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1. 거창향교 춘풍루와 또 다른 외삼문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居昌 陽平里 石造如來立像)을 보고 나오는 길에 싸락눈이 점점 굵은 눈으로 바뀔 때 거창향교 입구에 도달했다. 거창향교는 외삼문이 2개인 것이 특징적인 향교이다. 원래 외삼문 역할을 하던 춘풍루(春風樓)라는 현판이 있는 문루는 명륜당의 출입문이고 대성전 앞에 있는 외삼문에는 이름이 없다. 내부에 들어가면 어디로던 갈 수는 있지만 외형적으로는 명륜당과 대성전이 분리된 모습을 하고 있다.
거창향교 내력
거창향교는 1415년(태종 15)에 대성전을 지었고 1572년 개수했다. 그 뒤 대성전은 1606년과 1810년에 중수했으며 동제는 1840년에 중수했다. 1574년에 명륜당을 지어 지방교육기관의 기능을 담당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23년 중건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 6현(宋朝 六賢), 동방 18현(東邦 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명륜당 안에는 1840년 군수 홍세수(洪世洙)가 지은 동재 중수기(東齋 重修記), 1870년 군수 윤직의(尹稷儀)가 지은 대성전 중수기(大成殿 重修記), 1935년 연안 이준섭(李埈燮)이 지은 명륜당 중수기(明倫堂 重修記), 회암선생의 경재잠(敬齊箴), 남당진선생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1691년 기록인 신미팔월초십일하반궁비망기(辛未八月初十日下泮宮備忘記) 등이 있다.
거창향교 춘풍루
거창읍 가지리 318-4에 있는 거창향교의 외삼문이다.
춘풍루(春風樓)는 숙종 병신년(丙申年 1716) 3월에 대성전 앞에 창건했다가 영조 무진년(戊辰年 1748) 명륜당 앞으로 이건했고, 순조 기사년(己巳年 1809) 부사 김인순(金麟淳)¹⁾이 현 위치에 중건한 이래 수 없는 개·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와가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름에는 강학과 휴식을 하는 곳이다. 누각의 편액은 안동 김문근(金汶根)²⁾이 썼다. 누각에는 다른 기문은 없고 1864년 상산 김기수(金基洙)가 지은 대성전 중수기(大成殿 重修記)가 있다.
【주석】
부사 김인순(金麟淳)¹⁾ : 생몰은 모르고, 이조판서 김수근(金洙根)과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이 그의 아들이다.
안동 김문근(金汶根)²⁾ : 조선 후기의 문신(1801~1863). 자는 노부(魯夫). 철종 2년(1851)에 딸이 왕비로 책봉되자 영은 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었고, 금위대장, 영돈령부사 따위를 지냈다. 안동 김씨 세도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춘풍루와 동제 일부에 걸린 편액
춘풍루(春風樓) 주련
中庸首謹獨 중용(中庸)엔 홀로 있을 적에 근신하라 하고,
偉哉鄒孟氏 위대하도다. 추(鄒)의 맹자(孟子)여!
丹靑著明法 단청(丹靑) 같이 밝은 법을 드러내 주셨고,
今古垂煥炳 고금(古今)의 밝은 빛을 드리워 주셨네.
顔生躬四物 안연(顔淵)은 네 가지 해선 안 되는 일을 하고,
無言道心長 말없이 살다보면 도덕적 마음이 길러진다.
안동 김문근(金汶根)이 쓴 춘풍루 현판
대성전 앞에 있는 외삼문
거창향교 춘풍루 앞에 세운 안내판에는 이처럼 기록하고 있다.
거창향교(居昌鄕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0호
거창군 거창읍 가지리 318-4
향교는 유교의 옛 성현(聖賢)을 받들면서 지역사회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미풍양속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된 전통시대의 지방교육기관이다. 거창향교는 1415년(태종 15)에 대성전이 건립된 이후 1574년(선조 7) 명륜당이 건립됨으로써 관학(官學)의 기능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를 하였으며 현재의 모습은 대략 18세기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향교의 공간은 교육과 제례의 두 영역으로 나뉜다. 유생(儒生)이 학문을 연마하는 명륜당과 일상생활을 하는 동·서재(東·西齋)는 교육기능을 담당하고 공자와 저명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大成殿) 및 동·서무(東·西廡) 제례기능을 각각 담당하고 있다.
