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밀양 금시당 백곡재에서 참 멋을 보다

천부인권 2019. 3. 10. 16:59



△2019.3.9. 밀양 금시당 백곡재를 강 건너에서 본 모습


매화가 완연한 봄을 일깨우는 계절의 문턱에서 요즘 관심사인 정원을 보러 밀양시 활성동 581번지에 위치한 금시당과 백곡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금시당이 위치한 이곳은 밀양강이 산성산을 만나 굽어져 흐르는 절개지 위에 지었는데 자연과 동화를 이루는 우리나라 정원의 백미를 보는 듯하다. 특히 낮은 담장 너머로 펼쳐진 들판과 밀양의 관아 및 자신의 조족이 세운 월연정과 마주보며 가만히 백곡서재에 앉아 상념에 잠길 수 있도록 설계된 것에 감탄을 하게 된다. 특히 담장 옆으로 줄지어 세운 나무들과 백곡재와 금시당의 경계에 심은 150여년이 된 매화꽃은 일품이다. 강물이 녹으면 은어를 낚는 강태공의 낚싯대 휘두르는 모습과 고목의 봄 매화가 3월 초순에 피면서 이곳의 절경은 시작 된다. 3~4월의 봉숭아꽃, 4~5월의 매자꽃, 한여름의 배롱나무 꽃, 늦여름의 무궁화 꽃, 가을의 단풍나무, 그리고 450년 된 은행나무에서 단풍이 떨어지면 계절은 절정으로 치달을 것이다. 한겨울 눈 내린 뜰에 홀로 청정한 백송은 그 상상의 경관에 정점을 찍는다.




△2019.3.9 금시당과 백곡재


이곳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8호로 지정된 곳으로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었다.
『* 구분 : 지방문화재
* 소유자 : 여주이씨 문중
* 지정일 1996/3/11
금시당(今是堂)은 조선조 명종(明宗)때 승지(承旨) 로서 학행이 높았던 금시당 이광진(李光軫 : 1513~1566년)선생이, 만년에 은퇴하여 학문을 닦고 수양을 하기 위해 1566년 (明宗 21년)에 창건한 별업(別業)의 정당(正堂)이다. 창건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으므로 1744년(英祖 20)에 선생의 5대손 백곡(栢谷) 이지운선생(李之運)이 복원(復元)을 했는데, 현재의 건물은 선생의 10대손 무릉옹(武陵翁) 이종원(李鍾元) 과 11대손 만성(晩醒) 이용구 (李龍九)가 문중의 뜻을 모아 1867년(高宗 4년)에 원래의 건물을 해체하여 크게 중수(重修)를 하였다. 건물의 제도는 정면 4칸, 측면2칸에 소로수장(小爐修粧)의 팔작형(八作形)지붕으로 좌우에 각각 2칸 규모의 개방된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하였다.
백곡재(栢谷齋)는 조선조 영조(英祖) 때 재야(在野)의 선비로서 명망이 높았던 교남처사(嶠南處士)백곡 이지운(李之運 : 1681~1763년)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문중의 결의로 그 6대손 만성 이용구가 주관하여 1860년(哲宗11)에 세운 재사(齋舍)이다. 그 제도와 양식 및 규모는 금시당과 대체로 동일한데 온돌방과 마루의 배치가 반대방향이다.
금시당과 백곡재는 기둥의 결구(結構) 방식이 특이한 조선시대 후기의 전통적인 건축물로, 주변의 자연환경과도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영남지방 사족(士族) 가문의 전형적인 정자 건물이다. 이 별서(別墅)는 밀양의 여주이씨(驪州李氏) 문중의 대표적인 선세유적(先世遺蹟)의 하나로 , 경내에는 위의 두 주 건물 외에도 관리사(管理舍) 및 정문 (正門) 중문(中門) , 남문 (南門) 등 별도 건물이 있어 사용공간을 구획하였다. 특히 남문안 정원에는 금시당 선생이 손수 심은 440년 수령(樹齡)의 압각수(鴨脚樹)(은행나무) 한그루가 있어 밀양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밀양 금시당 입구




