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북면 고암리 성주이씨 용산재 龍山齋

천부인권 2019. 4. 30. 06:58



2019.4.11창원시 북면 고암리 성주이씨 재실 - 수덕문

 

경상남도 창원시(昌原市) 북면(北面) 고암리(高岩里) 510번지에 있는 성주이씨(星州李氏) 문중의 재실이다.
용산재(龍山齋)는 성주이씨(星州李氏) 문열공파(文烈公派) 문중의 재실로 성종 때 창원부사(昌原府使) 겸 수군병마절도사(水軍兵馬節度使)를 1488년에 지낸 이영분(李永賁)을 배향하고 있다. 화강석으로 다듬은 2층 기단 위에 지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왼쪽 2칸과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을 들였고 그 사이의 1칸은 대청으로 꾸몄으며 앞쪽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출입문인 수덕문(修德門)은 솟을대문으로 지었으며 양옆에는 행랑채가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건립한 것으로 1961년에 중수하였다. 툇마루와 대청에 중수기를 편액으로 만들어 걸었다. 재실 뒤쪽에 이영분을 추모하는 제단비가 있는데 이필문(履必門)을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제단비는 “북면 고암리 성주 이영분 제단비”를 참고하면 된다.




성주이씨 재실 용산재의 출입문인 수덕문 편액



2019.4.11 북면 성주이씨 재실 용산재 모습


이영분(李永賁)의 자는 자례이고 영남 사림파의 중심적 역할을 한 금란계(金蘭契)의 일원으로 금란계는 조선 전기 진주에서 조직된 영남 사림들의 친목단체이다. 설립목적은 섭리에 순응하고 이상적인 도학(道學)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조직되었으며 지배층의 솔선수범과 근검절약을 신조로 삼았다.
1489년(성종 20), 진주목사 경임, 김해도호부사 이손(李蓀, 1439~1520), 창원도호부사 이영분(李永賁), 전 진주목 교수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조위(曺偉) 등을 비롯, 함안․초계․함양․곤양․고성․남해․하동․의령․사천․단성․영산․창녕 등 각 고을의 전․현직 수령 29인이 촉석루에 모여 제세치국(濟世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이상을 표방하며 진양수계(晋陽修契)라는 금란계를 맺었다.
이후 금란계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김일손과 조위 등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능지처참 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되면서 활동이 위축되었지만 서원 건립과 더불어 영남 사림파의 활동은 더욱 확산되어 나갔다.
특히 진주는 영남 사림의 구심점이었던 남명학파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금산동계 등 금란계를 계승, 발전시킨 사림파의 친목계가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구체적인 활동상황 전반은 전혀 알 수 없지만 다만 영남 사림파의 전체적인 동향과 관련하여 도학정치에 필요한 이념을 논의․실행하는 방안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것으로 보인다. 절의(節義)를 최고의 학문적인 가치로 표방했다는 사실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성주이씨 재실의 용산재 편액



2019.4.11 북면 성주이씨 용산재 뒷문 이필문



2019.4.11 용산재 뒤뜰에 세운 이영분 제단비 모습



제단비에서 이필문과 용산재를 바라 본 모습


용산재에는 파산 조병규(巴山 趙昺奎) 지은 용산재기(龍山齋記) 편액이 갈려 있고, 하산 성순영(夏山 成純永)이 찬한 용산재중수기(龍山齋重修記)와 노근용(盧根容)이 찬한 용산재상량문(龍山齋上樑文)도 있다. 아래에는 그 원문을 실어 둔다.





龍山齋記
李氏顯于羅麗康靖初服有臣曰永蕡仗鉞南藩爲 昌原都護府使兼兵馬節度五年治化大行府無事 迺重創舊樓而新之虛白洪相公名曰燕賓以記之 己酉與一時名士修契于矗石樓濯纓金先生序其 事公事行俱載輿覽及州志公亦有子五人別座敆 其季也公西歸之日使別座仍居桐鄕以山水之明 麗也公之冢宅在果川冠岳山某原云而世代旣遠 無鄹曼秦誗之指告久闕歲一之祭子孫之恨爲如 何哉維此高巖後裔世居世葬之地也朱子曰自天 地言之只是一箇氣我之氣卽祖考之氣亦只是一
箇氣所以纔感必應蓋神之感應在乎子孫之誠敬 而已地之遠近非所論也後孫斗鉉溶柏與諸宗詢 謀僉同設壇豎碑每年將事以爲常壇前有齊宿之 所曰龍山齋因地名也春秋講習於此上述乎武城 絃歌李氏之復興其在斯歟
辛未 三月 上澣
內舍生 巴山 趙昺奎 記





龍山齋重修記
直昌原府北九龍山下 山水明麗處 有村曰 高巖星州李氏之世庄也 李氏之先有 諱永賁 以前 韓成宗戊申 爲水軍兵馬節度使兼昌原都護府使來鎭南服昌原舊 爲義昌檜原二縣於韓太宗朝合 爲都護府至是又置 兵馬節度使命公兼任地 西南臨合浦 東接金海在昔 高麗中葉以後蒙古征日本留行省繼以倭寇之所出沒恒由於是實嶺南濱海重鎭非才全文武德備和嚴不足以當是寄也朝延之擢任公豈無以哉公高麗文烈公之五世孫韓朝領議政文景公之肖孫也聯世名公卿德被民物功存史䇿公之才全德備抑所由來者遠矣淫任午年治定人和海不揚波環数百里熙洽靜謐乃不役民而健燕賓堂以傢昇平安閑之氣又與一時賢士大夫修禊事於悳石樓逍遙江山之勝其遺風餘韻多可稱想者吁其偉矣公政成帰朝之日愛桐鄕士俗之厚谿谷之美占一區留其二子主簿敞別座欱居之卽高巖是也嘗建齋舍爲聚族修睦之所曰龍山齋後又以水使公墓所失傳設壇建碑於基後擧霜露歲一之亨其亦義起之不可缺者於是齋遂爲壇祭齋宿之所而歲久傾損往在戊戌春諸李氏議重修之輪奐棟宇改觀而一新焉李君謹容壽鉉造余言曰子嘗序吾祖實紀盛有所嚮慕齋之記重修請更爲惠也余歛袵起敬復以蘇文忠之言復之曰有其實而無其名者有後水使公之名之煥赫於公私之籍者豈敢曰無而其於本實哉者猶有所未盡闡揚者公有五子主簿別坐二公之後戶已累百皆文行醇謹見稱鄕省其伯仲叔三公之後亦當進此而遍滿國中爲巨閥則滋見公行有本實而政蘇民瘼者有在傳誦지外用以代張老之善頌善禱云甭
辛丑 陽復月
夏山 成純永 記






출처 및 참조
도서출판 사람과 나무-황경규의 책이야기
이시화 글 나눔방-성주이씨 문열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