거창향교는 완만한 경사지에 터를 잡았고 보기 드물게 명륜당과 대성전이 거의 나란히 배치[좌학우묘(左學右廟)]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는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의 위계와 권위가 떨어진다 하여 잘 사용하지 않았다. 명륜당 뒤의 공간이 넓은 것으로 보아 언제,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성전을 옮겨 지은 듯하다. 그리고 동·서무(東·西廡)도 없어 대성전을 더욱 허전하게 한다. 대성전은 높은 석축위에 건물을 세워 위엄과 함께 당당한 외관을 갖추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명륜당은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교육의 중심 공간이다. 명륜당 앞의 정면 출입구인 춘풍루(春風樓)는 유생들의 여가 및 여름철 학습공간으로 이용되었다. 누각은 기둥 아래 긴 주춧돌을 둔 탓인지 더욱 장대하게 보인다. 옆의 외삼문(外三門)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춘풍루 알래의 공간을 이용해 출입하였다.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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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와 명륜당
2018.12.11 거창향교 명륜당
明倫堂重修記
夫子之門 升堂入室 得於觀感者 言必稱夫子之道之聖 而有子總之曰 生民以來 未有盛於夫子 宣斯言之水爲天下後世尊聖衛道者 誠信第一義也 盖聖人之道 蕩蕩乎則天地之大 昭昭乎象日月之光 彌六合而無外 亘萬世而不差 究其所本所先 只是明人之彝倫 正孟子所稱 聖人人倫之至也與 是以歷代帝王 立法設敎 莫不以孔子爲師 而致崇極之意 像焉而奉之 廟焉而亨之 其在我東 自定鼎漢陽 制度浸備 建廟于太學 而殿曰大成 堂曰明倫 於州郡則爲鄕校 而一依太學 必有殿有 堂有序有膠 各自爲其鄕 首善之地也 吾州之明倫堂 在大成殿之左 行禮于斯 立綱矯風 彰善懲惡 亦皆于斯 歲序迭遷 風雨交侵 榱朽甍裂 榮霤滲漏 將及傾頹之患 經營重修 亦旣多年 而拘於事力之不敷 因循未遑矣 表斯文正埈 膺直員之選 恪供其職 而尤以堂之必修 乃已積費心算 竟得協謀于郡守李珌東 查究前日校宮所屬之貲移他用耗者 而斡旋椿管 措劃役資 遂以甲戌之歲 陽復之月 亟始董匠 竣功於翌年中春 仍基礎而愈鞏 易材瓦而盡美 敞闢軒窓 寬治堦庭 優可以絃誦飲射 拜揖進退 將使圓冠方領 濟蹌升降 莊儼整齊 宛爾列侍 誾如親承妙旨 躬奉德音 而按經率禮 育英啓蒙 以斯乎化民成俗 則匪止一鄕文風之彪蔚 宜致四方士氣之鼓動 斯堂重成 豈不大有補於世敎也哉 噫運値陽九 五道漸徵 邪說橫流 往往鬼蜮魍魎之類 抵掌翻喙 肆逞譸誑 侮聖害正 罔有紀極 而斯堂將傾 又在此際 有志人士 憂惧益深 天睠斯文 幸得直員之竭慮殫智 兼賴郡守之同意 用力克復靈光 舊扁維新 苟非尊聖衛道之誠 根乎性而發於事 鳥能然乎 堂之興廢 實關道之盛衰 後之人能信有子之言 而更追今日尊衛之誠 輒嗣而葺之 損益其制 雖於幾百世之遠 斯堂也必巋然永存 堂存則道亦存 道存則倫自明 倫旣明矣 人皆可以爲善 而禮嚴義正 化行俗美 庶幾文物制度浸浸彬郁以百里之鄕 而名可聞於天下 則斯堂乃其權輿也 安知夫欲觀夫子遺風者 不須適齊魯之都 而求髣髴於斯堂乎
孔子誕生二千四百八十六年 旃蒙大淵獻流火節 後學延原李埈燮謹記
명륜당중수기
공부자의 문하에서 승당인실(升堂入室)¹⁾하여 보고 감동한 자들은 “공부자의 도덕은 거룩하도다.”라 기필코 말로 칭송한다. 유자(有若)²⁾는 총괄해서 말하기를 “인간이 생긴 이래로 공부자보다 성대한 자가 없었다.”라 했으니 이 말씀이 천하에서 후세에 길이 성인을 존경하고 도를 지키는 자들이 참으로 믿을 으뜸가는 뜻이리라.
대게 성인의 도덕은 매우커서 천지처럼 크게 법을 삼고 맑고 맑아 일월처럼 밝음을 본 뜨고 있어 온 우주에 가득차서 밖이 없으며 영원한 세월에 걸쳐 어긋남이 없어 그 근본과 우선할 바를 연구함은 오직 인륜을 밝힘이니 참으로 맹자(孟子)께서 성인이라 일컫는 것은 인륜의 지극함이라 한 것이다. 이것으로 역대 제왕들이 법을 만들고 교육을 베풂에 공자를 스승삼아 지극히 숭배하지 않음이 없어 성상(聖像)을 마련해 받들기도 하고 성조를 지어 제향으로 드리기도 하였다.
우리 동방은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면서부터 제도가 점차 갖추어져 태학(成均館)에 성묘(聖廟)³⁾를 세웠으니 전(殿)은 대성전이요 당(堂)은 명륜당이며 고을에서 학교를 설치하되 한결같이 성균관에 의거하여 반드시 대성전과 명륜당이 있게 마련이며 『서(序)』와 『교(膠)』라는 학교가 있어서 각기 그 고장에서 선행을 앞서는 곳이 되었도다. 우리 고을의 명륜당은 대성전 왼쪽에 있어 여기서 예를 행하며 학문을 강론했고 기강을 세우고 풍속을 바로 잡으려 선행을 칭찬해 드러내고 악행을 징계하는 것도 또한 모두 여기에서 했으니 백성들은 후덕하게 되고 관리들은 청렴을 숭상하게 되니 이것이 이른바 세속을 교화하는 중추기관(中樞機關)이며 정사와 교훈의 근본이었도다.
