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봉수대

사천 곤양 우산봉수를 찾아

천부인권 2018. 12. 30. 11:20



2018.12.27. 곤양 우산봉수


옛 곤양군(昆陽郡) 우산봉수(牛山烽燧)가 있는 곳의 현재 지명은 남산(南山)이다. 사천시 곤양면의 동남쪽 방향에 위치한 이 남산을 끼고 무고천이 흐르고 곤양면의 북쪽을 돌아 나오는 곤양천이 남산의 북쪽 끝 지점에서 만나 남산을 휘돌아 감으며 사천만으로 들어간다. 이 남산의 가장 높은 정상부에 『사천 곤양 우산봉수(泗川 昆陽 牛山烽燧)』가 위치한다. 우산봉수대는 위도 35°03′07″N 경도 127°57′57″E에 위치하며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111m를 기록하고 GPS고도계는 126m라 기록 했고, 산림청에서는 105m라 기록하고, 사천시사 곤양향토사에는 133m라 기록하고 있다.




2018.12.27 남해고속도로 아래의 좁은 굴다리를 통과해야 한다.


네비에 주소를 입력하고 가니 곤양면의 남쪽 고속도로와 접한 곳에 설치한 쉼터공원 사이를 지나, 고속도로 아래로 지나는 좁은 굴다리를 통하여 무고천 옆의 시멘트 도로로 안내를 한다. 무고천을 건너면 더 이상 도로는 없고 남산공원 안내도가 봉수대가는 방향을 알려 준다.




무고천 입구에 설치된 남산공원 안내도



등산로에서 만난 4거리


남해 납(원)산봉수

남해 설흘(소흘)산봉수

남해 미조 망운산봉수


남해 금산봉수


창선도 대방산봉수


사천 각산봉수


사천 안점산봉수

사천 우산봉수

 ⇔

 진주 망진산봉수



진주 광제산봉수 ⇔ 단성 입암산봉수 ⇔ 삼가 금성산봉수 ⇔ 합천 소현봉수 ⇔ 거창 금귀산봉수 ⇔ 거창 거말흘산봉수 ⇔ 상주 지례현 구산봉수




우산봉수의 북쪽사면에 자라는 시누대



봉수대에 오르는 계단과 봉분형태


우산봉수(牛山烽燧)는 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 되었으며 주소는 사천시 곤양면 남문외리 산 1이다. 1994년에 복원한 봉수의 둘레는 약 50m 정도이고 방호벽의 높이는 70cm, 폭 50cm, 등산로의 방향을 따라 3곳의 출입구가 있다. 방호벽의 가운데에 높이 1m로 돌을 쌓은 후 커다란 봉분모양으로 약 2m정도 높이고 그 위에 연통을 설치한 특이한 모습이다. 연통이 있는 상부로 가려면 동북쪽으로 나 있는 부채꼴 모양의 돌계단을 지나야 하는데 돌계단에는 성혈(性穴)이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봉분의 경사면에 묻혔다 드러난 돌에는 사람의 이름을 엉성하게 기록한 것도 보인다.




방호벽 안쪽의 봉수대 모습


사천시사의 봉수(烽燧)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세종실록지리지>가 나온 약 15년 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안점(鞍岾)봉화가, 곤양군은 우산(牛山)봉화가 새로 등재되어 있다. 따라서 사천지방의 봉수대는 세조 연간에 재정비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곤양의 우산봉수는 곤양의 남쪽 2리에 위치하고, 초기(初期)봉화로서 동쪽으로 진주각산봉수에 상응한다. 그런데 곤양읍지에는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수대 연통이 위치한 곳을 오르는 계단에 새겨진 성혈들


우산봉수가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는 곳은 <경상도속찬지리지>이고,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 되고 있지만 1899년에 편찬한 『곤양군읍지』에는 우산봉수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볼 때 1889년 이전에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우산봉수가 대응하거나 보고하는 다른 봉수의 기록이 없고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진주 각산에 응한다.”라 기록하고 다시 보고하는 봉수의 기록이 없다. 추증컨대 진주 망진산봉수에도 보고했을 것이다.




