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봉수대

진주 광제산봉수를 찾아

천부인권 2018. 12. 31. 08:44

 

2018.12.29. 남쪽 덕곡마을에서 본 광제산봉수

 

하늘이 맑고 바람도 조금 부는 날이라 산정에서 먼 곳을 관망하기 좋은 날씨이다. 아침에 광제산봉화가 있는 광제산(光濟山, 해발 420m)으로 출발했다. 네비에 ‘진주시 명석면 덕곡리 503-1’을 입력하고 국도2호선을 따라 갔다. 네비의 안내가 끝나면서 곧장 네비에도 없는 임도를 따라 광제산을 등산하기에 가장 가까운 지점인 ‘진주시 명석면 덕곡리 산 10’의 덕곡고개까지 오르니 산불감시원의 차량이 주차를 하고 있어 선택이 잘 됐음을 알게 됐다. 덕곡고개에는 바람이 몹시 불어 차 안에서 고도를 재어보니 「위도 35°16′15″N 경도 128°01′01″E」로 높이는 227m이다.

 

2018.12.29 덕곡고개 풍경

 

등산로 앞에는 외율지구 임도신설비가 서있고 그 앞에 둥근형태의 막돌이 쌓여 있어 옛 고갯길의 성황당인지 궁금했다. 잡목으로 만든 계단을 오르니 약 300m 정도는 상당한 오르막이다. 가파른 등산로를 오르고 나니 구조대 표지(광제산-8)가 있는 첫 번째 봉우리까지는 그리 힘들지 않고 갈 수 있다. 이곳에서 눈앞에 다가 온 광제산 정상이 잡목 사이로 보인다.

 

광제산 정상부의 대나무

 

마지막 오르막으로 가는 길은 대나무가 능선좌우에 도열을 하고 있다. 광제산의 정상부 서남쪽에도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봉수대와 대나무에서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 거리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산불감시를 하는 분은 조선시대에 지진이 많이 나서 봉수대 근처에 대나무를 심었을 거라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평시의 봉수군은 감시하는 일 외에 특별히 다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한가한 시간에 조선시대 생활의 필수품들을 대나무로 만들어 내다 팔았을 가능성이 많다. 봉수군의 생활이 넉넉하지도 않았을 것이므로 시간이 날 때마다 생활제품을 만들어 집안에 도움을 줬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봉수대가 있는 곳에는 대나무가 있는 곳이 많다.

 

광제산봉수와의 첫 대면

 

조선시대에는 도시의 물류이동을 위해 바다가 없는 지역은 뱃길의 확보를 위해 월경지(越境地)라는 이름의 독립된 땅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사천시 각산과 늑도, 창선도가 진주목의 월경지였다. 당시 진주목의 월경지에 설치한 사천 각산봉수와 창선도 대방산봉수는 진주에서 관리를 하였다.

 

광제산봉수의 남쪽면에서 본 모습

 

420m의 광제산에 오르면 동으로는 함안 여항산이 조망되고 가까이는 월아산이 솟아 있다. 서쪽을 바라보면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구름을 삿갓처럼 쓰고 있어 신비로움을 더하고 단아한 웅석봉은 크기에서 압도를 한다. 남쪽을 바라보니 사천 바다가 은빛으로 반짝이고 금오산을 비롯하여 남해도의 망운산, 호구산, 금산이 도열하듯 위세를 뽐낸다. 북쪽을 바라보니 의령 한우산과 합천 황매산, 거창 황석산이 우람하게 솟아 있다. 한없이 펼쳐진 산하 사이에 가끔 인간 세상의 도시가 숨은 듯 모습을 보인다. 사방의 경계가 막힘없이 확 트인 이런 풍경은 광제산이 처음이다.

 

광제산봉수의 남동쪽에서 본 모습

 

광제산봉수(廣濟山烽燧)에서 남으로 망진산봉수(望晉山烽燧)까지 직선거리로 12.08km이고, 북으로 입암산봉수(笠巖山烽燧)까지 9.69km이다.