금시당(今是堂)은 이광진(李光軫, 1513~1566)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여 덕성을 함양하던 별업(別業)으로 명종 20년(1565)에 창건하고 백곡정사(栢谷精舍)라 하였다. 임진병란에 불타고 200년 동안 폐허로 있었는데 5세손 지운(之運)이 선대 유적의 인멸을 개탄하여 영조 19년(1743)에 복원 건축하였고 고종 4년(1867)에 11세손 용구(龍九)가 종중의 논의를 얻어 중건하였다.
금시당 이광진은 여흥이씨(驪興李氏)로 연산조에 밀양으로 남하한 교위 사필(師弼)의 자손이다. 문학이 일찍 성취하여 명종 1년(1546) 대과에 급제한 후 한림(翰林)을 거쳐 내·외직을 역임하고 승지(承旨)가 되었다가 벼슬에 뜻이 없어 일조에 물러나 돌아오자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이른바 “지금이 옳고 어제는 그른 줄 알았다. 覺今是而昨非”고 한 글에서 금시(今是) 두자를 인용하여 당의 편액을 걸고 산수와 전원에 낙을 부쳐 여생을 보냈다.




△금시당 고직사



△백곡재에서 본 매화와 금시당



△뜰에서 바라 본 금시당과 매화



△금시당(今是堂) 편액




今是堂重建記
洞號栢谷 古地 州誌著焉 先祖承宣公 甚愛玆邱 因置亭榭 爲晩景優閒計 此今是堂之名 所由始也 中司馬 丙午登第 由翰苑 登瀛州 陞拜銀臺 一夕超然謝名韁 歸田廬 別搆栢谷精舍 取陶靖節辭 拈出今是字 命扁焉 盖寓其高尙自適之志也 龍峀環擁 薩灘縈廻 爽朗風物 實爲南州之勝區 而西挹月淵 月淵卽叔祖內翰公別墅也 一水上下涯分南北 朝夕于杖屨 永護閒中日月 當時人 莫不榮慕焉 以爲高致雅韻 不獨令西京二䟽專美云 逮高王考謹齋公 繼述 而尊守之 則吾家玆堂之設 不啻如豪貴家占勝搆亭 爲一時遊觀之娛之比也 不幸龍蛇之燹 亭宇蕩殘 址砌頹廢 而百年之間 家世零丁 喪禍荐棘 未遂改紀之謀 每想平泉之墟 久抱霜露之感矣 歲庚寅春 族父自濡軒公 屬不肖而謂之曰 栢谷遺墟 久無堂宇 而行路嗟惋 指點於嵐煙蓁蕪之墟 爲吾祖子孫者 無能感歎于懷耶 余實有望於爾 爾其勉之 因以數間 瓦屋付之 不肖愴先業之久墜 感公意之勤摯 而殫心經紀 乃於戊午春 創數椽芽屋 甲子正月 拓舊臺而廣之 廉隅平直 庭壇整齋 粤二月四日壬子 竪四楹 墻壁塗墍之工 次第修擧 李夏役告訖 使族孫禛題舊扁 而揭于楣 堂之深 一尋有半 廣又倍之 而可嬴焉 堂制向南 而軒之一角 橫出江崖 翼然掩暎於蒼翠薈蓐之間 頓令江山負舊日顔色 固未知當時規模輪奐 視玆何如 而不肖於是 尤有所像想感歎者 百年曠廢之擧 有非不肖孱孫所可營幹 而適成於今日 豈非廢興之有數者耶 不肖之半生心力 早夜無他 今而後乃遂其志願 不祇爲一時之幸而己 高山活水 宛帶風儀 急流勇退 終古而稀跫焉 噫 我先祖之堂 己能激濁於當時 將復颺休於後世 與棟宇而不騫 則後昆所以羹墻之者 且將無期矣 因念自濡公之卽世久矣 手種矮松 大踰拱把 朝暮摩挲 愴然興懷 恨不及奉杖屨而相喜賀也 凡爲吾祖之後者 須知今日經紀殫竭之勞念如此 而於是焉肆業 不廢春詩夏禮之規 則不獨趾先烈 抑將裕後業 而庶幾永世守玆堂 不至廢墜也
略記顛末 五代孫 之運 謹撰


금시당중건기(今是堂重建記)

