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합포구 예곡동 창원공씨 추원재 追遠齋

천부인권 2019. 6. 2. 14:35



2019.5.19. 창원공씨 추원재 원경


창원공씨의 시조인 공소(孔紹)의 산소가 위치한 곳에서 동쪽으로 약 140m에는 공소의 위패를 모신 추원재(追遠齋)가 있다. 추원재의 주소는 합포구 예곡동 407-4번지이며, 인근에는 다른 집들이 없는 산중이다. 이곳에는 추원재 담장 밖의 고직사와 출입문 겸 집무실인 대문과 추원재가 있다.
공소(孔紹)는 공자(孔子)의 후손으로 창원공씨(昌原孔氏)의 시조이며, 초명은 공소(孔昭)였으나 광종의 이름을 피하여 ‘공소(孔紹)’라 하였다. 할아버지는 공지원(孔之原)이고, 아버지는 공완(孔浣)이다.
원나라의 순제(順帝) 때 한림학사로 임명되어 공민왕이 고려에 올 때 시종하였고, 그 뒤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다. 창원백(昌原伯: 檜原君이라고도 함)에 봉해진 뒤 원나라에 돌아가지 않고 벼슬이 끝난 후 창원에서 살았다.




추원재 대문 채


추원재에는 「追遠齋東廡記」,「追遠齋重建記」,「追遠齋東廡記」,「追遠齋重修記」,「追遠齋增修記」 등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여기에는 1984년 9월에 화산 권용현이 쓴 추원재증수기(追遠齋增修記)의 원문과 해문을 옮겨 둔다.




추원재 편액





[원문]
追遠齋增修記
距昌原府西二十里 斗尺山之陽有負坎 而崇其封者 故高麗會原君諱紹衣履之藏 而齋於其下名以追遠者 後孫之爲寓慕齊宿而設者也 公爲先聖五十四世之次嫡 而以元翰林學士 東出任高麗恭愍朝位至 門下侍郞 封檜原君 東方之有孔氏始 此盖其浮海而來 始泊於此仍以居 焉故受封卜葬皆於是 焉公之蹟雖世遠莫考 然當元季政亂 危亡將至 則避地東來 盖因亂邦不居之訓 而遵夫子欲居九夷之志 則其見幾色擧之智己明矣 仕於朝而致位卿宰 則其才德之優又著矣 洵無愧爲聖人之裔 而至其孫又有漁村俯 孤山隱德業名行 著稱於世厥 後子姓繁衍蔓延域中 則可見其垂範之長 而培根之厚也 盖夫子爲天下所宗 則夫子之後宜 爲天下所愛慕況如公之賢 爲夫子之聞孫 而又東方之肇奠 則東人之愛慕於公者爲如何哉斗尺之阡 爲人所指占稱誦者有素矣 況於其子孫乎此 齋之所以築也 齋之創往 在哲宗己未 而其後數十年 癸丑又因其址 而重建之今 又世久毁敗且以狹隘難容乃就其舊 而重新之拓其址 而增策之益加恢張其倡議經紀者 後孫炳悳始終幹務者 震乙樹泳請余 記其事余謂禮有百世不遷之宗三 而自他國始遷者居其一 則公之於孔氏爲不遷之宗 而固當百世可祀況承先聖之緖 而垂東方則子孫追慕之誠 豈凡族之可 比耶夫遠者無盡之稱 則孔氏之追遠不但在於公必推 而上之遠溯先聖之道 而期其謹守勿失然後 始盡追遠之道 而益有光於斯齋也 不可但以丘龍之護齋舍之修謂畢能事也 是又孔氏之所 當思者故以是諗之
孔子誔降二千五百三十五年 甲子菊秋
花山 權龍鉉 記


