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향교와 뿌리

창원향교 중수기와 명륜당 중수기 및 상량문 등

천부인권 2018. 7. 31. 06:00

 

 

 

2014.10.8. 창원향교 명륜당 풍경-花階가 잘못되어 있을 때 모습

 

창원향교는 크게 제례 영역인 대성전과 동·서무, 교육 영역인 명륜당과 동·서재를 비롯하여 출입문인 홍살문과 풍화루가 있다. 그러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이 된 곳은 제례 영역인 대성전 1동이며 보호구역은 5,025m² 중 지정구역은 221.4m²(약 67평)이다. 그러다 보니 명륜당과 풍화루가 문화재가 아닌 보호 건물로 남아 있어 품격이 떨어지는 모양새이다. 명륜당과 풍화루 역시 전통시대의 맥을 간직한 소중한 문화유산인데 홀대를 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따라서 옛 기문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문화재 지정을 하여 품격에 걸맞은 위치를 찾아 줘야할 것이다.

 

 

2018.1.10. 전통 화계로 복원한 명륜당의 눈 내린 풍경

교육 공간인 명륜당의 기록을 남긴 명륜당중수기와 상량문 및 창원향교 전체의 공사를 하였던 향교중수기 등을 시대 순으로 남기려 한다. 현판이 남아 있는 것은 현판 아래에 기문을 넣을 것이고 현판이 없는 것은 기문만 기록한다.

 

1780 明倫堂重修記-李星應
1841 鄕校明倫堂重修上樑文-金冣鎭
1886 鄕校重修記-金宗琪
1904 鄕校重修記-金鎬源
1935 昌原鄕校重修記-金柄璘

 

 

 

 

창원향교 풍화루에 걸려 있는 명륜당중수기 현판

 

明倫堂重修記-원문

 

噫夫子之道 不過曰明倫 明倫之道 亦不過曰 興學興學之道無他在乎 上之人躬行而身道之而巳 不然後之學者 安所矜式 安所興起也哉 是故內而國庠 外而黌堂 莫不興學而立敎也 執變豆駿奔走 其敬謹如祀天子 其爲敎大行 其而道大仰然 則吾黨之有斯堂 豈徒然哉 粤昔盛時 群賢迭出 躋躋於鄕序之 間蹌蹌於堂軒之上 箴規磨㘦 自修補仁 倡先躬率 風敎大闡 倫次明而學亦張矣 何意世降敎弛 美風無聞隨以傾把無乃堂之興廢 莫於道之盛衰而然耶 吾思之 則必於葺改者久矣 而事重力巨荏華中就 大守崔公秉敎來 牧我土祗謁聖廟 環顧頹簷敗壁 而忱然欲改謀之群有司曰 是堂也入旬明祀 豈而明倫以闡吾夫子道義 則其修其葺 烏可己乎 僉曰諾太守之意 是吾志也 敢不躅蹶起走 以遂吾良之 志而明 太守之意也 太守於是爲料理材礫 捐廩爲糧托托吾黨中 金奎爀掌其事 舍璋董是役而時自扙策步屧來相之 有不足則助之 有朽之 董之閱數日而斷乎簷壁一新 丹獲暉暎 殿角邃儷 棟樑井井 依然若古昔 時倘吾黨之 諸君自講習 庭學小而洒掃大小齊如函宇之丕 變政觀當庶 不負吾太守 設修之意 而抑爲吾黨之幸歟 抑諸君勗乎勉之 至若玩月之 海亭寒岡鄭先生 講學之所 城東之旌閭 相國崔貞烈表忠之閭也 創閭葺亭 俱有補古風化則大宇之 惠我邦不特明倫一堂 邑豈不倖哉 豈不美哉 諸君子以我而忝在齋長 保爲之記 不可以拙之辭略叙 始末記之如右

歲白鼠(庚子)十二月 星山 李星應 記

 

명륜당중수기-해문(1780)

 

오호라! 공부자의 도는 인륜을 밝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인륜을 밝힌 도는 학문이 흥했다. 흥한 학문은 달리 있을 수 없음인저 윗 사람[古人]들이 자기 몸을 이끌고 몸소 행하였음이라 이러하지 않은 후학자(後學者)들은 어찌 모범이 되고 어찌 흥기할 손가.

