신축년(辛丑年 : 1841) 늦은 여름(음력 6월)에 후학 김해 김취진(金冣鎭) 쓰다.

 

*이정현(李定鉉)은 헌종 6[경자년(更子年, 1840)] 9월에 부임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842) 8월에 좌수사(左水使)로 옮겨갔다. [출처 : 역주 창원부읍지 p209]

 

[출처 및 참고]
역주 창원부읍지-창원문화원(2005.12.30.) 민긍기
창원향교지(하권)-창원향교(2004.11.15.) 향교지편찬위원회
창원향교 기록화 조사보고서-창원시(2013.3)
창원군지-국제신보출판사(1962) 김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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