건물의 옛 체제가 자못 크고 튼튼했지만 여러 차례 수리하고 중수했는데 그래도 해가 바뀌면서 풍우(風雨)에 시달려 목재는 썩고 기와는 깨져 처마가 새 무너질까 걱정해 중수키로 한지 이미 여러 해되었는데 사세와 재력이 펴지지 못함에 구애되어 머뭇거리면서 여가를 얻지 못하였다. 표정준(表正埈)⁴⁾ 선비께서 향교의 직원(直員)에 선임되어 그 직책에 공경스럽게 이바지하였으며 더욱 명륜당을 꼭 수리해야 하겠다는 데에 마음과 힘을 많이 쌓아 마침내 군수 이필동(李珌東)과 협력해 꾀하기로 하고 옛날 교궁(文廟)에 소속되었던 재산을 타인에게 이전해 써버린 것을 조사해 밝혀 춘관(春官)⁵⁾에서 관장토록 알선(斡旋)하였다. 사업 자금을 조처(措處)해 드디어 갑술(甲戌, 1914) 10월에 급히 시작해 장인들을 감독하여 이듬해 2월에 준공하니 기초가 튼튼하고 목재와 기와를 바꾸니 모두 아름답고 창문이 훤히 트였으며 계단과 정원이 넓게 다듬어져 악기를 타면서 글을 읽고 향음주례(鄕飮酒禮)⁶⁾와 향사례(鄕射禮)⁷⁾를 행하며 모든 행동에서 인사 예절을 행하기에 넉넉하도다. 장차 의관을 갖춘 선비로 하여금 오르내림에 제창(濟蹌)⁸⁾하고 장엄하고 가지런하여 마치 높은 어른을 모시고 늘어서서 친히 화평한 모습으로 오묘(奧妙)한 뜻을 받드는 듯하고 유덕하고 지당한 말씀을 몸소 받들어 경전을 살피고 예법을 따라 인재를 기르고 깨우쳐 백성들을 교화해 선량한 풍속을 기약할 수 있으니 거창의 한 고을에서만 학문을 숭상하는 풍습이 표울(彪蔚)⁹⁾함에만 있지 않고 사방 선비들의 사기를 마땅히 고무(鼓舞)토록 하리니 이 명륜당이 중수된 것이 세상을 가르침에 어찌 크게 도움이 있지 않겠는가.
아! 한탄스럽도다. 세상의 운수가 양구(陽九)ⁱ⁰⁾를 만나게 되어 우리 유도(儒道)가 점차(漸次) 쇠징(衰徵)해지고 그릇된 학설이 함부로 유행되고 있어 이따금 귀역(鬼蜮)¹¹⁾과 도깨비 같은 무리가 손바닥을 치며 입을 함부로 놀려 방자히 멋대로 하며 속이고 성인을 모욕하고 정도를 해쳐 기강이 없어짐이 극치에 이르렀는데 이런 때를 즈음하여 이 명륜당마저 장차 무너지려하니 뜻 있는 인사들은 근심하고 두려워함이 더욱 깊어졌는데 하늘이 우리 유학을 돌보아 주사 다행이 직원이 생각과 지혜를 다하고 겸하여 군수가 힘쓰겠다는 동의를 얻음에 힘 입어 신령스런 모습을 찾아 옛 편액(扁額)이 새로워지니 참으로 성인을 존경하고 도덕을 지키려는 정성이 성품에 근본을 두고 나타난 사실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그러하지 않을 수 있었으리.
명륜당의 흥폐(興廢)는 실로 도덕의 성쇠(盛衰)와 유관하니 후세 사람이 능히 유자(有子)의 말씀[民生以來 未有盛於夫子]을 믿고 다시 오늘에 와서 성인을 존경하고 도덕을 지키는 정성을 쫓아서 번번히 이어가며 수리하고 그 체제가 더 낫도록 하면, 비록 몇 백 세대나 멀어질지라도 이 명륜당은 높이 솟아 길이 존재하고 명륜당이 존재한다면 도덕이 또한 존재하고 도덕이 존재한다면 인륜은 저절로 밝아지고 인륜이 이미 밝아짐에 사람들은 모두 선을 행하여 예의가 엄격하며 정의롭고 교화가 행해져 세속이 아름다워져 문물제도가 거의 점차 변화에 젖어들어 빛나서, 백리 거창(百里 居昌) 고을의 명성이 천하에 소문나면 이 명륜당이 권여(權輿)¹²⁾가 되리라. 공부자의 유풍을 보려면 반드시 齊·魯(제·노)의 도읍에 가지 않아도 이 명륜당에서 비슷한 것을 얻을 수 있음을 이에 알 수 있으리라.