[해문]
추원재증수기
창원부 서쪽 20리 거리의 두척산 양지바른 곳에 무덤이 있고 그것을 높이 봉해 둔 것은 옛 고려 회원군 휘, 소(紹)의 묘소가 있고 재실은 그 아래에 있는데 이름을 추원(追遠)이라 한다. 후손들이 추모하고 재계하고 묵기 위하여 지었다. 공은 선성(先聖:공자)의 54세손 둘째 아들이요 원나라 한림학사로써 동쪽으로 나와 고려 공민왕 때 조정에서 벼슬하여 지위가 문하시랑 이었고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져 동방 공씨(孔氏)의 시조가 되었다. 이분들은 대개 바다에 배를 띄우고 와서 처음 정박하여 이로 인해 살게 되었다. 그런고로 봉후를 받고 자리를 가려 장례하게 되었으니 모두가 이러함이다. 공의 자취는 비록 세대가 멀어 상고할 수 없지만 원나라 말기에 정난(政亂)을 당하여 장차 망할 위험에 이르니 동쪽으로 온 것이 피란처이다. 대개 나라가 어지로움으로 인해 살지 못함은 부자(夫子:공자)의 가르침이요 구이(九夷:상고시대 동방에 있던 구종의 오랑캐)들이 살고자하는 뜻이 곧 빌미가 보여 밝은 지혜로 거동하였음이라 조정에 벼슬하여 지위가 대신과 재상에 이르렀으니 그 재덕이 우수하고 또 드러났도다. 성인의 후예로써 부끄럽지 않게 믿겠고 그 자손들도 어촌에 엎드려 고산(孤山)에 의지하여 덕업(德業)과 명행(名行)이 나타나 세강에서 칭찬하고 있다. 그 자손들은 성중()에서 넓게 번성하여 우거져 모범을 드리워 길이 나타났고 근본을 북돋우어 두터웠도다. 대개 공부자께서 천하의 도종으로 천하가 애모하는 바이니 하물며 공의 어짐은 공부자(孔夫子)의 소문난 자손이다. 또 동방에서 일찍 제물을 올렸음은 동인들이니 공을 애모함도 어떠하랴 두척(斗尺)의 산소를 사람들이 손짓하며 평소에 외우니 하물며 그 자손들이 재실을 지음에야. 재실을 창건함은 옛날 철종 기미년이고 그 후 수십 년이 지나 계축년에 또 그 터에 중건하였고 지금 또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고 퇴하여 또 지경도 좁고 수용하기 어려워 이에 그 옛터를 다시 개척하여 새로짓고 더욱 확장을 더하여 증축하였다. 그일을 발의하여 시작한 자는 후손 병덕을 청하기에 나는 이르기를 예(禮)에 백세토록 종실에 세가지 바꾸지 못함이 있다 하였다. 타국으로부터 처음 옮겨와 사는데 그 하나는 곧 공이 공씨의 종실을 옮기지 않음이요 굳건히 백세토록 가이 제사를 드리우고 하물며 선성의 실마리를 동방에서 계승하니 곧 자손이 추묘의 정성에 어찌 뭇 씨족들과 비교하겠는가. 대저 멀리 다함없이 칭송하니 곧 공씨들이 추원함은 다만 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위로 거슬러 올라가 선성(先聖)의 도이니 그것을 삼가 지키기를 빌며 잃지 않는 후 추원의 도를 다함이요 이 재실의 빛이 더할 것이다. 다만 산소를 보호하고 재실을 수리한다고 능히 일을 끝냈다고 이르기는 불가하다. 이는 또 공씨들이 마땅히 생각하는 고로 이에 간언하노라.
공자탄강 2535년 갑자국추(1984년 9월)
화산 권용현 기록함.







