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내서 중리 밀양박씨 여산서당 廬山書堂

천부인권 2019. 2. 6. 06:00

 

 

 

2017.1.18. 내서읍 중리 밀성박씨 여산서당

 

창원시 회원구 내서읍 중리 977는 밀양박씨 무숙공 박진영(朴震英)을 향사하기 위해 밀성박씨 후손들이 설립한 려산서당(廬山書堂)이 있는 곳이다.
박진영의 자는 실재(實哉), 호는 광서(匡西)이다. 그는 1569년 함안군 하리에서 증 형조 판서 동천공(贈刑曹判書桐川公) 박오(朴旿)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선무 원종 이등 공훈(宣武原從二等功勳)에 오르고 곧 이어 관직에 나섰다. 1619년 순천 군수와 우영장을 겸임하였고, 1624년 이괄의 난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그는 다시 진무 일등 공훈(振武一等功勳)에 올랐다. 이어 평산 부사와 해서도 방어사를 겸임하다가 관직을 떠나 향리로 돌아왔다. 광려산 아래에 재실을 짓고 거문고와 책을 벗 삼아 여생을 보내던 그는 1641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품은 함안군 산인면 종가와 국립 진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17.1.18. 내서읍 중리 밀성박씨 여산서당 솟을삼문

 

 

 

출입문에 붙은 역락문(亦樂門) 편액

 

 

여산서당 본당 모습

廬山書堂略記
匡廬之東 日傘山之下 有蓮花到水形 而平衍之地 西有別墅 北有茅亭 前有別堂 中有蓮塘 此卽吾先祖匡西先生致仕惠養藏修之所也  先生歿四年甲申 以丙子斥和大節 贈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 粤五年己丑 以學行忠節 加贈崇政判敦寧 英廟己卯 享道溪書院 道儒上疏請額正廟戊午 御製尊周錄本傳成 純祖嗣位 御製內閣彙編 第居七焉 高宗辛未 賜諡武肅 庚辰躋享三皇大報壇 命錄用祀孫 每年設忠良科 試諸後孫 命印進遺集 列朝崇報之典 士林尊衛之誠 盛矣 自淪喪以來 院撤而壇廢 以至公之所嘗藏修匡廬別墅 毁而墟 墟亦爲人有矣 諸宗人 慨然相謂曰 別墅不復 姓孫之恥也 乙未冬 咸爲之獻金購墟 重建齋舍 諸宗請余記事 余嘗敬閱遺集 與乘史所載 公之一言一行 莫非循理 而其一生樹立 有四大義理存焉 來裔之不可不也 公 早服襲皇考桐川先生之庭訓 受學舅氏李茅軒 及李篁谷二先生 十九 贄拜寒岡鄭先生 聞大道之要 携書入匡廬山中 靜坐力學 壬辰之亂 白衣倡義 赴火旺山城 與郭忠翼公 誓死討賊 尋被薦 三年之間 朝命七及 大亂未靖 則乃以四品淸選 衣戎衣敵愾 甲午以李忠武舜臣薦 赴都元帥權慄陣 屢立奇功 佐成中興之功 是其一也 光海戊午廢母議決 公時宰慶興 卽辭官往哭李白沙恒福喪於北靑謫所 忤於爾瞻 幾危僅免 是其一也 甲子适變 公爲都元帥張晩之右脇大將 住平壤 時李公胤緖 爲适中軍陷賊中如不得當 則圖自殺以報國 公知其心 以書招之 使潰陣而出 挫賊勢 公竟殪适于東郊 史氏擬一紙奪萬師之功 而公不就盟府 卽歸鄕里 由是見漏於行封之列 只陞一資嘉善 金荷潭時讓 上書訟寃 拜兵曹參判 公五年之間 固辭不就 勢有召命 終不起 置別墅于匡廬山之下 成數椽茅棟 署曰匡廬別墅 十年晦養 專意學問 邀趙澗松李益菴諸賢 講究心近諸書 盖公之功成恬退 不惟超然於爵祿之外 專欲溫尋舊學 以篤晩暮也 是其一也 丙子値南漢之辱 公年已耋 而孤倡義旅 踰鳥嶺而聞下城之報 嘔血旋歸 復入廬山 憂憤成疾以終 是其一也 是以文正公許眉叟 銘其墓曰 忠不見功 廉不見容 直道在我 安且不慍 正純兩朝立傳曰 自丙丁以後 嶺之秉彛歿身者 惟鄭文簡蘊 朴判敦震英 若而人而已 皆實錄也 眇余小孫 何敢贅焉
庚子八月日 九世孫 永儀盥手 謹記