이러한 고로 안으로는 국가에는 상(: 나라 學校)과 밖으로는 글방에서 배움을 일으켜 가르치지 않았는가. 제기[變豆]를 잡고 바삐 달려와 그 공경히 했음은 천자가 제사 지냄과 같고 그것을 가르쳐 크게 행하였고 그 도는 크게 우러러 보았음 즉 우리 향내에 이러한 당()이 있으나 어찌 학종(學從)들은 그러는지 저 옛날 성시(盛時)에는 군현(群賢)이 달려 나아가 향서간(鄕序間 : 향교에 있는 학교)에서 그 도를 엄숙히 하였고 당헌(堂軒) 위에 껑충껑충 뛰어 올라 잠규(箴規)를 갈고 닦아 스스로 인()을 도와 닦고 자신의 몸을 이끌고 풍교(風敎 : 풍속, 교화)를 먼저 열었고, 차례로 학문이 밝아지고 또한 퍼져 나갔도다. 무슨 뜻으로 세상의 가르침이 헤이해지고 미풍은 들을 수 없고 명륜당도 따라서 기울어져 무너지니 명륜당의 흥폐가 없어도 도의 성쇠가 아니라고 내 생각이 그러하나 반드시 오래된 지붕은 고쳐야 되겠으니 큰 힘을 들여 중수해야 할 역사를 오래 끄는 중 태수 최병교(崔秉敎)가 우리 땅에 오시어 다스리는데 성묘에 동경해 뵈옵고 무너진 처마와 무너진 벽을 두루 돌아보고 마음이 움직여 고치고자 정성을 꾀하니 무리 중 유사가 하는 말이 이 명륜당은 80년간 향사를 밝게 했고 어찌하여 명륜은 부자(夫子)의 도의(道義)로서 열었으니 그것을 수리하고 그 지붕을 이는 것을 말까보냐모두가 맞다하니 태수의 뜻이 우리 뜻이니 감히 망설이지 않고 탁월하시어 오량의 뜻이 밝음은 태수의 뜻이로다.

태수는 이에 재역(材礫)을 헤아려 창고의 곡식을 덜어내었고 우리 향() 안에 알리고 김규혁(金奎爀)에게 이일을 맡아보게 하고 김장(金璋)은 이 일을 감독하여 이때부터 서둘러 채찍질하니 신발을 이끌고 상래(相來)함이요. 부족한 것은 곧 도우고 썩은 것이 있을까 감독은 골라내고 수월(數月) 동안에 마쳤다. 처마와 벽은 새로워 졌고 단청을 마치니 휘영(暉暎)하고 전각은 그윽하게 어우러져 동량(棟樑)은 정연하여 옛 같이 되었으니 우리 향당의 여러 군자들이 강습함이로다.

정학(庭學)은 자그만 하나 쓸고 물 뿌려[洒掃] 대소를 수신하고 제가(齊家)하니 큰 재에서 빛을 냄과 같고 명륜당의 경관(景觀)을 고쳐 바꾸었으니 이일을 당해야 할 무리들은 부담하지 않고 우리 태수가 수리의 뜻을 베풀었으니 아! 우리 향당의 행복이요 아! 제군들은 힘쓰고 힘쓸지어다. 달구경을 한 해정(海亭 : 최치원 선생이 머문 곳)을 비롯해 한강 정선생께서 강학한 곳과 성동(城東)의 정려는 정열공 최상국(崔相國)의 표충(表忠)의 여()와 같이 이르고 있으니 정()을 창건하고 정()을 갖춤은 옛 풍화를 도움이니 즉 태수의 은혜로다.

우리나라는 명륜의 일당(一堂)이 우뚝하지 못한데 읍()으로서 어찌 요행스럽다 아니하며 어찌 아름답다 아니하랴 제군들은 나를 분수 넘치는 재장(齋長)에 있게 하여 기록하기 불가하나 졸문의 말로서 대략 우()와 같이 시말(始末)을 기록하여 폈음이라.

세백서 경자(庚子 : 1780) 12월 성산 이성응(李星應) 기록함



 

아래 1841년에 김취진(金冣鎭)선생이 남긴 창원향교명륜당중수상량문은 기록만 남아 있고 현존하는 현판은 없음

 

鄕校明倫堂重修上樑文-원문

 