골짜기 이름 백곡(栢谷)은 오래 되었으니 읍지(邑誌)에 나타나 있다. 선조 승선공(承宣公)께서 이 언덕을 매우 사랑하여 정자를 지어 만년에 한가하게 지내려 하셨는데 이것이 금시당(今是堂)이라는 이름이 시작된 연유이다. 선조께서는 경자년(庚子年,1540)에 사마시에 입격하시고 병오년(丙午年,1546)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원(翰苑, 藝文館)을 거쳐 영주(瀛州, 弘文館)에 오르고 은대(銀臺, 承政院)로 승진하였다. 하루저녁에 훌쩍 명리(名利)의 굴레를 사절하고 전원으로 돌아와 따로 백곡정사(栢谷精舍)를 짓고는 도정절(陶靖節, 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금시(今是)’ 두 글자를 집어내어 편액의 이름을 지었으니 대체로 고상자적(高尙自適)하는 뜻을 부친 것이다. 용수(龍峀, 龍頭山)가 에워싸고 살탄(薩灘)이 감돌아 시원하고 명랑한 풍경은 실로 남방 고을의 명승지요, 서쪽으로는 월연정(月淵亭)이 건너다보이는데 월연정은 곧 숙조(叔祖)이신 내한공(內翰公)의 별서(別墅)이다. 냇물의 아래 위,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어 아침저녁으로 거니시며 한가한 세월을 영구히 간직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들 사모하여 고상하고 아담한 운치가 다만 서한(西漢)의 이소(二䟽)¹⁾만 아름다웠던 게 아니라고들 하였다.
고조부 근재공(謹齋公)이 계술(繼述)하여 준수함에 이르러서는 우리 집안에서 이 당을 설치한 것은 부호의 집에서 명승지를 차지하여 정자를 짓고 한때 놀며 구경하는 즐거움을 삼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불행이도 임진·계사의 난리로 정자 건물이 송두리째 파괴되고 집터의 섬돌이 무너져 폐기 되었으나 백년 사이에 집안이 영락하여 상고(喪故)가 겹쳤기에 고쳐 짓는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매양 선정(先亭)의 폐허를 상상하면서 계절이 바뀔 적마다 조상을 생각하는 감회만 오래도록 안고 있었다. 경인년 봄에 족부(族父) 자유헌공(自濡軒公)께서 불초에게 위촉하면서 “백곡(栢谷)의 유허에 오래 도록 건물이 없어서 지나가는 사람들도 산안개 무성하게 뒤덮은 폐허를 가리키며 안타까워하니 우리 선조의 자손된 자로서 가슴속에 탄식하는 느낌이 없을 수가 있겠느냐? 내 실로 너에게 바라는 것이니 너는 힘쓰라.”고 하시고는 몇 칸의 기와집을 붙여 주셨다. 불초는 선조의 사업이 오래도록 실추됨을 서글프게 생각하고 공의 진지한 뜻에 감격하여 마음을 다하여 경영하다가 이에 무오년 봄에 몇 칸의 초가집을 얽고 갑자년 정원에 옛 대를 터서 넓히니 모서리가 평평하면서 반듯하고 마당과 단이 가지런하게 되었다.
지난 2월 4일 임자에 다섯 칸의 기둥을 세우고 담장과 벽을 바르는 일을 차례대로 거행하여 늦여름에 공사를 마치고는 존손 진(禛)으로 하여금 옛 편액을 쓰게 하여 상인방에 걸었다. 당의 깊이는 열 두자이고 너비는 또 배로하여 넉넉하게 하였다. 당의 제도는 남향으로 헌함(軒檻)²⁾의 한 모퉁이가 강 언덕으로 비껴 나가 푸른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사이로 날아갈 듯 어른거리니 문득 강산으로 하여금 옛날의 모습을 자부하게 한다. 진실로 당시의 덩그렇던 규모가 이와 비교하여 어떨지 모르지만 불초로서는 이에 더욱 상상하며 감탄하는 바가 있다. 백년간 폐기 되었던 일은 불초와 잔약한 후손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마침 금일에 이루어진 것은 어찌 사물의 흥폐에 운수가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불초는 반평생 아침부터 밤까지 심력(心力)을 다른데 두지 않았는데 이제 이후로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으나 한때의 다행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높은 산과 살아있는 물은 완연히 풍의(風儀)를 띠었으니 급한 물결 가운데에서 용감하게 물러서는 것은 예로부터 자취가 드물다. 아! 우리 선조의 당은 이미 당시에 혼탁한 세상을 깨우쳤거니와 장차 후세에 다시 드날려 건물과 더불어 손상되지 않을 것이며 후손들이 추모하는 마음도 장차 한이 없을 것이다.
이에 생각건대 자유헌공(自濡軒公)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어 손수 심으신 왜송(矮松)의 크기가 아름을 넘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어루만지며 미처 모시고 함께 기쁘하고 축하하지 못하기에 서글픈 감회가 일어난다. 무릇 우리 선조의 후손되는 자는 모름지기 금일 경영하여 애쓴 마음이 이러함을 알고 여기서 학업을 익혀 봄에는 시(詩), 여름에는 예(禮)를 공부하는 규범을 폐하지 않는다면 선대의 업적을 계승할 뿐 아니라 아마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 영원토록 이 당을 지켜서 폐하는데 이르지 않을 것이다.
5대손 지운(之運) 삼가 짓다.