追遠齋重修記

孔子之鄕曰曲阜 里曰闕里 所葬曰孔林 在魯城北泗水上 嫡嗣世襲爲衍聖公 當元順帝時 孔子五十三世孫浣 生二子 長曰恩晦 亦襲封 次曰紹 以翰林學士 東出 事高麗恭愍王 位至門下侍郞 封昌原伯 吾東之有孔氏始此 今昌原府西斗尺山子坐原 有大封焉 公之墓也 至公孫有二 曰漁村俯 孤山億 皆爲麗末聞人 厥後 子孫散處一國 皆以昌原爲貫 以二公爲祖 至我 正廟 大欲崇孔氏 嘗幸水原 得漁村後孫文獻公端麟舊址 陞爲闕里 命立祠祀夫子 且諭使燕臣 購闕里 圖譜以來 於是 命諸孔氏改貫曲阜 嗚乎 聖王之愛聖人之後 若是之至也 而獨不及於公之墓 何哉 意者 其荒遠處僻 刺史守令 不以聞歟 孔林者 不獨夫子之墓也 二世以下 至歷代之祔葬 皆在焉 闕里曲阜 非吾東之所有全矣 而猶且借而名而改之 充此類也 雖謂公之墓 爲吾東之孔林 亦何所不可 墓舊有齋 睿陵己未所建也 後孫魯臣 實主之 其後孫奎魯 承厦 又修補之 而進士文彪 記之矣 今癸丑春 諸後孫 爲其歲久而坭也 謀重建焉 因其舊址而一新之 旣成 謁余記 余謂孔氏之爲天下慕 尙矣 敝帷毁壁 人猶愛惜 況於其聞孫次嫡 爲一國卿相 爲一姓氏祖 衣履所藏籩豆所供之地 有廢斯興 有壞必修 宜不可與凡族而觀也 抑又聞之李空同之言曰 孔林不産荊棘 嗟乎甚哉 仁之爲力之遠也 夫地猶不産荊棘 況爲聖人之後 得傳之血脈 而苟或不能奉守仁訓 一有邪氣物欲以間之 則其爲荊棘也 不亦多乎 齋之廢興修壞 宜若無大關於人道 而尙此不忘葺治 而毋墜前人之緖 而況仁之爲安宅也 大矣 今天下之人 恬然視其壞廢 而不思所以修復之 吾知爲聖人之後者 宜又不可與衆人 同其思也 請以是爲諸孔氏勉 是役也 幹其事者 後孫在壽 殷淳 仁錫也 請余文者 孝永 厚鎭 愼永 吾鄕人也
仲秋日 昌山 曺兢燮記


추원재중수기(追遠齋重修記)[해문-박태성]
공자(孔子)의 고향은 곡부(曲阜)이다. 그가 살았던 마을은 궐리(闕里)이다. 장사지낸 곳은 공림(孔林)이다. 노나라 성북(城北)의 사수(泗水) 가에 있다. 대를 이은 후손이 세습하여 연성공(衍聖公)¹⁾이 되었다. 원(元)나라 순제(順帝) 때 공자의 오십삼세손인 완(浣)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은회(恩晦)로 연성공을 세습하여 봉해졌고 차남은 소(紹)로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동쪽으로 나와 고려 공민왕(恭愍王)을 섬겼는데 지위가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이르고 창원백(昌原伯)으로 봉해졌다. 우리나라 공씨의 시작은 이에서 비롯한다. 지금 창원부(昌原府) 서쪽 두척산(斗尺山) 자좌(子坐) 구릉에 큰 봉분이 있는데 바로 공의 묘이다. 공의 손자 둘이 있는데 어촌부(漁村俯)와 고산억(孤山億)으로 모두 고려말에 이름이 난 사람들이다. 그 뒤에 자손이 온 나라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러나 모두 창원을 관향(貫鄕)으로 하고 두 공(公)을 중시조로 삼았다. 조선 정조임금께서 크게 공씨를 숭앙하려 하였다. 일찍이 수원에 행차하여 어촌부의 후손인 문헌공(文獻公) 단린(端麟)의 옛 터를 찾았다. 그 터를 승격하여 궐리(闕里)라 하고 사당을 세워 공자의 제사를 모시도록 명하였다. 또 사신가는 신하로 하여금 궐리에서 그림과 족보를 사 오라고  하였다. 이에 공씨의 관향을 곡부(曲阜)로 고치라고 명하였다. 아아 성왕(聖王)이 성인의 후손을 아낌이 이와 같이 지극하도다. 그러나 오직 공의 묘에 그 은혜가 미치지 못한 것은 어찌된 것인가. 생각해보면 그 자리가 아득히 멀고 외진 곳이므로 자사(刺史)나 수령(守令)들이 듣지 못해서 그러할 것이다. 공림(孔林)은 오직 공자의 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세 이하로 역대가 모두 합사하여 장례를 하였다. 궐리와 곡부는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을 빌려서 고친 것으로 이러한 것을 채운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 묘는 우리나라의 공림(孔林)이라고 한들 무엇이 불가할 것이다. 묘 아래에 옛 재실이 있었는데 예릉(睿陵)²⁾ 기미(己未)에 세운 것이다. 후손 노신(魯臣)이 그 일을 주관하였다. 그 후손 규노(奎魯) 승하(承厦)가 다시 보수하였고 진사(進士) 문표(文彪)가 기문을 썼다. 근래 계축(癸丑)년 봄에 여러 후손들이 재실이 지어진지 오래되고 무너지니 중건할 것을 논의하고 그 옛터에 새롭게 재실을 지었다. 이미 낙성을 하고 나에게 기문을 구하였다. 나는 말하였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공씨를 숭모하는 것은 당연하다. 휘장이 찟기고 벽이 무너지면 다른 사람들도 애석해 하는데 하물며 그 대를 이은 자손들이겠는가. 한 나라의 공경과 재상이나 또 한 성씨의 시조의 무덤이 있는 곳이나 제사를 드리는 재실이 있는 곳은 황폐해지면 다시 일으키고 무너지면 반드시 보수하는데 그것을 평범한 종중과 같이 보는 것은 불가하다. 이공동(李空同)의 말에 “‘공림(孔林)에는 가시나무가 나지 않는다.’하니 아아 심하도다. 인(仁)의 위력이 아득히 멀리 이어짐이여.”하였다. 땅도 가시나무가 나지 않게 하는데 하물며 성인의 후손이겠는가. 그 혈맥을 이은 사람이 성인의 어진 교훈을 잘 받들어 지키지 못하고 혹시라도 사악한 기운과 물욕이 그 사이에 끼어들면 그것이 바로 가시나무가 되는 것이다. 또한 많지 않은가. 재실이 황폐해지고 흥기되며 무너진 것을 수선하는 것이 만약에 사람의 도리에 크게 관여되지는 않더라도 오히려 지붕을 이고 고치는 것을 잊지는 않는데 이는 이전에 이 재실을 지었던 사람의 정서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어진 성인을 모신 재실이겠는가. 위대하도다. 지금은 대개의 천하 사람들이 재실이 무너지고 황폐해져도 무심하게 바라보며 보수하여 회복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의당 성인의 후손은 뭇사람들과 그 생각을 같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으로 여러 공씨들이 권면하기를 바란다. 이 공역의 일을 주간한 사람은 후손 재수(在壽) 은순(殷淳) 인석(仁錫)이다. 나에게 글을 부탁한 사람은 효영(孝永) 후진(厚鎭) 신영(愼永)으로 우리 고을 사람이다.
중추일 창산 조긍섭(曺兢燮)³⁾ 기록하다.