공부자 탄생 2486년 을해(乙亥 1939) 7월에 후학 연원 이준섭(李埈燮)이 삼가 기문을 지음.
【주석】
승당인실(升堂入室)¹⁾ : 마루에 올라 방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일에는 차례가 있음을 이르는 말
유자(有若)²⁾ : 유자(有子)는 공자의 제자 중 유약(有若)을 말하며 그의 모습은 공자와 매우 비슷하였다고 한다. 사회생활에 있어 무엇보다도 윤리와 질서를 중시하였고, 백성으로 하여금 풍족한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라고 생각한 인물이었다.
성묘(聖廟)³⁾ : 공자의 신위를 모신 사당
표정준(表正埈)⁴⁾ : 자(字)는 명숙(明淑), 호(號)는 함양재(涵養齋) 병자생(丙子生) 新昌人居 居昌 甲辰二月始謁
춘관(春官)⁵⁾ : 예조(禮曹)를 일컫는 말인데 본문의 춘(椿)은 춘(春)의 오기로 보인다.
향음주례(鄕飮酒禮)⁶⁾ : 그 고을의 유생들이 모여 향약을 읽고 읍양(揖讓)을 지키어 술을 마시며 잔치하던 일
향사례(鄕射禮)⁷⁾ : 향교에서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어 유학도덕의 풍기(風紀)를 배양하던 의식
제창(濟蹌)⁸⁾ : 시 소아(詩 小雅) 초자편(楚茨篇)의 『제제창창(濟濟蹌蹌-몸가짐이 위엄이 있고, 위풍을 떨치며 질서가 정연함)』에서 유래하여 『예모(禮貌) 있고 공경스런 모습』을 말함
표울(彪蔚)⁹⁾ : 문체가 명성(明盛)한 모습.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유래.
양구(陽九)ⁱ⁰⁾ : 한서(漢書)에서 유래하는데 양의 재앙(災殃) 오(五)와 음의 재앙 사(四)를 합한 구(九)로 재앙의 뜻
귀역(鬼蜮)¹¹⁾ : 시전 소아(詩傳 小雅) 하인사편(何人斯篇)에서 유래하며 음험지인(陰險之人)을 말함. 음험하게 남을 해치는 악의 화신
권여(權輿)¹²⁾ : 시전 진풍(詩傳 秦風) 권여편(權輿篇)에 나오며 『사물의 시작』이란 뜻. 저울을 만들 때는 저울대부터 만들고 수레를 만들 때는 수레 바탕부터 만든다는 데서 유래한다.
居昌鄕校(거창향교) 명륜당(明倫堂) 주련
己所不欲 勿施於人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
愛親敬長 隆師親友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스승을 높이고 벗을 사귀는 도리를 배우다.
博學審問 明辨篤行 널리 배우며 살펴 물으며 삼가 생각하며 밝게 분별하며 돈독히 행하니라.
言忠行篤 臨深履薄 말이 성실하고 행동은 독실하며 깊은 곳에 임하듯 하며 얇은 얼음을 밟듯이 세심 주의해라.
整齊嚴肅 直內方外 가지런하고 엄숙히 하면서, 마음을 곧게 가지며 행동은 바르게 한다.
懲忿窒慾 遷善改過 성냄을 경계하고 욕심을 막으며 지난 허물을 고쳐 선함으로 옮겨라.
거창향교 동재
居昌鄕校(거창향교) 동재(東齋) 주련
半畝方塘一鑑開 반이랑 네모 연못이 거울처럼 열리니
天光雲影共排徊 하늘빛 구름그림자 이 연못에 함께 떠 있네.
問渠那得淸如許 묻노니 이 연못이 이리 맑은 까닭은
爲有源頭活水來 샘에서 맑은 물이 계속 흘러나오기 때문이라네.
거창향교 서재
居昌鄕校(거창향교) 서재(西齋) 주련
苟日新日日新又日新 진실로 하루 새롭기를 하루하루 새롭기를 또 하루 새롭기를
物有本末事有終始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
德者本也財者末也 덕은 근본 되는 것이고 재물은 말단 되는 것이다.
外本內末爭民施奪 근본을 밖으로 하고 말단을 안으로 하면, 백성을 다투게 하여 빼앗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財聚則民散財散則民聚 재물이 모이면 곧 백성들이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면 곧 백성들이 모인다.
維命不于常道善則得之 "이치는 변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선하면 도를 얻을 것이다.