尊聖衛道之所廟宇儼臨 設敎敦化之方黌堂克壯 三代遺制 千秋盛儀 窈惟夫子之將聖 亦一天道之自然 猶秋冬春夏存神而過化 自南北東西繼往而開來 三綱五常亘古今而以正 萬殊一本探物里而無窮 彼日時此 一時雖或有秦漢焉唐宋焉迭作 由百世等百世孰不 曰天地也 日月也 難名肆爲百王之 所尊 豈特一方之攸敬 所以名敎之地 係是風化之源 天叙昭陳 人文宣朗 內則成均外則州縣祠宇如一潔爾牢醪馨 爾邊豆享祀 以時纓弁爲之藏修 庠序以之紏合 畵欄朱甍屹 然於宮墻之下 明窓翠軒翼如 於殿廡之前 扁堂以明倫顧名而思義 設爲學校 所以明敎 叙以彛倫最關成風 惟司徒契之敬敷 乃紫陽老之華扁 不旦士林之 觀瞻實是造化之根本 豈料四桷之易朽 殊非一木之可支 幾多年邑儒之經營 幸今日府伯之規劃 材木如期 工匠殫力 鳩功效勞亶出衛道之地 輩飛定制 亦由秉彛之天 吾道存焉 斯文備矣 屹厦屋之渠渠 揭華扁之爀爀 呼邪以助 樂爲之辭 抛樑東扶桑瑞旭入簾紅 明明直照吾家路 斯道中 天與不窮 抛樑西月影臺高海色低 舟邑遙通江漢路 年年常貢載南黎 抛樑南 山光海色碧於藍 從來雲霧藏神變日暢造化參 抛樑北 七星如斗列如玉 右文至化占窮宙 絃誦洋洋環海曲 抛樑上九龍山色曉明亮 端笏整衿恭辨香 風傳城角太平響 抛樑下 瓦答農謳遍 四野撲地閭閻成願豊 春臺烟月耀桑柘 伏願上樑之後 賢關常泰 彛敎大行 饕風日息塗有守劒之垊 化日舒長 邑有鳴琴之宰

辛丑年 金冣鎭 記

 

향교명륜당중수상량문-해문(1841)

 

성인을 존중하고 도덕을 호위하는 묘우(廟宇)가 엄연히 섰고, 가르침을 세우고 덕화(德化)를 돈독히 하는 횡당(黌堂)이 지극히 장대하다.

삼대(三代 : 夏殷周)에 물러진 제도는 천추(千秋)에 그 위의(威儀)가 성대하다. 생각건대 공자가 성인이 되심은 천도(天道)의 자연스러움이 사계절에 신명이 존재하여 계절의 조화가 스쳐감과 같다.

동서남북 사방이 돌면서 가는 것을 이어 좇는 것이 열리는 것과 삼강과 오륜이 고금에 걸쳐 바른 것과 만 가지 다른 물상도 한 근본으로 통하니 그러한 물리를 탐구하면 궁하다. 이래도 저래도 한 때인 것처럼 진(), (), (), ()이 갈마(羯磨)들어 일어나고 백세를 비롯하던 백세에 대등하던 누가 천지(天地)여 일월(日月)이여 하여도 성인을 이름 하기 어렵다하지 않겠는가. 백왕(百王)이 존숭(尊崇)하던 바가 되니 어찌 비단 한 고을이 공경하는 바로 그치겠는가.

이 향교의 터는 풍화의 근원을 계승하는 곳으로 하늘의 질서가 밝게 펼쳐져 있고, 인간의 문채가 분명히 펼쳐 있도다.

도성(都城) 안으로는 성균관이 있고 밖으로는 주현(主縣)에 사우(祠宇)가 있는 것이 한결 같으니 결뢰료(潔牢醪:재물)과 형변두(馨籩豆:제기)로 지내는 향사(享祀)가 때에 맞다.

선비들은 집에서 수양하고 학교에서 규합한다.

화려한 난간과 붉은 용마루가 학궁(學宮) 담장위로 우뚝하다.

밝은 창과 비취 난간들이 대성전(大聖殿) 앞에 날개를 펼친 듯하다.

()은 명륜이라 편액하고 사의(思義)로 현판(懸板)하였다. 학교를 짓는 것은 명교(名敎)를 밝히려는 까닭이니 떳떳한 윤리를 펼치는 것은 풍화를 이룸이 관건이다.

사도계(司徒契)가 공경하고 펼친바가 명륜이요 주자(朱子)가 편액(扁額)한 것이 사의(思義)이다. 이는 비단 선비들의 볼거리만 아니요 실로 조화의 근본이다. 사방 서까래가 쉽게 썩을 것을 어찌 미리 도량하리오. 하나의 나무만으로 지탱함이 아니다.

수 년 동안 고을 선비들이 경영하려 했으나 다행히 금일 부사가 계획하여 도왔다. 재물이 기약한대로 되고 공장(工匠)이 힘을 다하였다.

머리를 모아 공을 다하여 도를 호위할 만한 땅에 명륜당(明倫堂)이 서게 되었다. 날아갈 듯한 이 규모는 천륜(天倫)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의 도가 여기에 존재하고 유교(儒敎)가 갖추어 졌다.