【주석】
이소(二䟽)¹⁾ : 한나라 때 소광(疏廣)과 그 조카 소수(疏受)는 함께 태자태부(太子太傅)와 소부(少傅)의 관직에 있다가 홀연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하지 않다.”고 하고는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소요하였다.
헌함(軒檻)²⁾ : 대청 기둥 밖으로 돌아가며 깐 난간이 있는 좁은 마루




△뜰에서 본 백곡서재 모습


백곡서재(栢谷書齋)는 백곡 이지운(李之運, 1681~1763)의 6세손 용구가 공의 유덕을 추모하여 철종 11년(1860)에 금시당 동편 축대 위에 창건하고 고종 4년(1867)에 금시당과 함께 중건한 집이다.
백곡공 이지운은 연산 연간에 밀양에 들어 온 교위 사필(師弼)의 7세손이고 금시당 선생의 5세손이다. 성품이 염담(廉淡)하여 소시부터 벼슬 진출에 뜻이 없고 술선(述先)의 성심이 깊더니 영조 19년(1743)에 금시당을 복원 건립하고 정거소영(靜居嘯詠)하면서 임진란에 잃어버린 선세 문적을 각고 수집하여 『철감록(掇感錄)』을 편저하였다.




△백곡서재와 매화나무 모습



△백곡서재(栢谷書齋) 편액




栢谷齋記
齋之北 有堂曰今是堂 卽故承宣今是先生之所築也 燬於壬辰 後數百年 五世孫栢谷公 卽其址重建 而終其身寢處於其中 未嘗別置燕居之室 蓋追孝之意也 今距公歿又且百年 而公之胄孫龍九甫 謀於諸族 別構一齋於今是堂之側 而扁之曰栢谷齋 來徵記於余 而語及方向規制甚悉 余詰之曰 是齋也 距今是堂間不數亦 而且其面勢不南以西 則是卽今是堂之廂也 夾也 何不倣古廂夾之制 而爲之規 乃離以別之 而別以栢谷齋顔其楣何也 龍九甫愀然拱而對曰 不肖等 非敢篤近而忘遠也 但今是公則歷敭淸顯 掛冠南下而其跡著 栢谷公 則隱約窮閻 讀書終老 而其跡晦 今若營建是齋 而顔楣之目 只冒今是堂 而爲之 則登斯亭者 但知今是 公之道義風節 而於栢谷公肯構追孝之意 則或未之知 且將與其跡而俱晦 故爲子孫者 用意如此 而揆以厭屈之義 則誠有蹙蹙然者子其爲我解之余 復之曰無傷也自栢翁無恙時而言之則寢斯處斯 而不別其居者 固是孝思之篤 而自子孫今日而言之 則表之章之 而各伸其慕者 亦其宜爾 顧何爲而不可哉 二祖之顯晦雖異 而其裕後則一也 兩齋之號名雖殊 而其追遠則一也 要之存栢翁之遺躅 所以張今是之餘烈 而推而上之 又有文節公兩直學之邃文卓節在 爲吾宗者 苟能心栢翁之心 事栢翁之事 而讀書肄業於斯 講信修睦於斯 以克追前烈 則其所以式穀而似述之者 又不但止於公羊傳聞之世而已也 僉賢其勉之哉 不佞以宗後生 雖未及登公之堂 挹其遺芬 而於其家世源流 則講之有素 非他人比 故爲之說如此 而兼寓勉戒之意云
宗後人 鍾祥 謹撰