여산서당약기 廬山書堂略記  
광려산匡廬山의 동쪽 일산산日傘山 아래에 연꽃이 물에 거꾸로 비친 형상의 평평한 땅이 있다. 그 서쪽에 별장이 있고 북쪽에는 띠로 만든 정자가 있으며 앞에는 별당別堂이 있고 가운데는 연당蓮塘이 있다. 이곳은 곧 나의 선조이신 광서선생匡西先生께서 벼슬에서 물러나 은혜로서 덕을 기르시며 행적을 남기신 곳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사년 뒤인 갑신甲申에 병자호란 때에 척화斥和를 주장하신 큰 절의로 호조판서戶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증직이 되셨다. 오년五年 후 기축己丑에 학행學行과 충절忠節로서 숭정판돈령崇政判敦寧을 더하여 증직하였고 영조英祖 기묘己卯에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도道의 유학자들이 상소하여 사액賜額을 청하니 정조正祖 무술戊午에 임금의 명으로 어제존주록본전御製尊周錄本傳이 이루어졌다. 순조純祖께서 왕에 오르신 뒤에는 어제내각휘편御製內閣彙編의 일곱 번 째에 있다. 고종高宗 신미辛未 무숙武肅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경신庚辰에는 삼황대보단三皇大報壇에 올려 배향하고 명령으로 사손을 쓸 것을 기록하고 매년 충량과(忠良科)를 열어 여러 후손들에게 시험을 쳤고 유집遺集을 찍어 진상하게 하였다. 여러 왕조의 높이 받들어 보답하는 은전恩典과 사림士林이 존중하여 지키려는 정성이 매우 성대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풍속과 윤리가 가라앉은 뒤로 서원은 철폐되고 제단은 사라지고 이어 공께서 일찍이 기거하시며 강학하시던 별장도 무너져서 빈터만 남게 되었고 그 빈터도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어버렸다. 여러 종인宗人들도 강개하여 별장을 다시 세울 수 없는 것은 자손으로서의 수치라 하고 을미乙未년 겨울에 모두 돈을 추렴하여 빈터를 사고 재실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그 사실을 기록하라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유집遺集과 역사에 실린 사실을 열람하였는데 공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이치를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고 그 일생동안 지켜 온 것이 네 가지 큰 의리義理에 있었으니 후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공公은 일찍이 부친인 동천선생桐川先生에게 집안에서의 가르침을 받았고 외삼촌인 이모헌李茅軒과 이황곡李篁谷 두 선생에게 학문을 익혔으며 열아홉에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에게 찾아가 그 문하에서 대도大道의 요체를 듣고 책을 짊어지고 광려산匡廬山으로 들어가 조용히 앉아 학업에 힘을 쏟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의白衣로 의병을 일으켜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가서 충익공忠翼公 곽재우와 더불어 죽기를 맹서하고 적을 토벌하여 여덟 번 천거되어 삼년사이에 조정의 명이 일곱 번이나 떨어졌다. 대란(大亂)이 안정되기도 전에 사품四品의 청직으로 선출되었는데 전쟁의 공적과 적개심에 의거한 것이었다. 갑오(甲午)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천거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진지로 가서 여러 차례 기적같은 공을 세우고 중흥中興의 공을 이루는 것을 도왔다. 이것이 첫 번째 대의리大義理이다. 광해光海 무오戊午에 폐모廢母사건이 결의되자 공은 이때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로 있었는데 곧바로 관직을 사임하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있는 북청(北靑)의 귀양지로 가서 통곡하고 조문하니 이이첨李爾瞻의 미움을 받았으나 겨우 위기를 모면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대의리大義理를 지킨 것이다. 갑자甲子년 이괄李适의 변란 때 공은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우협대장右脇大將이 되어 평양에 주둔하였는데 이때 이공의 아들이 이끄는 이괄 중군中軍의 함정에 빠져 당해낼 도리가 없자 자살하여 보국報國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공이 미리 그 마음을 알고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진陣의 한 쪽을 허물고 나오면 적의 기세를 꺾을 것이라 하니 그렇게 되었다. 공은 결국 동교東郊에서 이괄을 죽였다. 역사가는 이것을 종이 한 장에 쓴 글로 만 명의 군사를 이기는 공을 세운 것에 비견하였다. 공은 공신을 책봉하는 맹부盟府에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으니 이러한 이유로 논공을 행하는 공신의 반열에서 누락되고 단지 한 등급 올라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차되었다.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 김시양金時讓[(선조 14년(1581)∼인조 21년(1643)], 조선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으로 증 영의정 김석金錫의 손자이며 증좌찬성 김인갑金仁甲의 아들이다.