건물은 웅장하여 당당하고 높이 걸린 아름다운 편액은 빛나도다.

신을 불러 도우려 즐거운 시문을 짓노라.

동으로 들보를 올리니 해가 주름에 붉게 비치고, 밝디 밝은 유학의 길을 곧장 비추니 이 도는 하늘과 같아 무궁하리로다.

서쪽으로 들보를 올리니 월영대는 높아 바다빛이 어리고 배는 멀리 서울 길로 통하여 해마다 언제나 남려(南黎)에 조공하네.

남으로 들보를 올리니 산 빛, 바다 빛, 쪽보다 푸르고 오가는 구름, 안개 신의 조화 갖추어 비오고 개는 것이 조화에 참여하네.

북으로 들보를 올리니 북두칠성이 구슬같이 벌렸고, ()을 숭상하는 지극한 교화 하늘에 자리 잡아 글 읽는 소리 낭랑히 바닷가에 감도네.

위로 들보를 올리니 구룡산 빛이 아침에 빛나고, 홀기 들고 옷깃 여민 선비들 향을 올려 바람이 전하는 부성(府城)의 오각소리 태평가로다.

아래로 들보를 올리니 농부의 노랫소리 사방에 가득하고 온 고을이 풍년들기 기원하니 봄 누각에 아름다운 달빛 뽕밭에 비치네. 엎드려 바라건대 이 들보 올린 후로 고을이 언제나 태평성대하고 인륜이 크게 행하여지고 전쟁 없이 수자리 갈 사람이 길에 노닐고, 고을 수령이 거문고 타도록 되어라.

신축년(辛丑年 : 1841) 김취진(金冣鎭) ()

 

아래 1886년 김종기(金宗琪 )선생이 쓴 향교중수기 역시 창원향교지에 기록만 있고 현판은 없다.

 

鄕校重修記-원문

 

夫學校者 尊聖也衛道也 孟子曰 設爲庠序學校 以敎之 所以明人倫也 學校興 則人明倫矣 學校廢 則人倫蔑矣 崇儒道扶世敎之 一大關會實由於此 則校宮地朽敗頹落 深非敬本之道也 玆土之衣縌掖攝齊於 堂之間者 風夜悚懍 擔負若重任在背 而第以事巨力綿 齋志未遂矣何幸時府使尙公稷鉉 來守是邦 有意於尊聖興學之道 月朔祗謁 周覽校宇 累度興歎曰 此何等所重之地 則其爲修茸 不可時日遷稽 因以是帖諭齋任 適不佞與金萬冑 李炳林 猥參其任 而計拙勢窮 辨財之方 何以得便宣從事也 當此荒年弊局 歛民則民憂溢月 他辨則辨議多口 以是抵啎逡巡矣本鄕人金敬宇 以凡民俊秀 能知慕聖之道 輿其叔元斗 獨擔是費 特納五百金財 募工徵役 桷與瓦閱數月斷手 堂廡齋樓一新 改觀噫其在尊聖之地 孰非我國家 右文化內之民 而出義貢誠 援作自己之事 能人所不能者 倘所謂富 而能行其德者也 此可見時宰倡率激勸之化 而亦莫非吾鄕僉君 子薰養善道之致 則抑亦爲范則冠 而蟬有綏 而然歟 顧安所尸其任者謀 其政而然也 然量其財稱其用 董其役敏於事 則實賴 金李兩斯文勤幹 而至若犯風雪殫誠喫苦 以圖訖功者 李君之力尤多 亦豈不欽歎哉 惟願僉章甫 升斯堂遊於藝者 揖讓進退 講磨義理 過則改之 善則遷焉學大學 明德新民至善這工夫 革其舊染之汚 與咸與惟新 如今日堂宇之 改修新煥 使文昌古府 一繁至道 則豈非吾黨之幸也哉 旣葺堂樓之後 不可無文以記之 而以苦不文者 奚敢於是役哉顧余不佞 忝在是任 知其顚末甚詳 且尊聖慕道之心 自謂不後於人 而以名附之于聖廟之門 亦一大幸 故忘其庸陋冒僭志實如右
金宗琪 記

 

향교중수기-해문(1886)

 

