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북면 무곡 신음마을 밀성손씨 무산재 茂山齋

천부인권 2019. 2. 3. 06:00



2019.2.1. 무곡리 신음마을 밀성손씨 무산재 풍경


북면 무곡리(茂谷里)는 양지바른 쪽 마을을 양촌이라 하고 산비탈 음지쪽 마을을 신음마을이라 한다. 창원시 의창구 북면 무릉산길5번길 48은 창원의 북쪽 끝 무릉산 아래에 숨은 듯 자리한 밀양손씨의 무산재(茂山齋)가 홀로 위치한 신음마을의 외진 곳이다. 이 무산재는 손기복(孫基馥)이 창원 입향조(入鄕祖)인 6대조 참봉 손계남(孫桂南)을 위하여 지었다. 밀양손씨의 또 다른 창원 입향조는 옛 창원군 웅남면 정리에 들어 온 만성헌(晩惺軒) 손광록(孫光祿)이 처음 창원에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창원공업단지의 건설로 인해 지금은 사림동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무산재의 중앙에는 선조의 위패가 모셔진 것이 아니라 단군의 초상화가 자리하고 있어 일반적인 재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재실과 관련이 있는 손씨 종친을 만나지 못해 다른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음이 아쉽다.





무산재의 뒤쪽 절개지가 담장이고 앞에도 특별한 흙돌담은 없다. 화장실과 외삼문, 사당이 단촐하면서도 깨끗하게 잘 관리가 되어 있다.




무산재 근접 모습



무산재의 정면 모습


무산재(茂山齋) 기둥에는 주련(柱聯)은 없다. 양(陽)의 기운을 상징하고 우주의 원을 의미하는 원형의 기둥은 4개이며 3칸 구조이고 측면은 2칸이다. 마루의 전면에는 추위와 비, 바람에 대비한 유리 창문을 덧대어 설치했다. 기와지붕인 용마루 양 끝의 망와(望瓦)는 용생구자(龍生九子)의 둘째로 용머리 형상을 한 치문(鴟吻)을 언었는데 화재를 누르고 재앙을 피하는 역할을 하라는 의미를 가진 상상속의 동물이다.




무산재 편액



무산재 중앙에 위치한 단군영정




茂山齋記
孫君其馥 爲其六世祖參奉諱桂南 築墳庵于檜山北茂谷里 訪余言我密城氏 自廣理君以來 世居于密 至牧使諱策 夫人李氏 從弟二男 密直副使諱有敬 寶城謫中 仍家焉 七傳而有諱泗龍 參奉號斗巖 自樂安還舊土 又再傳而卜檜之茂谷 卽參奉公也 不肖等 世守楸里 朝夕瞻依 如承負辟 今所以起玆齋者 時節有事 將共餕而齋宿焉 饎餘有暇 將課讀子弟 乞有以敷陳其事 使入此室者 知尊祖之義 奉祭之儀 噫文孝公之巨孝 廣理君之嵬勳 僕射公之長於吏事 密城君之討逐女眞 糾正公之立功上國 詠歸公之孝友文章 俱可以尊尙也 歲祭之節 密有世規 自當遵而行之 但湖鄕地遠 楸檟失守 此則僉君子之所慨恨也 至如牧使公廉白之風 著於樹州 而家鮮文獻之徵 衣履之藏 云在本郡 而梧村乏深目者 僉君子無以盡其誠 然牧使公有靈 必時臨玆齋 而徊徨不能去矣 宜於梧村 設壇堅碑 無曠祀事
丁卯立夏節 光州 盧相稷 謹書


무산재기
손기복(孫其馥)군이 그 6대조 참봉 계남(桂南)을 위하여 회산의 북쪽 무곡리에 묘당을 지었다.
나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우리 밀성씨는 광리군(廣理君) 이래로 대대로 밀양에서 살았는데 목사 책(策)에 이르러 부인 이씨가 둘째 아들 밀직부사 유경(有敬)이 보성으로 귀양을 갈 때 따라 감에 그곳에 가문이 있게 되었다. 7대를 전하여 사룡(泗龍)과 참봉의 호가 두엄(斗巖)이 있었는데 낙안에서 옛 땅 밀양으로 돌아왔다. 다시 2대를 전하여 회산의 무곡에 자리를 잡으니 곧 참봉공(송계남)이다. 불초 등이 대대로 고향 마을을 지켜 아침저녁으로 우러르고 의지하며 서로 이어서 젊어지는 듯이 하였으나 지금 이 재실을 짓는 까닭은 시절 유사에서 음식을 마련하고 재계하고 잠자기 위한 것이다. 제사 뒤에 겨를이 생기면 자제들에게 책을 읽히려 한다. 이에 그 일들을 대략 기록하여 이 재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조상을 존중하는 뜻과 제사를 모시는 의례를 알게 함이다.
아! 문효공(文孝公)의 큰 효와 광리군(廣理君)의 높은 공훈과 복사공(僕射公)의 관리의 일에 밝은 것과 밀성군이 여진족을 토벌한 것과 규정공(糾正公)이 중국에 공을 세운 것과 영귀공(詠歸公)의 효성과 우애 그리고 문장 등이 모두 존중할 만한 것이다. 해마다 제사를 드리는 시절에 밀성손씨들은 대대로 법도가 있고 마땅히 기준을 따라서 행하니 다만 물가의 마을이라 땅이 멀어 고향을 지키지 못하니 이것이 모든 군자들이 개탄하는 일이다. 만약 목사공의 청렴결백한 기풍은 고을에서 빼어났지만 집안에 문헌으로 징험할 것이 거의 없다. 그 산소를 모신 곳도 본 군에 있다고 하나 시골의 훌륭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없으니 찾을 수 없다. 이러므로 군자들이 그 정성을 다할 수 없다. 그러나 목사공(牧使公)은 신령스러움이 있어 때에 맞게 이 재실에 왕림하여 배회하며 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 시골마을에 마땅히 단을 쌓고 비를 세워 제사를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묘(1927) 입하절 광주 노상직(盧相稷)¹⁾ 삼가 씀.


【주석】

광주 노상직(盧相稷)¹⁾  : 노상직(盧相稷 : 1855~1931)은 한말의 학자이며 파리장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로 자는 치팔(致八)이며, 호는 소눌(小訥)이다.창녕군 이방면 국동 출신으로 허전(許傳)의 문인이다. 정성국(鄭聖國)·김영학(金永學)·장석영(張錫英) 등과 교유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장석영과 함께 요동(遼東)으로 가서 이미 망명한 백씨(伯氏) 노상익(盧相益)과 합류하였다. 저서에 『소눌집(小訥集)』·『역대국계고(歷代國界考)』·『역고(曆考)』·『육관사의목록(六官私議目錄)』·『심의고증(深衣考證)』·『주자성리설절요(朱子性理說節要)』가 있다. 1919년 郭鍾錫, 張錫英, 金昌淑 등의 儒林들이 巴里講和會議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작성한 請願書(世稱 巴里長書)에 서명한 事實이 確認되어 2000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음






출처 및 참조
창원향교지 하-창원향교(2004.11)-대보사
한옥션 현장경매-소눌 노상직(小訥 盧相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