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다. 선조 38년(1605)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숭문원정자,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1610년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광해군 3년(1611) 전라도 도사 때 지방향시에서 임금을 비방하는 시제를 출제했다는 모함에 들어 12년간 종성과 영해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와 병조의 정랑, 경상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했고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 겸 판춘추관사에 이르렀다. 청백리에 녹선 되었으며, 인조 21년(1643) 충주시 가금면 하담리의 사제에서 별세하였다. 묘는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에 있는 신도비 우측 뒷산에 있다. 회령의 향사에 제향 되었으며, 숙종 17년(1691) 충익忠翼의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충익공 하담선생 유고>가 있다.
이 상소를 올려 그 억울함을 송사하니 병조참판을 제수하였다. 공은 오년동안 굳이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에도 여러 번 출사의 명을 받았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광려산 아래의 별장에 칩거하였다. 이곳에 몇 칸의 초가집을 짓고 이름을 광려별서匡廬別墅라 하고 십년동안 빛을 숨기고 스스로의 내면과 덕성을 기르며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조간송趙澗松 조임도(趙任道)1585(선조 18)∼1664(현종 5)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덕용德勇, 호는 간송당澗松堂, 조식趙埴의 아들이다. 김중청金中淸,고응척高應陟,장현광張顯光 등을 사사하였다. 1604년(선조 37)향시에 합격하였고 그 이듬해인 21세 때《관규쇄록 管窺瑣錄》을 저술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거상대절 居喪大節〉10조(條)를 써서 자손들이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으며, 또 아버지의 언행록인 《추모록 追慕錄》을 지었다. 1614년에는 동당시東堂試에, 그 이듬해 향해鄕解에 합격하였고,  1627년(인조 5)정묘호란 때 향인鄕人이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신병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1634년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고, 1638년 《취정록 就正錄》을 쓰고 그 이듬해 《김라전신록 金羅傳信錄》을 편찬하였다. 1644년 《대소헌유사 大笑軒遺事》를 찬하였으며, 1647년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되어 창녕까지 가다가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 뒤 공조좌랑으로 임명되었으나, 노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사헌부지평에 증직되고, 함안의 송정서원松汀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간송집》 7권 4책이 있다.
이익암(李益菴) 등 여러 현인들과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 여러 서적을 강학하였다. 대개 공께서 공을 이루고도 기꺼이 물러난 것은 관직과 봉록에 초연하여 오직 옛 학문에만 전념하여 탐구하며 늙어서까지 돈독히 한 것이 또 하나의 대의리大義理이다. 병자년에 남한산성에서의 치욕을 당할 때 공의 나이가 이미 칠순이었는데 홀로 의병을 일으켜 조령鳥嶺을 넘어갈 때에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피를 토하며 울고 의병들을 돌려서 돌아가서 다시 광려산으로 들어가 울분을 머금고 있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또 하나의 대의리(大義理)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문정공文正公 허미수許眉叟께서 그 묘에 명銘을 써서 ‘그 충정은 공적을 바라지 않았고 그 청렴함은 남에게 용납됨을 바라지 않았다. 곧은 도가 곧 나에게 있으니 편안하고 또한 성냄이 없다.’고 하였다. 정조와 순조 양 조정에서 전기傳記를 지어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이후로 영남에서 떳떳한 의리를 지키며 자신을 불사른 사람은 오직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과 판돈判敦 박진영朴震英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니 모두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아득한 나 같은 어린 자손이 무슨 덧말을 붙일 수 있겠는가.
경자庚子 8월일 구세손九世孫 영의永儀 관수盥手 삼가 짓다.