명륜당에서 바라 본 춘풍루
거창향교 대성전 모습
大成殿重修記
三代之盛 國有學 術有序 黨有庠 家有塾 春秋敎以禮樂 冬夏敎以詩書 修己治人之方 養老勸農之政 皆出於學 此學校之所以設也 記曰 太學始敎皮弁祭菜 示敬道也 古者士之見師 以菜爲摯 故始入學者 必釋菜以禮其先師 此禮之所由來者尙矣 自吾夫子以後 天下莫不宗焉 尊以爲先聖 又取其門人之高弟 以爲先師而配焉 凡學於學校者 其可不慥慥于學以事先聖先師乎 我東自京師至州縣 皆入學 宗事先聖 春秋匪懈菁莪 敎育之化 俎豆升降之儀 庶無愧乎三代 而士氣以之彬郁風俗以之純美 鳴乎盛矣 今年春余司牧是府 祗謁先聖 聖殿之棟宇椽桷 爲風雨朽剝 不可以架漏支也 退而按舊蹟 盖聖朝重創 在崇禎丙午 而公私典籍 盡人於壬癸兵燹 其後癸亥 又重葺之 而距今爲百二十八年之久矣 遂與齋任進士金基漢曁諸章甫 亟謀重建 材瓦役費 算劃已定 於是用三月契龜 至七月而工告訖 位置依舊 丹碧炫耀 以至東西兩廡及明倫堂春風樓之不能不待人力者 一切繕修 噫是役也 時絀擧嬴 難於剋期竣事 而工効其能民忘其勞 纔閱五個月 而殿宇翼翼煥然改覩 豈造物者陰相之而然歟 奉安之日 與多士落之 乃言于衆曰 於乎我國家治敎休明 文風蔚然 興學聚士 日夕刮磨 將以學孔子也 聖人之德 與天地同其大 不德其門而人 不見宗廟之美百官之富 得其門者寡矣 然行遠必自邇 登高必自卑 從事於斯 不求驟躐 務循階級 則升堂入室 其在是矣 儘乎廟者貌也 奔走周旋之際 洋洋如在 則怳若親炙 而觀感者乎 然則今日廟宇之重新 不徒爲觀美而已 則吾黨藏修之工 庶乎賁飾 右文之治 可不休哉 可不勉哉 僉曰 命之矣 因叙其重修之顚末 以徵諸後
崇禎紀元後四庚午孟秋下澣知府坡平尹稷儀謹記
대성전중수기-거창향교
하·은·주(夏·殷·周) 삼대가 흥할 때에 나라에는 학교가 있었고, 술(術)¹⁾에는 서(序)²⁾가 있었으며 당(黨)에는 상(庠)³⁾이 있었고, 가정에는 숙(塾)이 있어, 봄·가을로는 예악(禮樂)을 가르쳤고 겨울·여름에는 시서(詩書)를 가르쳤으니 수기치인(修己治人)⁴⁾의 방법과 노인을 받들고 농업을 권장(勸獎)하는 정책이 모두 그 배움에서 나왔으니, 이것이 학교를 설립한 소이연(所以然:그렇게 된 까닭)이다. 예기(禮記)의 학기(學記)에 가로되 『대학에서 가르침을 시작할 때 피변(皮弁)⁵⁾을 갖추고 나물로 선사께 제사지낸 것은 그 도를 공경함을 보임이라』했으니 옛적에 선비가 스승을 뵘에 나물로 폐백(幣帛)을 삼았으므로 처음 입학한 자는 반드시 나물을 마련해 그 선사께 예를 표했으니 이것이 예(禮)가 유래한 바이며 숭상하게 된 것이다.
우리 공부자(孔夫子) 이후로부터 천하에서 공자(孔子)님을 종사(宗師)로 삼지 않는 이가 없어 선성(先聖)으로 높였으며, 또 그 문인 중에 고족제자(高足弟子)를 취하여 선사로 삼아 배향(配享)하니 무릇 학교에서 공부하는 자 학문에 정성스럽지 않을 수 있겠으며, 선성과 선사를 받들지 않을 수 있으리오.
우리 동국(東國)은 서울에서 고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교를 세워 선성(孔子)을 종사로 받들어 춘추로 게으름 없이 인재를 교육하여 교화됨과 예의(禮儀)로운 모습이 하·은·주(夏·殷·周) 삼대시절에 비해도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사기가 빛나고 풍속이 참으로 아름다워졌으니 아! 성대했도다.
금년(1870) 봄에 내가 이 고을을 맡게 되어 선성을 공경히 배알했는데 성전(大成殿)의 동우(棟宇)와 서까래가 풍우(風雨)에 썩어 물이 새는 것을 버틸 수 없더라. 물러나 옛 자취를 살펴보니 대성전을 창건한 것이 숭정(崇禎) 병오(丙午, 1606)에 있었는데 공청(公廳)이나 사가의 사적들이 임진·계사(壬辰·癸巳) 왜란(倭亂)의 병화로 다 없어졌으며, 그 뒤 계해(癸亥, 1743)에 또 거듭 수리했는데 지금부터 128년이나 오래 되었다. 마침내 재임(齋任)⁶⁾으로 있던 진사 김기한(進士 金基漢) 및 여러 유생[章甫]들과 함께 중건할 것을 서둘러 모의하여 목재·기와·공역비 등을 계산하여 이미 정하고 이에 3월에 계구(契龜)⁷⁾하여 7월에 이르러 공사를 마치게 되니 위치는 옛 그대로이며 단벽(丹碧-丹靑)은 밝게 빛나도다. 동·서양무(東·西兩廡)와 명륜당과 춘풍루에 이르기까지 사람 손을 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모두 수선(修繕)하니 시출거영(始絀擧嬴)⁸⁾하여 기일(期日)에 능히 일을 마치기가 어려웠는데 공인(工人)들이 능력껏 힘썼고 백성들은 수고로움도 잊어버려 겨우 5개월 지내면서 성전건물의 모습이 정돈(整頓)되고 환하게 빛이 나서 다시 보니 어찌 조물주(造物主)께서 몰래 도우심이 아니겠는가.
