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12 남계서원 동서재와 명성당 모습
‘함양 남계서원 풍영루와 묘정비 해문’이라는 글을 이미 발행했고 여기서는 동·서재의 설명과 남계서원의 기문을 해석해 본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 다음으로 서원으로서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의미 있는 서원이다. 현재 국가 사적 제499호로 2009년 5월 26일에 지정 되었으며, 주소는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1(원평리 586-1)이다. 정여창(1450~1504)을 기리기 위해 명종 21년(1566)에 사액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다가 1603년 복원되었으며, 1612년에 중건되었고 숙종 때 강익과 정온을 추가 배향하였다. 별사에는 유호인과 정홍서를 배향 하였다가 1868년에 별사를 훼철하였다.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과 사우 중의 하나이다.
연당과 남계서원 풍경
동재인 양정재와 애련헌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강당의 동쪽에 있으면 동재, 서쪽에 있으면 서재라 부른다. 이 명칭은 성균관에서부터 지방의 향교와 서원이 동일하다. 남계서원의 동재를 양정재(養正齋)라고 하는데, 이는 역경(易經)에 나오는 ‘교육을 함으로써 사람을 바르게 기르는 것은 성인의 공덕이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남계서원의 동·서재는 같은 구조로 지었는데 2칸의 건물 중 1칸은 온돌방으로 나머지 공간은 누마루로 되어있다. 동·서재의 누마루 영역은 지면으로부터 약 1m 높이로 들려있고 온돌방 영역은 축대를 높여 땅에 온돌을 놓고 누마루 아래에서 불을 지피도록 아궁이를 만들었다. 누마루의 영역에는 애련헌(愛蓮軒)이라 이름 붙었는데 정여창 선생은 송나라 때의 성리학자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設)』에 영향을 받아 매화와 연꽃을 사랑하여 이름을 동재에 애련헌, 서재엔 영매헌(詠梅軒)이라 편액 했다.
서재인 보인재와 영매헌
동재와 같은 구조인 서재는 보인재(輔仁齋)라 하는데 이는 논어에 나오는 ‘군자는 글로서 벗을 사귀고 벗으로서 인을 돕는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누마루 영역에는 영매헌(詠梅軒)이라 편액 했다. 영매헌과 애련헌 앞쪽 아래에는 장방형의 연못을 파서 누마루 위에서 연을 구경하고 매화를 노래할 수 있도록 건설했다.
주 강당인 명성당
남계서원의 주건물인 강당은 명성당(明誠堂)이라 이름하고 중용에서 ‘참된 것을 밝히는 것을 가르침이라 하니, 참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참되게 된다.’라는 뜻이다. 1559년에 완성 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와가이다. 중앙 2칸은 대청마루이고 양쪽 각 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온돌방의 오른쪽 방 앞에는 거역(居敬)이라 편액 하여, ‘경(敬)에 거(居)해서 이(理)를 깊이 연구한다.’는 뜻이고 동쪽 방은 집의(集義)라 편액 하여 ‘호연지기는 도(道)와 짝이 되는 의(義)를 축적해야 생기는 것이다.’라는 뜻을 담았다.
명성당
거경재
집의재
남계
서원
강당의 앞쪽에는 남계(蘫溪)와 서원(書院)이라는 편액을 분리해서 달았는데 서원이란 글자의 말미에 「가정사십오년 병인칠월일 선액(嘉靖四十五年 丙寅七月日 宣額)」이라는 글씨가 있다. 이는 명종 21년(1566) 병인 7월에 명종으로부터 개암(介菴) 강익(姜翼)이 사액을 받은 서원이라는 것이다.