백곡재기
서재의 북쪽에 금시당(今是堂)이 있으니 곧 승선(承宣) 금시(今是)선생께서 지은 것이다. 임진난에 불탄 뒤로 수백 년이 되어 5세손 백곡공(栢谷公) 휘 지운(之運)이 그 터에다 중건하여 종신토록 그곳에서 잠자고 거처하면서 별도로 쉬는 거실을 설치하지 않았는데 대개 선조를 추모하여 효도하는 뜻이었다. 이제 공이 돌아가신지 또 한 백년이 되넜는데 공의 주손 용구(龍九)가 그 일족과 의논하여 금시당 곁에 별도로 한 재실을 지어서 편액을 백곡재(栢谷齋)라 하고 내게 와서 기문을 청하면서 그 방위와 규모와 제도를 매우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내가 따져 말하기를 “이 재실은 금시당에서 거리가 몇 자 되지 않고 또 그 방향이 남향이 아니라 서향이라면, 이는 곧 금시당의 행랑이요 협실이다. 어찌하여 옛날 동서(東序) 서서(西序)의 체제를 본떠 규모를 정하지 아니하고 떼어서 별체로 하였으며 별도로 벽곡재라는 현판을 단 것인냐?”고 물었다. 용구는 정색을 하여 손을 맙잡아 예를 표하면서 “불초 등이 감히 가까운 조상에게는 돈독하면서 먼 조상을 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금시공(今是公)은 청현직(淸顯職)¹⁾을 역임하여 명성을 떨치다가 벼슬을 버리고 남방으로 내려 왔으니 그 자취가 드러났지만 백곡공(栢谷公)은 궁벽한 동네에 은거하여 독서하여 노년을 마쳤으니 그 자취가 가려져 있었습니다. 이번에 만약 이 제실을 건축하면서 편액의 제목을 단지 금시당으로만 덮어서 사용한다면, 이 정자에 오르는 이는 금시공의 도의와 풍절(風節)을 알면서도 백곡공께서 건물을 짓고 조상을 추모하여 효도하신 뜻에 대해서는 혹 모를 것이고, 장차 그 자취도 함께 가려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자손된 자로서 이와 같이 마음을 쓴 것인데, 압굴(厭屈)²⁾의 뜻으로 헤아린다면 참으로 위축되는 점이 있습니다. 선생은 나를 위해 해명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대답하였다. “마음 상할 것은 없다. 백곡옹(栢谷翁)께서 건강하실 때로 말한다면 여기에 거처하고 여기에 잠자면서 그 거처를 별도로 두지 아니하였던 것은 실로 효성스런 생각이 돈독하였기 때문이나 자손들이 오늘에 이르러 말한다면, 세상에 드러내어 각기 그 추모하는 마음을 펴는 것 또한 마땅한 일이라 할 것이니 어찌 불가하다 하겠는가! 두 선조의 사적이 드러나고 가려짐은 비록 다르지만,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은 한 가지이다. 두 재실의 호칭과 이름이 비록 다르지만 먼 조상을 추모하자는 데는 한 가지이다. 요는 백곡옹의 유적을 보존하는 것은 금시공이 남긴 아름다움을 펼치는 방도가 되니 이를 미루어 올라가면 또한 문절공(文節公)과 두 분 직제학(直提學)의 깊은 문장과 탁월한 절의가 있을 것이다. 우리 종족이 된 자는 진실로 백곡옹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고 백곡옹의 사업을 사업으로 하여, 이곳에서 독서하며 학업을 익히고, 이곳에서 신의와 화목을 닦아서 전일의 아름다운 업적을 뒤따른다면 그것은 착한 자손이 조상의 업적을 이어가는 것이다. 또한 「공양전(公羊傳)」의 ‘전해 듣는 고조 증조의 세대’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 어진 일가들은 부디 힘쓸지어다. 못난 나는 종후생(宗後生)으로 비록 공의 당에 올라가서 그 남은 향기를 살펴보지는 못하였으나 그 집안 대대로의 근원과 갈래는 평소에 강구하여 다른 사람과 비길 데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설(說)을 짓고 겸하여 격려와 경계하는 뜻을 부치노라.
종후인 종상(鍾祥) 삼가 짓다.


【주석】
청현직(淸顯職)¹⁾ : 청환(淸宦)과 현직(顯職). 높고 좋은 지위를 이르는 말이다.
압굴(厭屈)²⁾ : 존자(尊者)에게 낮은 자가 눌러 낮추는 의리





밀양시 보호수
지정번호 : 12-13-2
지정일자 : 1982.11.10.
소재비 : 밀양시 활성동 582-1

수종 : 은행나무(풍치목)
수령 : 420년
수고 : 22m
흉고높이둘레 : 5.1m
관리자 : 금시당




출처 및 참고

국역밀양누정록-밀양문화원(2008/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