봉안하는 날에 여러 선비들과 함께 낙성식(落成式)을 하면서 대중들에게 말씀해 가로되 『감탄스럽도다! 우리나라는 정치와 교육이 매우 밝고 문학을 숭상하는 기풍이 왕성하여 학교를 일으켜 선비를 모음에 낮과 밤으로 갈고 닦아 장차 공자(孔子)를 배우려 하도다. 성인의 덕은 천지와 더불어 크기가 같아 그 문호로 들어가지 않으면 종묘(宗廟)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넉넉함을 볼 수 없는데 그 문호를 얻은 자 적도다. 그러나 먼 곳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부터 시작해야 하고 높은 곳을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곳부터 시작해야 하니 이처럼 종사하며 뛰어넘으려 하지 말고 계단(階段)을 따라가기에 힘쓴다면 승당입실(升堂入室)⁹⁾함이 여기에 있으리라. 대성전 중수에 힘을 다한 것은 겉모습이리라. 바쁘게 주선(周旋)할 즈음에 성대한 공부자의 모습이 살아계신 듯이 황홀하여 마치 몸소 가르침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있도다. 그러니 오늘 건물이 중수되어 새로워 진 것은 다만 보기에 아름답게 하는 데만 그칠 것이 아니고 보면, 장수유식(藏修游息)¹⁰⁾하며 공부(工夫)하면 아름답게 꾸밈에 가까워지리니, 학문을 숭상토록 다스림에 아름답지 않겠으며 힘쓰지 않으리오.』함에 대중 모두가 『하늘 뜻에 맞는 말씀입니다.』라 했다. 인하여 중수전미(重修顚未)에 관해 서술해 후인들에게 징험토록 하노라.
숭정 기원 이후 네 번째 경오(庚午, 1890) 맹추(7월) 하한[下澣(下旬)]에 부사 윤직의(尹稷儀)¹¹⁾가 삼가 씀.
【주석】
술(術)¹⁾ : 1,000가호(家戶)의 마을.
서(序)²⁾ : 은(殷)나라의 학교
상(庠)³⁾ : 주(周)나라의 시골 학교
수기치인(修己治人)⁴⁾ : 자기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것으로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치(爲人之治)가 되겠음.
피변(皮弁)⁵⁾ : 사슴가죽으로 만든 모자.
재임(齋任)⁶⁾ : 사학(四學), 성균관, 향교 등지에서 숙식하면서 일을 보던 유생(儒生)이다.
계구(契龜)⁷⁾ : 시전 대아 금편(詩傳 大雅 綿編)의 『애시애모 애계아구(愛始愛謀 愛契我龜)』에서 유래하며 『처음 계획을 시작할 적에 거북으로 점을 쳐보다.』의 뜻이다.
시출거영(始絀擧嬴)⁸⁾ : 사기 한세가(史記 韓世家)에서 유래하며 시대가 쇠퇴하고 힘이 없어지며 사치(奢侈)로움을 말함.
승당입실(升堂入室)⁹⁾ : 논어 선진편의 『유야승당의 미입어실야(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에서 유래하는데, 『자로의 학문이 이미 정대하고 고명한 경지에는 이르렀으나 오묘하고 정징(精徵)한 경지의 깊은 곳은 이르지 못함을 비유한 것으로 입도(入道)의 차제(次第)를 나타낸 말임.』
장수유식(藏修游息)¹⁰⁾ : 장이란 마음에 항시 학업을 생각함이요, 수란 수습(修習)을 폐하지 않음이요, 유란 일없이 한가하게 노닐 때에도 마음이 학문에 있음이요, 식이란 일을 하다 쉴 때에도 마음이 학문에 있음을 이른 것이니, 군자가 학문에 있어서 잠시도 변함이 없음을 말한다.
윤직의(尹稷儀)¹¹⁾ : 파평(坡平)이며, 부(父)는 윤복(尹墣)이며, 생부(生父)는 윤영명(尹永明)이다. 자(字)는 명시(命時)이고, 무진(戊辰) 1808년 (순조 8) 생이다. 아들 윤익(尹瀷)이 있다.