[원문]
蘫溪書院誌卷之一
蘫溪書院記 姜翼
夫道之在天下混論磅礴悠久不息其來也無始其往也無終 大哉道之爲道也上而天下而地日月之代明寒暑之錯行山 之所以峙河之所以流禽獸之飛走也草木之榮枯也洪纖高
下各正性命者是道而已人生於天地間得是道而爲人參三 才而中立備萬物一心天之所以與我者厚而道之所以行者 亦人而已噫斯道之熄久矣惟我文獻公後程朱而挺生於東 國傳不傳之學明久晦之道允蹈實踐而所以力行者篤精詣 深造而所以體認者至和順積中而闇然日章英華發外而粹 然體胖其眞積力久之功心得躬行之實寔千載之眞儒也百 世之師表也天之生夫子旣非偶然而天之禍夫子又何至是 哉使天而行夫子之道庶幾世唐虞人程朱而嗟天之厄夫子 之道徒使塞之鍾竝聲於宋之涪天乎天乎斯道之將喪乎噫夫 子之歿五十稔于玆而夫子之祠尙有闕然顧非吾郡之深羞而 亦豈非吾道之深恫哉昔程朱于歿而學者慕之一嘯詠一遊 息之地無不起院而祀之秉彝好德之天自有不容誣者況夫
子之鄕乎幸我諸君子協心同志始事於壬子訖功於辛西首 尾十年凡指揮籌度之勤實我三侯之掌中耳始焉厄夫子俾 不克展其所蘊而終焉惠三侯而祠夫子使後學知有依歸天 之意亦有在也耶余之生後於夫子雖未及摳衣於夫子之門 聞夫子之遺風服夫子之遺訓竊自振勵圖所以不獲罪於夫 子之道而倀倀末學(扌+適)埴迷途者久乃今設夫子之廟祀夫子 之靈而盈庭章甫升降有次拜揖進退怳然若列侍函丈親承 警欬立懶起敬之間藹然有自得之樂則凡我後學之所以激 勵其節操鼓舞其性情者未必不在於斯矣吁亦幸矣哉祠宇 與講堂曁東西齋及乎前門總三十餘間諸君子以余爲首事 請記其顚末且名其齋舍辭不獲謹識其立院之意而遂名其 講堂曰明誠取中庸明則誠之意也堂之夾室左曰居敬右曰
集義取程訓之居敬窮理鄒經之集義以生之旨也齋之室東 曰養止取義於蒙以養正也西曰輔仁取義於以友輔仁也齋 之二軒曰愛蓮曰詠梅前之大門曰遵道名各有義而宣額 曰灆溪書院院在蘫溪之上也噫書院之設於吾東者周茂陵 竹溪之後始興於斯吾儕僭踰固所難逃而三侯之誠意旣極 繾綣朝家之恩典又已炳煥其衛吾道扶世敎而啓迪乎我 民吁亦韙矣哉惟願諸君之居是院者感三侯尙賢之誠慕夫 子倡道之風不徒慕之而思所以學其道不徒學之而思所以 盡其道體夫子沈潛精密之功勵夫子篤實剛毅之志而藏修 於斯涵養於斯于以審動靜存省之際而變化其氣質于以察 性情隱微之間而薰陶其德性則庶幾夫子之道賴以不墜而 蔚然多士之有興矣於是乎始無負於三侯而吾儕之僭踰亦
有裨於國家右文之萬一爾嗚呼可不勉哉三侯爲誰徐公九 淵尹公確金公宇弘也各以儒行著于時
[해문]
남계서원기(灆溪書院記) 강익(姜翼)
도(道)가 천하의 모든 사물과 하나가 되어 두루 없는 곳이 없어서 영구히 없어지지 않는지라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니, 도가 도 됨이 참으로 크도다.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땅, 해와 달이 교대로 밝혀 주는 것,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행하는 것, 산이 솟아난 것, 물이 흐르는 것, 금수가 날고 달리는 것, 초목이 번성하고 시드는 것 등 크고 작고 높고 낮은 온갖 만물이 저마다 자기의 성명(性命)을 받아 사는 것이 모두 이 도일 뿐이다. 사람이 천지 사이에 태어나면서 이 도를 얻어 사람이 되어, 삼재(三才)에 참여하여 가운데 서고 만물을 한마음에 갖추고 있으니,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 후하나 도가 행해지는 것은 또한 사람에게 달렸을 뿐이다.