 

 

 

여산서당 편액

 

 

 

여산서당 주련

 

 

 

여산서당략기(廬山書堂略記)

 

廬山書堂略記
匡山之北日傘山下 蓮花倒水形之中里 西有別墅 北有茅亭 前有別堂 中有蓮塘 此卽武禺公匡西朴先生 致仕惠養藏修之所也 先生以忠義 爲宣仁壬甲中興名臣 嘉善行兵曹參判 己丑拝朝散大夫行弘文館修撰兼經筵檢討官 己巳奉正大夫行宝文關直提兼春秋編修官 庚午築別墅講學 丙子國事 〇〇特拝崇政判敦寧 十月帰鄕 御命賜鄱環 匡山下三十里置家兵三百 英庙道儒上䟽請額享道溪院 哲庙賜謚配三皇大報壇 命錄用祀孫 每年設忠良科試 命印進遺集 列朝崇典 士林尊衛之誠盛矣 自淪喪以來 院毁壇廢之〇以至 於公藏修別墅亦毁 而墟爲人所有徃歲 乙未諸宗 合議重建 齋舍名曰 廬山書堂 責余記事 余嘗敬閱遺集 与枽史 公之一言一行 莫非循義 而其一生樹立 有四大義理存焉 來裔之不可不知也 公早服襲皇考桐川先生之庭訓 年十九 贄拜寒岡鄭先生 聞大道之要 携書入匡山寺 靜坐力學 壬亂白衣倡義 赴火旺山城 与郭忠翼公再祐討賊 尋被薦 三年之間 朝命七及 甲午以李忠武公舜臣將薦 赴權忠武公慄陣 累立奇功 心剛意直光海 戊午廢母議決 公時宰慶興 辭官帰 而徃〇李相國恒福 䕶喪於北靑謫所 忤於李爾瞻 幾危僅免 是其一也 甲子适變 公爲都元帥張晩之右脇大將 住平壤 時李公胤緖 爲達适中軍陷賊中 如不得當 爲盡招李胤緖 潰陣歸順 挫賊勢 竟殪适于東郊 史氏擬一紙奪萬師之功 是其一也 卽謝帰鄕築別墅于 昌原匡山下中里 与趙澗松李益菴諸賢 講究心近諸書 左圖右書 盖公之功成恬退 不惟超然於爵祿之外 專欲溫燖舊學 以篤晩暮也 是其一也 丙子値南漢之恥 公年已耋 孤倡義旅 踰鳥嶺聞和 議成痛哭嘔血 左右舁還 復入匡山 憂憤成疾心終 是其一也 是以文正公許穆 撰銘曰忠不見功 廉不見容 直道在我 安且不慍 正純兩庙撰傳曰 自丙丁以後 嶺之秉義歿身者 惟鄭文簡外 朴判敦一人 而已皆實錄也 公之行蹟己載於國朝大史錄 責野錄 列朝官刷錄 朝野諿西征錄 倡義錄 李白沙北遷錄 金荷澤錄 權忠武幸州誌 張元師啓 趙澗松集 許眉叟記言 李大山集 南宜春君神道碑 李壯〇公神道碑 〇晉陽君神道碑 崔忍〇集 諸栗史 眇余小孫 何敢贅焉 爲祖建〇將使後仍訐百世之式〇〇忝于是爲記
庚子八月日 九世孫 永儀盥手 謹記