[진사] 철종(哲宗) 1년(1850) 경술(庚戌)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41위
거창향교 대성전 모습
거창향교 제기고
夙興夜寐箴
南塘陳先生
鷄鳴而寤 思慮漸馳 盍於其間 擔以整之 或省舊愆 或紬新得 次第條理 瞭然黙識
本旣立矣 昧爽乃興 盥櫛衣冠 端坐斂形 提掇此心 皦如出日 嚴肅整齊 虛明靜一
乃啓方冊 對越聖賢 夫子在坐 顔曾後先 聖師所言 親切敬聽 弟子問辨 反覆參訂
事至斯應 則驗于爲 明命赫然 常目在之 事應旣已 我則如故 方寸湛然 凝神息慮
動靜循環 惟心是監 靜存動祭 勿貳勿參 讀書之餘 間以游詠 發舒精神 休養情性
日暮人倦 昏氣易乘 齋莊整齊 振拔精明 夜久斯寢 齊手斂足 不作思惟 心神歸宿
養以夜氣 貞則復元 念玆在玆 日夕乾乾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남당진선생
닭이 울어 잠에서 깨어나면 생각이 일게 되니 그 사이에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혹은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모아 차례와 조리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근본이 확립 되었으면 새벽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옷을 갖추어 입고 단정하게 앉아 몸을 가다듬는다. 마음을 끌어 모으되 밝게 떠오르는 햇살처럼 해야 한다. 몸을 엄숙하고 가지런히 정돈하여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한결 같아야 한다.
책을 펴서 성현을 대하게 되면 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회와 증자가 앞뒤에 있을 것이다. 성현께서 말씀하신 것을 친절하게 귀담아 들어 제자들의 질문과 변론을 반복하고 참고하여 바르게 고쳐야 한다.
일이 생겨 대응할 경우에는 실천으로 증명해야 한다. 밝은 천명은 빛나는 것이니 항상 눈을 거기에 두어야 한다. 일에 대응하고 나면 예전과 같이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을 모아 사사로운 생각을 멈추게 해야 한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순환하는 것을 오직 마음만은 볼 수 있으므로 고요할 때 이 마음 잘 보존하고 움직일 때 관찰하여 마음이 둘 셋으로 나뉘어서는 아니 된다. 글을 읽다가 틈이 나면 간혹 휴식을 취하고 정신을 활짝 펴서 성정을 아름답게 길러야 한다.
날이 저물어 사람이 피곤해 지면 나쁜 기운이 들어오기 쉬우므로 몸과 마음을 잘 가다듬어 정신을 맑게 이끌어야 한다. 밤이 깊어 잠을 잘 때는 손발을 가지런하게 모아 아무 생각을 하지 말고 마음과 정신을 잠들게 해야 한다.
밤의 기운으로 마음과 정신을 잘 기르면 정이 다시 원으로 돌아 올 것이다. 이것을 항상 생각하고 마음에 두어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야 한다.
辛未八月初十日下泮宮備忘記
噫 設庠序學校 以養四方之士者 蓋爲其講劘正學 擇善修身 本乎人倫 明乎物理者也 豈徒作文干祿而已哉 昔 顓孫師 學于祿 子曰 多聞闢疑 愼言其餘 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 則寡悔 誠能學之博 擇之精 守之約 財祿不干而自至矣 豈非萬世之格言耶 窃觀 比來 世降俗末 士習不古 經明行修 曉達治體者少 而尙文辭 遺經業趨祿利者 滔滔皆是 斯豈惟我祖宗 興學作人之本意哉 余於此 未嘗不爲世道 發一慨也 仍記 昔 安定胡公 嘗爲蘇湖敎授孜孜矜飭 其弟子之辭氣 異乎常人 矧伊濟濟章甫密邇尺五 上下情志 靄然流通 誘掖激勵 寧不在玆 咨爾多士敬聽予訓 服膺 勿失漸摩 成就則其爲國家斯文之幸可勝言哉 亶出心腹 宜各猛省
신미팔월초십일하반궁¹⁾ 비망기²⁾ (1691년 음력 8월 10일 성균관에 내린 비망기)[해문-이현호]
아! 상(庠)․서(序)․학(學)․교(校)³⁾를 설치하여 사방의 선비를 기르는 것은 대개 정학⁴⁾을 연구하여 착한 것을 가리고 몸을 닦아서 인륜에 근본하고 물리에 밝게 함을 위한 것이다. 어찌 다만 글을 짓고 녹(祿)을 구하기만 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예전에 전손사(顓孫師 : 공자의 제자. 자는 子張임)가 녹을 구하는 법을 묻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많이 들어서 의심스러운 것을 빼버리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말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고, 많이 보아서 위태롭게 여기는 것을 뻬 버리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행하면 후회가 적을 것이다.” 하였다. 참으로 배우는 것이 넓고 가리는 것이 정밀하고 지키는 것이 간략한 것일 수 있다면, 녹은 구하지 않아도 절로 올 것이니, 이것이 어찌 만세의 격언(格言)이 아니겠는가? 요즈음 가만히 살펴보건대, 세상이 갈수록 풍속이 쇠퇴해져서 선비의 버릇이 예전만 못하여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닦아 치체(治體)를 잘 아는 자는 적고, 문사(文辭)를 숭상하여 경학을 버리고 녹리(祿利)를 좇는 자가 많으니, 어찌 우리 조종(祖宗)께서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는 본의이겠는가? 이에 나는 일찍이 세도(世道)를 위해 개탄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로 인해 기억해 보건데, 옛적에 호안정공(安定胡公, 중국 宋代 胡瑗. 안정은 호)이 소호(蘇湖)의 교수(敎授)이었을 때에 부지런하고 신중하게 하여 그 제자의 말과 표정이 여느 사람과 달랐는데, 더구나 저 재주가 많은 여러 선비가 아주 가까이 있어 위아래의 뜻이 온화하게 유통하니, 앞에서 이끌어 주고 옆에서 도와주며 격려하는 것이 어찌 여기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아아, 너희 여러 선비는 내 가르침을 공경히 들어 잘 지켜서 잊지 말고 점점 연마하여 성취하면, 그것이 국가와 사문(斯文)의 다행임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진실하게 마음을 내어 마땅히 각각 열심히 성찰하도록 하라.