【주석】
연성공(衍聖公)¹⁾ : 1055년에 공자의 46대 자손인 공종원(孔宗愿)이 연성공(衍聖公)으로 봉해졌다.
 예릉(睿陵)²⁾ : 조선 철종과 철인 왕후(哲仁王后)의 능. 서삼릉(西三陵)의 하나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조긍섭(曺兢燮)³⁾ : 1873(고종 10)∼1933. 한말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근(仲謹)이며 호는 심재(深齋)이다. 병의(柄義)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11세에《근사록(近思錄)》을 10일 만에 베껴쓰는기도 하였고 17세에는 영남의 거유 곽종석(郭鍾錫)을 찾아가 태극과 성리 등에 관하여 토론하였다. 19세에 대구에서 열린 향시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이종기(李鍾杞)를 방문하였다. 23세에 《남명집 南冥集》중간사업(주로 교정)에 참가하여 여러 선배들과 교유하였다. 26세 한일합방소식을 듣고 두문불출하며 동서의 학설을 비교 궁리하여 《곤언(困言)》을 저술하였다. 27세에 부친상을 당하고도 〈거빈해 居貧解〉,〈성존심비변 性尊心卑辨〉 등의 논문을 써냈다. 상복을 벗자 자정(自靖)하면서 선비의 길을 걷고자 정산(鼎山)으로 숨어버렸다. 그뒤 문박(文樸)의 서재를 오가며 학문에 몰두하면서 정산서당을 지어 후학을 가르쳤다. 1919년 3월 〈일본총독과 동포대중에게 보내는 글〉을 초(草)하다가 발각되어 구속당하였다. 1928년 겨울 문인들의 요청으로 정산에서 비슬산 서쪽 쌍계(雙溪)로 이거하여 구계서당(龜溪書堂)을 짓고 강학을 계속하다가, 1933년 61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당시 영남 사림에서 거목으로 지목되었다. 한말 지식인 가운데 특히 황현(黃玹)·김택영(金澤榮)·이건창(李建昌)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들을 뛰어난 인물로 칭찬하였던 점으로 보아 유학자로서의 보수적 성격에만 집착하지 않은 학자였다. 저서로는 《암서집 巖西集》·《심재집 深齋集》·《조명록 措明錄》 등이 있다.





출처 및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공소(孔紹)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2004.1)/삼덕정판인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