 

 

 

 

여산서당상량문(廬山書堂上樑文)

 

 

 

여산서당기(廬山書堂記)

 

廬山書堂記
往宣仁之際武肅公朴匡西先生 身致國家中興之業 意受勳封乃匹馬歸鄕里築 齋舍于廬山之下 講學十餘年矣 及値丙子胡亂擧義往征中途 聞和議成痛哭而歸後 入廬山齋恨以沒世 其後累經世故齋亦墟矣 今年春公之後孫懼先躅之終 泯於無徵而 以舊墟之狹且高卜 其下中里平衍地 重建是齋踰年 而工告訖乃名 其軒曰 不慍室曰 克己門曰 亦樂舍 而署之曰廬山書堂怡 公師事寒岡先生 學有淵源 德幾成就 不幸島夷之侵 逆适之反 西宮之變 南漢之辱 危亡荐至因有其 公敵丁是會所在盡義是 以沒世之後 多士建院 以尸祝焉列朝立專 以贊美焉從祀三皇大報墟 以闡揚焉崇報焉公之巍勳 卓第已顯于世矣 能獨公之平日所得於師門 而慍之爲德行 行之爲事業者 則知者盖鮮矣 眉叟許文正先生銘公之墓曰 忠不見功廉不見容直道在 我安且不慍竊嘗讀是銘 而演其義則非勇無以盡其忠非智無 以致其廉非熟於仁性直道在 我而無以安且不慍然 則文正一言三德修矣 夫賢傑之勒銘於鐘鼎遺芳於史冊 者今古何恨而至於業 有是三德則幾希矣 後君子貴其遺德遺德在講學 講學不可以無其所之公之當日齋於是 者爲講學也 爲後人者今築新於其址以此勉勵世世勿贊則眞可謂肯構矣 公之皇者桐川先生與音老祖笑軒先生交道雅重故先生嘗以詩道存兩家隣此誼者已久矣 公之胄孫性瑛嘗責余以記其事乃敢書所感如右云
丙申 春九月 咸安 趙大濟 記

 

