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생각하다

기해년 퇴촌당산제 이모저모

천부인권 2019. 3. 7. 14:00



1959년 퇴촌당산제 최초 문건


기해년(己亥年 2019) 2월 19일은 정월대보름날로 곳곳에서 달집태우기 등 기원제를 올렸다. 특히 의창구 봉림동은 당산제를 지내는데 올해로 29회 째이다. 퇴촌당산제의 간략한 약력을 보니 1959년 10월 25일 퇴촌마을 사람들 19명이 농악놀이를 발족했으며, 최초로 백미 3대를 마련했다. 다음해 1960년 정월 농악놀이를 시작하여 창원공단의 개발로 마을이 사라 질 때인 1975년까지 진행했고 1976년부터 중단되었다.
이후 1978년 순수예술단체인 퇴촌농악이 창단되고 1979년 황일태씨가 창립한 창원퇴촌농악보존회가 제1회 퇴촌당산제를 시행했다. 1999년 봉림동에서 당선된 시의원이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당산제를 지내던 창원퇴촌농악보존회에게 양보를 받아 퇴촌당산제전위원회를 창립하여 당산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당시 국도25호선 우회도로가 개통되면서 마을 발전기금으로 몇천만원의 돈을 받아 제례복을 장만하고 그 돈을 사용하여 제례를 유지했다. 지금은 그 돈의 사용 내력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당시 회칙에는 “선거에 의해 당선된 사람”이 위원장이 되어 초헌관을 했다. 10회부터 26회까지 위원장이 제례를 지내는 초헌관으로 역할을 했지만 27회부터 초헌관은 마을 사람 중에서 선발하여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2019년 퇴촌당산제의 제관들이 도열해 있다.


실질적으로 퇴촌당산제는 동장이 행사 진행의 주체가 되어 진행해 왔으며 퇴촌당산제전위원회는 27회 때 까지 모든 자료를 봉림동의 공무원이 생산했다. 따라서 위원회의 위원들은 제례만 지내는 정도였다. 위원들은 동장의 호위격인 관변단체가 주류를 이루며 당산제를 지내다 보니 마을 사람들은 구경꾼에 불과했다. 그런 단체에서 퇴촌당산제전위원회가 독립적 단체로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재원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인데 창원시의 주민화합 보조금 500만원 중 100만원만 지급 받다보니 겨우 제례형식만 갖추고 있는 형편이다.
마을의 안녕과 기원을 바라는 주민화합의 장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고 회원의 회비로 운영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당산제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도 동장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고 관변단체가 당산제를 지내는 실질적 행사를 하고 있으면 주민의 역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전통을 버리기는 쉬우나 잇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나마 주민이 주체가 아니라 관변이 주체가 되어 진행한다면 왜곡된 전통이 생산될 소지가 크다. 앞으로 주민이 주인이 되어 진행되는 퇴촌당산제가 되도록 많은 주민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그러한 것을 이루기 위해 지금의 퇴촌당산제전위원회가 노력해야 한다.




우로부터 집례, 초헌관, 아헌관2명, 종헌관, 대축, 좌우집사



초헌관 조정호 어르신이 당산목 앞에 부복하고 있다.



축문을 읽고 있는 대축



마을 단체장들 합동 제례



축문을 불사르는 망료례를 하고 있다.



퇴촌농악보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