무릇 학교는 성인을 존중하고 도를 지키는 곳이다. 맹자께서 ‘상서(庠序 : 庠은 주(周)나라, 序는 상(商)나라, 校는 하(夏)나라 때 학교의 이름이다.)와 학교를 세워서 사람들을 가르쳐야 인륜을 밝게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학교가 흥하면 인륜이 밝아지고 학교가 피폐하면 인륜이 멸(蔑)한다.
유도를 숭상하고 세교(世敎)를 지키는 큰 기틀이 실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의 건물이 삭아서 퇴락된 것은 경(敬)을 근본으로 삼는 도리가 아닌 것이다. 향교에서 출입하고 공부하는 선비들이 향교를 중수하는 일을 큰 임무로 여겨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나 일은 크고 미약하여 묵은 뜻으로 이루지 못하였다. 마침 다행이 부사 상직현(尙稷鉉) 공이 이곳 창원으로 부임하였는데 성인을 존중하고 학교를 흥성케 하는 도(道)에 뜻이 있었다.
(유생들이) 달 초에 알현하니 (부사가) 향교 건물을 두루 살펴보고는 수차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이곳은 매우 중요한 자리라 그 중수하는 일을 잠시라도 늦출 수 없는 것이다.”하였다. 이로서 재각(齋閣)을 중수하는 첩지를 내려 재임(齋任)으로 나와 김만주(金萬冑) 이병림(李炳林)에게 일을 맡겨 외람되게 그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임무가 매우 중요하여 두려워 할 만한 것이나 계획이 졸렬하고 형세가 궁벽하게 재물을 마련할 방법이 없으니 어떠한 방편으로 일에 종사할 만하지 않았다.
마침 이해에 흉년이 들어 퇴폐하니 세금을 걷는다면 백성들이 크게 근심할 것이 눈에 선하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아도 의견만 분분하고 실효가 없었다. 이처럼 이들이 서로 어긋나 머뭇거리게 되었다. 마침 본 향인인 김경우(金敬宇)는 평민들 중에 뛰어난 사람으로 능히 성인을 연모하는 도리를 알아 그 숙부인 김원두(金元斗)와 더불어 독자적으로 이 일의 비용을 전담하겠다고 해서 특별히 오백금의 재물을 내고 장인들을 모집하고 노역군을 모아 서까래를 올리고 기와를 입힌지 수개월만에 일을 마쳤다. 당(堂) 무(廡) 재(齋) 루(樓)가 한껏 새로워 지고 경관이 훨씬 볼만해 졌다.
아! 존성지지(尊聖之地)에서 누군들 우리 국가의 문(文)을 우대하고 내면을 교화하는 백성이 아니겠는가? 의지를 표출하고 정성을 바쳐 이에 자신의 일로 삼아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니 마땅히 부유하면서도 그 덕을 행할 줄 아는 사람이라 이를 것이다. 이는 당시 부사가 앞장서 이끌고 열심히 권면(勸勉)하는 교화를 볼 수 있고 또한 우리 고장의 모든 군자들의 올곧게 수양됨과 선도의 지극함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되었겠는가. 또한 규범이 정해지니 관장과 선비들이 모여 의론이 되어 그러한 것이고, 그 책임을 맡은 사림이 그 일이 다스려짐을 모의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재물에 맞게 용도를 정하고 노역을 감독하여 일이 민활하게 진행되도록 한 것은 실로 김만주(金萬冑) 이병림(李炳林) 두 사람의 성실함에 힘입은 것이다. 더욱 비바람을 견디고 고통을 참고서도 정성을 다하여 일을 끝까지 마치기를 도모한 공로는 이군(李君)의 힘이 더욱 많았으니 어찌 감탄하지 않을 것인가.
오로지 바라건대 이 땅에 올라 문예를 익히는 모든 선비들은 읍양진퇴(揖讓進退)하는 예절을 익히고 의리를 강의(講義)하여 수양하여 과실이 있으면 고치고 선함이 있으면 실천해야 할 것이다.
또 대학의 명덕 신민 지선의 공부를 배워서 잘못된 구습을 혁파하고 더욱더 새로워지게 할 것이다. 지금에 향교를 새롭게 개수한 것은 문창고부(文昌古府)로 하여금 일변하여 도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니 어찌 우리들의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미 향교는 중수한 뒤에 기문(記文)이 없을 수 없는데 문장이 졸렬한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이 일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못난 나를 돌아보건대 이 일에 참여하여 일의 전말을 상세히 알고 또 성인을 존중하고 도리를 숭상하는 마음이 스스로 생각하여도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의 이름을 성인의 사당문에 붙이게 되니 이 또한 큰 영광이다. 그러므로 나의 졸렬함을 잊고 감히 그 사실을 기록하니 이와 같다.
병술년(丙戌年 : 1886) 김종기 쓰다.