 

광제산봉수 남동쪽에서 본 전경

 

진주 광제산봉수(廣濟山烽燧)에서 고도계 사용을 잠시 잊고 그냥 하산했다. 지도로 광제산 정상부를 찾으니 위도 35°16′36″N 경도 128°01′19″E이며 표지석에는 높이가 420m라 기록하고 있다. 진주시 명석면 덕곡리 산1번지에 위치한 광제산봉수(廣濟山烽燧)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158호이다.
이곳 안내표지판에는 이렇게 적었다.
『봉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밤에는 횃불[烽]로, 낮에는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 이다. 이 제도는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사용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기록상으로 고려 중기(12, 3세기)에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들어서였다. 봉수대는 각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시야가 확 트인 산꼭대기 에 설치하였다. 조선초기에 설치된 이곳 봉수대는 조선 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烽燧路) 중에서 동래 다대포에서 시작하여 서울에 이르는 제2봉수로에 속하는 곳이다. 이곳은 남으로 망진산, 북으로 산청군 단성면의 입암산 봉수와 서로 연결 되었다. 불구덩이(火口)와 돌로 쌓은 축대 등 일부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발굴을 통하여 복원하였다.』

 

연통으로 가는 계단이 있는 곳

 

3개의 연통과 자연 암반 위의 표지석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1425) 진주도(晉州道) 진주목관(晉州牧官) 봉화조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望津山烽火 在州南七里 許南望泗川縣地 城隍堂烽火 相去十八里五十九步 北望光濟山烽火 相去二十五里二百八十步 自光濟山烽火 北望珎 城兼丹溪縣地 笠巖烽火相距二十五里 角山鄕主山烟臺烽火 在州南四十五里 許東望固城縣 西佐骨山烽火 相去五十三里一百二十二步 北望泗川縣地 針枝烽火 相去二十六里一百十一步 南望金良部曲地 陽芚山烽火 相去水路六十里 自陽芚山烟臺烽火 南望南海島望雲山烽火 相去三十五里 西望州地 桂花山烽火 相去二十七里三百四十三步 自桂花山烟臺烽火 西望全羅道件代山烽火 相去水路十五里]
망진산봉화 주의 남쪽 7리에 있다. 남쪽 사천현 땅 성황당봉수에 나아가고 서로의 거리는 18리 59보이다. 북쪽의 광제산봉화는 서로의 거리는 25리 280보이고, 광제산봉화는 북쪽의 단계현의 성을 겸한 땅 입암봉화와 서로의 거리는 25리이다. 각산향주산 연대봉화는 주의 남쪽 45리에 있다. 동쪽으로 고성현에 나아가고 서좌골산봉화와 서로의 거리는 53리 122보이다. 북쪽으로 사천현 땅 침지봉화와 서로의 거리는 25리 111보이고, 남쪽의 금량부곡 땅 양둔산봉화와 물길로 서로의 거리는 60리이다. 양둔산연대봉화는 남쪽 남해도 망운산봉화와 서로의 거리는 35리이고, 주의 서쪽 땅 계화산봉화와는 서로의 거리가 27리 343보이다. 계화산연대봉화는 서쪽으로 전라도 건대산봉화와 물길로 서로의 거리는 50리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45)에는 ‘
[光濟山 北准 丹溪縣 笠岩]
광제산봉화는 북쪽의 단계현 입암산봉화에 신호를 전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진주목(晉州牧)에 기록된 봉수는 총 4곳이다.
[臺方山烽燧 在州南一百十四里南應南海縣錦山北應角山]
대방산봉수 주(州) 남쪽 1백 14리에 있다. 남쪽으로 남해현 금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각산에 응한다.
[角山烽燧 在州南七十六里南應臺方山西應昆陽牛山北應泗川鞍岾]
각산봉수 주(州) 남쪽 76리에 있다. 남으로 대방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곤양 우산에 응하며, 북쪽으로 사천 안점에 응한다.
[望晉山烽燧 南應泗川鞍岾北應廣濟山]
망진산봉수 남으로 사천 안점에 응하고 북으로 광제산에 응한다.
[廣濟山烽燧 在州北三十一里南應望晉山北應丹城笠巖山]
광제산봉수 주(州) 북쪽 31리에 있다. 남으로 망진산에 응하고 북으로 단성 입암산에 응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 1760)에는 이처럼 기록했다.
[光濟烽燧 在州北三十里 南應州 望陣 北報 丹城 笠巖 相距四十里]
광제산봉수는 주의 북쪽 삼십 리에 위치한다. 남쪽으로 망진산봉수와 연결되며 북쪽으로 단성 입암산봉수에 보고하였다. 서로간의 거리는 40리이다.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영남읍지(嶺南邑誌), 만기요람(萬機要覽, 1809),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 등에서 그 내용이 확인 된다. 이러한 문헌 기록으로 미루어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의 편찬 시기인 1425년 이전에 이미 축조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더 이상의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상고할 길은 없다. 다만 기록으로 볼 때 광제산봉수는 조선시대 중요 통신 수단이었던 봉수대 중 하나로서 조선 세종 때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광제산봉수는 근대적 통신수단으로 전환되는 조선 후기 고종 31년(1894)에 폐기 될 때까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世宗 1년에 연변봉수(沿邊烽燧)와 내지봉수(內地烽燧)의 거화법(擧火法)이 오거법(五炬法)으로 세분됨으로써 조선시대 봉수 거화의 기준이 마련되었다.
5거법의 거화제도에 대해서는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만기요람(萬機要覽)』 등에서도 일관된 내용을 유지하고 있다.
『世宗實錄』卷4 1年 5月 庚午條
「兵曹啓 前日各道烽火 今無事卽一擧 有事卽再擧 乞自今 倭賊在海中卽再擧 近境卽三擧 兵船與戰卽四擧 下陸卽五擧 與陸地賊變 在境外則再擧 近境則三擧 犯境則四擧 與戰則五擧 晝則代以煙氣 其不用心 觀望烽火干及所在官司 依律科罪上王從之」