【주석】
반궁¹⁾ : “벽옹(辟雍)은 물이 둘러싼 모양이 벽옥(璧玉)처럼 둥글고 반궁(泮宮)은 벽옥의 절반 모양이니, 물이 절반을 둘러싼 것이니 동문과 서문에서 남문으로 물이 통하고 북쪽에는 물이 없다.”[“辟雍, 水環如璧, 泮宮半之, 蓋東西門以南通水, 北無水也.”] 《禮記 王制》
비망기²⁾ : 임금의 명령서
상(庠)․서(序)․학(學)․교(校)³⁾ : “옛날 교육하던 곳으로는 마을에는 숙이 있고, 고을에는 상이 있고, 지방에는 서가 있고, 나라에는 학이 있었다.〔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州有序 國有學〕”라고 하였다. 《禮記 學記》
하 은 주 삼대(三代)의 교육기관으로, 《맹자》 〈등문공 상〉에서 “‘상’은 봉양한다는 뜻이요, ‘교’는 가르친다는 뜻이요, ‘서’는 활쏘기를 익힌다는 뜻이다. 하나라는 ‘교’, 은나라는 ‘서’, 주나라는 ‘상’이라고 불렀으며 ‘학’은 삼대가 이름을 함께하였다.〔庠者 養也 校者 敎也 序者 射也 夏曰校 殷曰序 周曰庠 學則三代共之〕”라고 하였다.
정학⁴⁾ : 유학(儒學)
敬齊箴(경제잠)
晦菴先生(회암선생)
正其衣冠 尊其瞻視 의관을 바로 하고 존경하는 눈빛을 띄도록 하라.
潛心以居 對越上帝 마음을 가라앉혀 상제를 앞에 모시고 살듯 하라.
足容必重 手容必恭 걸음걸이는 무겁게 하고 손의 자세는 공손하게 하라.
擇地而踏 折旋蟻封 땅을 골라 밟되 개미 둑에서도 피해 돌아가듯 하라.
出門如賓 承事如祭 문을 나서면 손님 대하듯, 일을 처리 할 때는 제사를 드리듯 하라.
戰戰兢兢 罔敢或易 조심조심 두려워하여 잠시도 안이하게 말라,
守口如甁 防意如城 입을 지키기를 병(甁) 입을 막듯하고, 뜻 지키기를 성문 지키듯 하라.
洞洞屬屬 罔敢或輕 성실하고 진실하여 감히 잠시도 경솔히 하지 말라.
不東以西 不南以北 서쪽으로 간다 하고 동쪽으로 가지 말며, 북쪽에 간다 하고 남쪽으로 가지 말아라.
當事而存 靡他其適 일에 당하여 오직 한 곳에만 마음을 집중하고 다른데로 마음이 가지 않도록 해라.
弗貳以二 弗參以三 두 가지 일이라고 마음을 두 갈래로 하지 말고, 세가지 일이라고 마음을 세 갈래로 하지 말라.
惟心惟一 萬變是監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펴 보라.
從事於斯 是曰特敬 이와 같이 일에 임하는 것이 敬(경)을 지니는 것이다.
動靜弗違 表裏交正 움직일 때나 멈추어 있을 때 그 사이에도 서로 어기지 말고 밖이나 안이나 서로 바르게 하라.
須臾有間 私欲萬端 잠시라도 틈이 나면 만 가지 사욕이 일어난다.
不火而熱 不氷而寒 불로도 데워지지 않고 얼음으로도 차가워지지 않으니
毫釐有差 天壤易處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자리를 바꿀 것이다.
三綱旣淪 九法亦斁 삼강이 이미 빠졌고 구법 또한 무너지니.
於乎小子 念哉敬哉 오오! 소자여! 생각하고 공경하라.
墨卿司戒 敢告靈臺 묵경이 경계를 삼아 감히 마음에 고하노라.
출처 및 참조
거창의 누정-거창문화원(1998.12)/박기용
거창군사-군사편찬위원회(1997.6)/금창인쇄사
거창향교 앞 안내판
거창읍지-거창읍지편찬위원회(2011.12)/금창인쇄사
거창향교지-거창향교(2002)
한국 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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