연대에 올라서 본 연통의 흔적과 주위 풍경


산림청 홈페이지에는 사천 우산봉수(연변봉수)에 대해 이처럼 기록했다.
현재 봉수는 1994년 복원했는데 연대는 조선 왕릉의 봉분 같은 형태다. 연대 둘레는 약 50m 정도다 우산봉수는 조선전기 발간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기록된 내용은 곤양현 남쪽에 있으며 처음으로 봉수를 올렸던 곳으로 전했다. 봉수의 운영은 일찍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봉수대 가는 길은 곤양 IC에서 좌회전 해 100m 거리에 오리식당에서 자동차를 주차하고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20분 거리에 있다. 등산로주변에는 대나무 숲이 군락을 이뤘다.




계단을 올라 본 연대 모습


이곳 곤양 우산봉수의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었다.
사천 우산봉수대(泗川 牛山烽燧臺)
경상남도 기념물 제176호
사천시 곤양면 남문외리 산 1


봉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밤에는 횃불[烽]로, 낮에는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 이다. 이 제도는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상으로 고려 중기(12, 3세기)에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였다. 봉수대는 각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산꼭대기 중에서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평시에는 하나의 불꽃이나 연기[一炬또는 一煙],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둘, 적이 해안에 근접해 오면 셋, 바다에서 적과 접전이 이루어지면 넷, 적이 육지에 상륙했을 경우에는 다섯 개의 불꽃이나 연기를 피워 올렸다.
조선 세종(世宗) 때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이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 중에서 동래 다대포(東萊 多大浦)에서 시작하여 서울에 이르는 제2 봉수로에 속하였다. 이곳 봉수대는 전통적인 통신 수단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로서 1994년에 그 일부가 복원 되었다.




나무 사이로 바라 본 사천 각산 봉수대 모습


신증 동국여지승람 곤양군(昆陽郡)에 기록된 봉수
[牛山烽燧 東應晉州角山] 우산봉수 동쪽으로 진주 각산에 응한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진주목(晉州牧)의 각산봉수의 기록을 보면
[角山烽燧 在州南七十六里南應臺方山西應昆陽牛山北應泗川鞍岾]
각산봉수 주(州) 남쪽 76리에 있다. 남으로 대방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곤양 우산에 응하며, 북쪽으로 사천 안점에 응한다.




곤양군읍지(昆陽郡邑誌, 1899) 회화식 그림에 우산에 봉수가 없다.


곤양군읍지(昆陽郡邑誌, 1899)의 지도를 보면
1890년대 말에 편찬된 경상남도 『곤양군읍지』<奎 10860>에 수록된 지도. 북쪽을 위로 그렸고, 동서로 길게 배치한 회화식 지도이다. 산과 하천은 간략하게 그렸으며 바다는 비늘무늬로 파도를 표현하였다. 읍치를 다른 부분보다 대축적으로 그려 강조하였다. 읍성의 석축과 성문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으며 내부에는 관아 건물과 사창(司倉), 군기고(軍器庫)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읍치 동쪽에 향교(鄕校), 서쪽에 사직단(社稷壇)과 성황단(城隍壇)이 위치해 있다. 동북쪽의 소곡면(所谷面)에는 세종과 단종 두 임금의 태실(胎室)이 크게 부각되어 그려져 있다. 서북쪽 끝에는 인근 여러 고을의 세곡(稅穀)이 모이던 노량창(露梁倉)이 보인다. 남산인 우산에는 봉화의 흔적이 없다.


출처 및 참조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Ⅳ-고전국역총서43/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32권(1971.2.20.)
곤양군읍지(昆陽郡邑誌, 1899)
산림청 홈페이지
경상도속찬지리지
사천시사 - 봉수(烽燧)/곤양향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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