여산서당기
지난 선조(宣祖)·인조(仁祖) 때 무숙공(武肅公) 박광서(朴匡西)선생은 몸을 국가중흥의 업(業)에 두었고 훈봉(勳封)¹⁾을 받을 뜻은 두지 않고 말을 타고 향리로 돌아와 려산(廬山) 아래에 재사(齋舍)를 지어 강학을 10여년 하였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의(義)를 품고 정벌하려 나아가는 도중 화의를 했다는 소문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 온 후 려산재(廬山齋)에 들어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여러 대를 지냈고 그런고로 재실 역시 황폐 되었다. 금년 봄 공의 후손들이 선조의 자취가 끝내 없어지면 증거가 없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옛터는 비좁고 또 높아 그 아래 중리의 평평한 넓은 땅에 다시 재실을 짓기 시작하여 한해를 넘겨 공사를 마쳤다. 이에 그 집을 불온실(不慍室) 극기문(克己門) 역락사(亦樂舍) 등의 이름을 붙이고 집 전채를 여산서당(廬山書堂)이라 하고 기뻐했다. 공은 한강선생을 스승으로 모셔 학문의 연원을 두었고 덕을 거의 성취했으나 불행하게도 도이(島夷)²⁾들이 침입하여 빠르게 거슬러 서궁(西宮)³⁾을 반대로 변하게 하고 남한산성이 욕되어 존망 위기에 이르렀다. 공께서는 이 회소재(會所在)⁴⁾에 나아가 의를 다하였다. 이 분이 세상을 떠난 뒤 많은 선비들이 원(院)을 세워 향사 드렸다. 왕조대대로 전하면서 아름답게 칭찬하였고 세 임금과 나란히 종사(從祀)⁵⁾되어 큰 은혜를 입었고 황폐된 옛 터도 열려 떨쳐졌다. 공의 탁월한 훈공은 세상에 이미 나타났다. 공께서 평소 능력이 특별하였음은 스승의 문에서 배움의 소득으로 덕행이 쌓였고 업을 위하여 덕을 행하는 자 곧 지혜로운 사람이니 대체 드문 것이 아니라 미수허 선생께서 공의 묘문(墓文)에 명하기를 “옛 충신 보지 못하고 청렴한 공로 보지 못하네, 용모 곧게 하여 내 여기 있는데 어찌 또한 알아주지 않는데도 성내지 않는가.”하였다. 내 일찍 이 묘갈명을 훔쳐 읽어 보았는데 그 의가 철철 넘쳐흘렀으니 용기가 아니고는 그 충을 다할 것이며 지혜가 아니면 그 청렴이 지극하지 못했고 인(仁)이 무르익지 안했으면 곧은 도가 있었으랴. 내 편하지 아니하여도 또한 성내지 아니했네. 라는 문정공의 한마디 말은 세 가지 덕을 닦았음이라 대저 현걸(賢傑)에게 종정(鐘鼎)⁶⁾에 명을 새겼고 지금이나 예나 지극히 행한 업에 무엇이 한이 되랴. 이 삼덕(三德)⁷⁾은 얼마나 바라는 것이랴. 군자들은 그 덕을 귀하게 여겼고 끼쳐진 덕은 강학하였고 강학은 그 장소가 없었으면 불가함이라 공께서 당일에 재(齋)에서 이런 것을 후인들을 위하여 강학하였음이라 지금 그 터에 새로이 집을 지어 강학에 힘써 대대로 바꾸지 아니하면 곧 참되게 집지었다 이를 것이다. 공과 같이 이름이 난 동천선생과 더불어 음노조소헌(音老祖笑軒) 선생은 도(道)로 시(時)와 도(道)로서 양가를 가까이 했으니 이 의(誼)는 이미 오래되었다. 공의 종손 성영(性瑛)이가 일찍 나에게 기문을 구하기에 그 사실을 쓰고 소감을 위와 같이 이르노라.
병신(丙申) 3월 9일 함안 조대제(趙大濟) 지음.

 

【주석】
훈봉(勳封)¹⁾ : 예전에, 봉작(封爵)과 증직(贈職)을 아울러 이르던 말.
도이(島夷)²⁾ : 왜구의 침입으로 발생한 임진왜란을 뜻한다.
서궁(西宮)³⁾ : 왕궁(王宮)을 뜻한다.
회소재(會所在)⁴⁾ : 임금이 회의를 하던 곳.
종사(從祀)⁵⁾ : 주인공인 임금과 함께 제사지냄을 뜻한다.
종정(鐘鼎)⁶⁾ : 공훈이 있는 자를 종(鐘)이나 솥(鼎)에 명을 새겨 기렸던 고사.
삼덕(三德)⁷⁾ : 슬기와 어짊과 용기라는 지인용(智仁勇)을 뜻한다.

 

 

 

 

불온헌(不慍軒) 편액

 

 

 

 극기실(克己室) 편액

 

 

 

 

 

 

출처 및 참고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2004.1)/삼덕정판인쇄사      
디지털창원문화대전-여산서당/최정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