 

*상직현(尙稷鉉)
무신으로 서울 사람이다.
창원대도호부사로 을유년(乙酉年 : 1885) 4월에 부임하여 병술년(丙戌年 : 1886) 6월에 수원중군(水原中軍)으로 옮겨갔다.
광무2(1898)년에 종이품으로 중추원1등의관이 되었고, 광무5(1901)년에 중추원의관이 되었다. 광무8(1904)년에는 군부포공국장(軍部砲工局長)으로 있으면서 중추원의관이 되었다.

 

 

 

 

창원향교 풍화루에 걸려 있는 향교중수기-1904년 김호원

 

鄕校重修記-원문

 

鄕之校 敎民爲義 古之鄕學也 有國則有學 有邑則有校 自三代盛時 以至于今者也 我東 自箕聖東封之後 設敎有綱紀 雖婦孺 貞信不淫僻飮酒以籩豆 以其敎之使然也 至於我 朝列聖繼作 眞儒輩出 學校之賓興侔擬三代 釋奠于先聖先師敬本也 興禮讓明人倫修敎也 典章文物煥然備明 天下之稱小中華者 良以此也 然則學校之興廢 實關於氣數之盛衰而 挽近世降道徵 異敎熾蔓 異類雜糅 吾道之寄在東方 如一髮引千鈞 爲吾儒者悶時憂道  自勉而淑人心者 亶在於首善之地 而本校則天人事變交發 今秋風雨大作 校宮之屋瓦盡捲而脫 柱桷之朽傷者頹傾 傾者顚覆方謀葺治之際 而適時日人鐵道設役於 聖殿宮墻后至近之地 萬無禁止之道 亦難避地而移校 則彼之無知肆然 視若 飛者走者之 掠遏掘去 而益勉吾尊衛之道 聽天所命 以俟黃河之淸也 其爲修葺 不可時日遷緩 而瓦材財用求辨無路矣 瓦材則劃給謀於本倅 財用則本鄕道溪里全根孝 以可欲之善人 自願出義 獨擔是事 時齋任 盧ㅇㅇ金ㅇㅇ李ㅇㅇ隨事董役 閱數月工告訖 朽傷者易完之 顚覆者重建之 罅漏者修補之 仍舊維新而事之就緖 金ㅇㅇ其先後之也 噫 以若喧豗之世 能知崇儒之道 出捐半千之財 無所求望 異於人拔身芬華之計者 富而好行其禮者耶 抑亦從善不惑者耶 如此罕有之實 誠不可泯沒也 時郡守權公益相 遂菴先生 胄孫適守是邦 以尊聖養士 深知當務之爲急 昨今英齋之居接也 夙夜躬臨而勸學 惠之以文房四友 繼之以多士供億之糧饌 實今世之古政也 今於鐵道設始也 本鄕士冒死抗義之場 殫心力交際 綏遠撫內 俾免遇害於狂鋒辭氣激切 不變所守 聲徹京師 播告新聞 以若養之惠政 亦不可諼焉 故諸長老屬余文以記之 辭而不獲命 並叙其顚末 以備後之視今者
聖上四十一年 閼逄執徐陽月下澣 商山 金鎬源 記

 

향교중수기-해문(1904)

 