 

같은 왕 4년에는 봉수가 있는 곳에 의거할 수 있는 보벽(堡壁)이 없어 적에게 약탈을 당하게 되므로 연대를 높이 쌓고 궁가(弓家)를 설치하여 화포(火砲)와 병기(兵器)를 두어 적변(賊變)을 간망(看望)할 것을 건의 하여 제도에 명하여 연대를 개축토록 했다.
『世宗實錄』卷17 4年 8月 癸卯條
「慶尙道水軍道安撫處置使啓 烽燧之處 無堡壁可據因此或爲賊所掠 法令雖嚴 人皆疑畏 不肯用心瞭望 請高 築煙臺 上設弓家 置火砲兵器 晝夜常在其上 看望賊變 從之 命諸道改築煙臺」

같은 해 12월에는 중국의 법전인 『당율(唐律)』과 『대명율(大明律)』 및 조선 전기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속육전(續六典)』등을 참조하여 조선 최초의 봉수제를 제정하였다.
『世宗實錄』 卷18 世宗 4年 潤12月 癸酉
 
동왕(同王) 29년(1447년)에 이르러 봉수대(烽燧臺) 축조규정이 정립되면서 조선 봉수제도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이 규정에 의하면, 연변 봉대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연대를 높이 쌓게 하였는데, 그 높이는 25척(7.5m), 둘레 70척(21m), 대 아래 쪽 사면을 각 30척(9m)으로 하였다. 그 외곽에 참호를 구축하였으며, 봉대의 상부에 가옥(仮屋)을 축조하여 병기(兵器)와 용수(用手), 화기(火器) 등을 보관하였다. 봉군의 상벌에 대한 규정이 있으며, 내지봉수는 연변 연대와 비할 바가 못 되므로 대를 구축하지 말고 전에 배설된 봉두에 연조만을 구축케 하였는데 위가 뾰족하고 아래가 큰데 그 형태는 모나거나 둥글다. 높이는 열자에 지나지 않으나, 담장을 둘러 악수(惡獸)를 피하게 하였다.
『世宗實錄』卷115, 29年 3月 丙寅條
「議政府據兵曹呈啓 沿邊煙臺造築之式 腹裏烽火排設之制及監考軍人勸勵完護之條 參酌廢鍊後錄 一.沿邊各 處煙臺造築 高二十五尺 圍七十尺臺下四面三十尺 外掘塹深廣十尺 又於坑塹外面 設木找長三拓 削皮銳上植 地廣十尺 臺上造仮屋藏兵器及朝夕供用手火器皿等物 看望人十日相遞守之 新舊間絶糧時 所在官及監司節制 使隨宜補乏 一. 監考勤謹者 每六年一次散官職除授 烽火海望人能告事變捕賊者 依續兵典叙用行賞 其餘各人 依船軍例計其到宿 差海1職 一ㅁ. 腹裏烽火非沿邊煙臺之比 勿築臺. 於在前排設峰頭 除地築煙竈 上尖下大 或方或圓 高不過十尺且繚以壇墻 以避惡獸 … 從之」