향교는 백성을 교화하여 의롭게 하는 것으로 옛날의 향학이다. 나라가 있으면 학(學)이 있고 읍이 있으면 교(校)가 있으니, 삼대(三代, 夏殷周)가 흥성할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 성군이 동쪽에 봉해진 후부터 교화를 베풂에 법과 풍속이 있어서 비록 여자와 어린이라 할지라도 정절을 지키고 진실하여 음란하고 편벽되거나 음주를 하지 않았으며 제사를 받들었으니 그것은 가르침이 그렇게 한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여러 임금이 이어 일어남에 참된 선비가 배출되고 학교에서 선비가 배출되어 삼대와 비슷하였다. 선성(先聖)과 선사(先師)께 석전(釋奠)을 드려 공경을 근본으로 하였고 예양(禮讓)을 일으키고 인륜을 밝혀 교화하니 법도와 문물이 밝게 갖추어졌다.
천하가 소중화(小中華)라 한 것은 이와 같이 어질기 때문이다. 그런 즉 학교의 흥함과 폐함은 실로 운수의 성함과 쇠퇴함에 관계되는 것인데 근세로 내려오면서 이단(異端)의 종교가 성하게 뻗어나고 다른 무리들이 뒤섞임에 오도(吾道)는 동방에 붙어있어 마치 한 머리카락으로 천근을 지탱하는 것과 같아 우리 선비된 자들은 번민하고 때때로 도(道)를 근심하였다. 스스로 힘쓰고 사람의 마음을 맑게하는 것으로 실로 모범되는 처지에 있는데 본 향교는 천재(天災)와 인재(人災)가 번갈아 일어났다. 금년 가을에 비바람이 크게 일어 교궁(校宮)의 기와가 모두 날아가고 기둥과 서까래가 썩어 상한 것은 허물어져 기울고 기운 것은 넘어져 중수할 날을 계획하였는데 마침 이때 일본사람들이 향교 뒤 매우 가까운 곳에 철도 부설을 시작하였다. 만에 하나 금지할 방법도 없고
도한 땅을 피하기 어렵다하여 향교를 옮긴다면 저들이 무지(無知)하고 방자함으로 보아 날고 뛰듯이 약탈하고 억압하여 제거하려 할 것이니 우리들이 높이고 지키는 방법에 더욱 힘써 천명(天命)에 따라 황하가 맑아짐을 기다릴 뿐이다. 중수하는 시일을 늦출 수가 없었으나 기와와 재목과 비용을 구할 길이 없었다. 기와와 재목은 본 고을 수령에게 획급(劃給)하도록 도모하였고 비용은 본 고을 도계리(道溪里)에 사는 전근효(全根孝)가 양민으로 자원(自願)하여 의연금을 내어 홀로 이 일을 담당하고자 하였다. 당시 재임(齋任) 노ㅇㅇ, 김ㅇㅇ, 이ㅇㅇ이 일에 따라 감독하여 수개월이 지나 공사를 마치니 썩고 상한 것이 새롭게 완전하여 지고 넘어진 것이 중건되었으며 비가 새던 것이 보수되어 예와 같이 새로워졌는데 일의 첫 시작은 김ㅇㅇ가 선후(先後)가 된다.
아! 이같이 떠들썩한 세상에 유교를 숭상하는 도리를 알아 반천(半千)의 재물을 출연하고 바라고 구하는 것이 없으니 발신(拔身)하여 영화롭게 하는 계획이 남보다 뛰어난 것이다. 부유하면서 그 예를 행하기를 좋아해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또한 선을 좇아 의혹되지 않은 것인가. 이와 같이 드물게 있는 사실은 진실로 없앨 수 없도다. 당시 군수 권익상(權益相) 수암(遂菴)선생의 주손이 마침 이 고을의 수령으로 와서 성현을 높이고 선비를기르는 것이 임무에 급하다는 것을 깊이 알고 지금 육영재(育英齋)에서 거접(居接 : 과거를 보려고 글방이나 조용한 곳에 모여 공부하는 것)하여 밤낮으로 몸소 나아가 학문을 권하고 문방사우를 내려 이어 많은 선비들에게 양식을 공급하였으니 실로 금세에 옛 다스림이었다.
이제 철도의 부설이 시작됨에 본 고을의 선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의(義)로 항거하는 마당에 심력을 다하여 교제하여 먼 곳을 안심시키고 안을 어루만져 미친 칼날에 피해를 면하게 하였으며 말과 얼굴빛이 격렬하고 절실하여 지키는 바가 변하지 않고 소리가 서울에 들리고 신문에 투고하여 이와 같이 은혜로운 다스림을 베풀었으니 또한 잊을 수가 없다. 때문에 여러 어른들이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기에 사양하였으나 명을 거두지 못하고 그 전말을 서술하여 훗날에 지금을 보이게 한 것이다.
갑진년(甲辰年 : 1904) 10월 하순 상산 김호원 기록 함.

 

 

 

 

창원향교 풍화루에 걸려 있는 창원향교중수기-1935년 김병

 

鄕校重修記-원문

 

世愈下而學益壤 異端之熾 塗寒人耳目 生道之艱 窮竭人心力 則當此之時 而有能知有吾儒之學 而尊慕聖賢焉不衰 雖其所行 未必能盡出於其 所當爲之路 而自致高明廣大之城 粹然同揆於聖人賢人所垂之訓 斯亦猶不失爲名敎中人 吾昌原鄕校 歲久弊圮殆不可支 鄕人士相與奮起合 謀幷力而重新之 嘻偉矣 不惑於他岐之衆 而盡猝倉迫之中 克辨至鋸之役 以存舊規而示後範 有能如是焉 則其賢於人 不亦遠乎哉 余方癃 病䪼死 縱不得與諸君 共其勞 其心 竊喜夫往聖之見慕後人 未或哲廢 諸君之存心名敎 可於此見 而久不能己也 吾鄕 爲地雖下自古文物之盛 有非他州比 余之末學 亦幸逮先父老之世 得見其風韻之遺矣 而由今思之 如在千古之下 而想千古之上 觸目殊觀 感慨之懷 有不能禁者 夫於四五十年之間  而其盛衰興替之別 至於如是者 豈可專以世運之升 沈而言哉 亦其士之所習 俗之所尙 日趨於卑下 而不知自覺 而有以致之也 今諸君 旣有是偉擧矣 更進而思遵聖人之訓 務於日用之間 合是焉斯由之 使習俗之美 追躡古昔 而不愧爲先 父老之後輩 然後諸君 尊聖之道 於是而可謂能有其實 而吾鄕復興之望 亦可以卜矣 諸君 其無忽諸 校之重修 始於李君敎敏 而古成於玉君麒煥二君 皆前後校任 而時則乙亥月日也
後學盆城 金炳璘 謹書

 

향교중수기-해문(1935)

 

세대가 내려 갈수록 학문은 더욱 퇴락하고 이단(異端)이 불같이 일어 사람의 이목(耳目)을 막아버려 살아갈 길이 어렵게 되면서 사람의 마음과 힘을 고갈시킨다. 이러한 때를 만나 우리 유도(儒道)의 학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성현을 존중하고 연모함이 있다면 비록 그 사람의 행동이 반드시 그 당위(當爲)의 길에서 나오지 않더라도 스스로 고명(高明)하고 광대한 자리에 이르러 오듯이 성현이 남긴 교훈에 맞다면 이 또한 유학을 한 사람에게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우리 창원향교가 오랜 세월이 지나 황폐해져서 거의 지탱하기도 힘드니 고을 일사(人士)들이 앞다투어 일어나 의론을 합하고 힘을 모아서 새롭게 중수하였다. 아! 위대하도다. 다른 많은 길에 미혹되지 않음이여. 궁핍한 가운데서도 힘을 다 쏟아서 매우 지대한 노역을 잘 이루어 내었으니 이로써 옛날의 그 법도를 존하고 후임에게 모범을 보임이 능히 이와 같음이 있다.
다른 사람들 보다 어짊이 또한 깊고 크다. 내가 마침내 병들어 죽을 뻔해서 비록 제군(諸君)들과 그 노역을 함께 하지 못하였지만 마음은 지난 성인이 후인에게 연모됨이 아직 폐쇄되지 않았음을 은근히 기뻐하였다. 제군의 자존심과 명분과 교화가 여기서 가희 드러나 오래도록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지방이 비록 이래였지만 예부터 문물(文物)이 성대함이 타 지방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나의 하찮은 학문으로 다행스럽게 선대 조상들의 세계에 미치고 그 문충의 유산을 얻어 보게 되었다.
이제 그 생각으로 말미암아 마치 천고지하에 있으면서 천고지상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눈에 보이는 것마다 특별해 보이고 감개무량한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무릇 4~50년 사이에 성쇠흥망(盛衰興亡)이 서로 나누어짐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어찌 오로지 세상운세가 오르내림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또한 그 선비들이 익히는 것과 그 풍속이 숭상하는 것이 날로 미천한 곳으로 내달아도 스스로 자각할 줄 모르고 그것에 빠져드는 상황이다. 지금 제군이 이와 같은 위대한 거사를 이루었으니 더 나아가 성인의 교훈을 생각하고 존중하여 일상생활에 그것을 실천함인 것이다.
성현의 말씀을 따라 내 마음이 합당하면 이것을 실천하고 이에 어긋나면 이것을 어기게 될 것이다. 그 습속의 아름다움으로 하여금 옛것을 따르게 하여 선대의 조상에게 후배됨이 부끄럽지 않게 된 뒤에 제군이 성인의 도를 존중하는 것이 비로소 그 실질을 이루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고을이 부흥할 것이라는 바램을 여기서 점칠 수 있다. 제군들은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향교의 중수(重修)는 이교민(李敎敏)에게서 시작하여 옥기환(玉麒煥)에서 완성되었으니 두 사람 모두 전후에 교임(校任)을 맡았다. 때는 을해(乙亥, 1935)월일이다.
후학 분성 김병린(金炳璘) 삼가 쓰다.

 

*김병린(金炳璘 : 1861~1940)은 본관은 김해이고 창원 곡목 출신 유학자로 자는 겸응(謙膺) 호는 눌재(訥齋)이다. 訥齋先生文集이 있다.

 

[출처 및 참고]
역주 창원부읍지-창원문화원(2005.12.30.) 민긍기
창원향교지(하권)-창원향교(2004.11.15.) 향교지편찬위원회
창원향교 기록화 조사보고서-창원시(2013.3)

창원군지-국제신보출판사(1962) 김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