 

북쪽의 산청(단성) 입암산봉수와 금성산봉수 위치

 

남쪽 진주 망진산봉수 위치

 

남쪽 안점봉수 위치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의 광제산봉수 현지조사 내용은 아래와 같다.
광제산봉수대는 발굴조사의 결과를 바탕으로 2004년 연조, 방호벽 등을 복원·정비하였다. 연조는 북편 방호벽에 인접하여 2m 간격으로 3기가 복원되었다. 연조의 기단부는 장방형으로, 장축 2.8m, 단축 2.5m, 높이 0.4m의 규모이다. 크기 10~40㎝ 내외의 판석을 4단으로 바른층쌓기하여 기단부를 조성하였다. 연조는 기단부 중앙에 설치하였고, 평면 원형으로 직경 2.3m, 높이 1.8m이다. 크기 20~30㎝ 내외의 자연석을 10~11단으로 허튼층쌓기한 후 틈새에는 작은 할석으로 보강하였다. 연조 정면 하단부에는 크기 35×40㎝의 화구부를 내었는데, 작은 할석을 집어넣어 입구를 막아 놓은 상태이다.
복원된 방호벽의 높이는 1m로 다른 방호벽의 높이에 비해서 높지 않다. 출입구는 총 2기로 봉수대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와 서편 연조부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있다. 봉수대 출입구는 계단식(폭 1.6m)으로 5단을 조성 하였으며, 연조부 출입구 또한 계단식(폭 1.5m)으로 6단을 조성하였다. 방호벽은 발굴조사 시 남편이 유실되어 새롭게 축조되었다. 동·서·북편의 방호벽은 크기 20~40㎝ 내외로 일부 치석한 석재를 이용하여 5~6단 정도 허튼층쌓기하였다. 이에 반해 남편의 방호벽은 크기 80~100㎝ 내외로 치석한 석재로 기단부를 조성하고, 상단은 크기 20~40㎝ 내외의 자연석으로 2~3단 정도 허튼층쌓기하였다.

 

끝없이 펼쳐진 남쪽 풍경

 

 

진주시가지

 

 

서북쪽의 지리산과 웅석봉

 

 

 

 

 

 

서쪽 진양호 방향

 

 

 

 

남해 납(원)산봉수
남해 설흘(소흘)산봉수
남해 미조 망운산봉수

남해 금산봉수
창선도 대방산봉수
사천 각산봉수
사천 안점산봉수
사천 우산봉수
 ⇔  진주 망진산봉수

 

진주 광제산봉수 ⇔ 단성 입암산봉수 ⇔ 삼가 금성산봉수 ⇔ 합천 소현봉수 ⇔ 거창 금귀산봉수 ⇔ 거창 거말흘산봉수 ⇔ 상주 지례현 구산봉수

 

 

 

 

 

출처 및 참조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Ⅳ-고전국역총서43/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32권(1971.2.20.)

경남지역의 봉수Ⅲ-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2015.08.16.)/디자인세상

진양지(晋陽志-1625년) 권지2-서울대학교규장각 지리지
진양지(晋陽志)-서울대학교규장각 지리지
진주군읍지(晋州郡邑誌-1899년)-서울대학교규장각 지리지

 

 

 

 

『경상도읍지 慶尙道邑誌』(1832년 경, 奎 666)

 

 

 

1899년(광무 3) 편찬된 『진주군읍지(晋州郡邑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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