아, 사도(斯道)가 사그라진 지 오래되었다. 우리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이 정주(程朱)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에 태어나서 전하지 않는 학문을 전하고 오래도록 어두워진 도를 밝혀, 진실하게 실천하여 힘써 행한 것이 돈독하였고 정미롭게 나아가서 체인(體認)한 것이 지극하였다. 그래서 화순(和順)이 마음속에 쌓여 암연(闇然)히 날로 드러났고 영화(英華)가 밖으로 드러나 수연(粹然)히 몸이 펴졌으니, 오래도록 수양한 공부와 마음으로 체득하고 몸소 행한 실상은 실로 천년의 진유(眞儒)이며 백세의 사표(師表)이다. 하늘이 부자(夫子)를 낳은 것이 이미 우연한 일이 아닌데 하늘이 부자에게 재앙을 끼친 것이 또 어찌 여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늘로 하여금 부자의 도를 행하게 하였다면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의 세상을 만들고 정자와 주자 같은 사람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부자의 도를 곤액스럽게 하여 종성(鍾城)으로 귀양 가게 한 것이 송(宋)나라 정이천(程伊川)이 부주(涪州)로 귀양 간 것과 풍성이 똑같으니, 하늘이여, 하늘이여, 사도를 장차 없어지게 하려는 것인가.
아, 부자가 돌아가신 지 이제 50년이 되었는데 부자의 사당이 아직도 없으니, 우리 군(郡)의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으며, 또한 어찌 우리 도(道)의 매우 애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옛적에 정자와 주자가 돌아가시자, 학자들이 사모하여 한 번 읊조리고 한 번 유식(游息)하였던 곳에 모두 서원(書院)을 건립하여 제사 지냈으니, 덕(德)을 좋아하는 타고난 떳떳한 본성에 절로 속일 수 없는 점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부자의 고향에 있어서이겠는가. 다행히 우리 군자들이 마음을 합치고 뜻을 함께하여 임자년(1552, 명종7)에 일을 시작하여 신유년(1561, 명종16)에 일을 마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10년 동안 이 일을 부지런히 지휘하고 계획한 것은 실로 우리 삼후(三侯)가 담당하였다. 처음에는 부자를 곤액스럽게 하여 가슴속에 품은 뜻을 펼칠 수 없게 하더니, 끝에는 삼후를 내려 주어 부자를 사우(祠宇)에 모시게 하여, 후학으로 하여금 의지하여 돌아갈 곳을 알게 하였으니, 하늘의 뜻이 또한 의도가 있는 것인가?
내가 부자보다 뒤에 태어나서 비록 부자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지 못하였으나, 부자의 유풍(遺風)을 듣고 부자의 유훈(遺訓)을 가슴속에 간직하여, 스스로 면려하여 부자의 도에 죄를 얻지 않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대는 후학은 소경처럼 길을 헤맨 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부자를 모신 사당을 설립하여 부자의 영령께 제사를 지내는데, 뜰에 가득한 선비들이 오르내리는 데 차례가 있으며 절하고 읍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매 어렴풋이 강석(講席)에 나란히 모시고 직접 가르침을 받는 듯하다. 나태한 마음을 일깨우고 공경한 자세를 일으키는 사이에 성대히 자득(自得)한 즐거움이 있다면, 무릇 우리 후학이 그 절조(節操)를 격려하고 성정(性情)을 고무하는 것이 필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 또한 다행이로다.
사우와 강당(講堂) 및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전문(前門)이 총 30여 칸인데, 여러 군자들이 내가 일을 주관했다고 하여 그 전말을 기록하고, 또 그 재사(齋舍)에 이름을 붙이기를 청하였다.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서원을 세운 뜻을 삼가 기록하고, 드디어 그 강당을 ‘명성(明誠)’이라 하였으니, 《중용(中庸)》의 밝게 되면 정성스럽게 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당(堂)의 협실(夾室)은 왼쪽을 ‘거경(居敬)’이라 하고, 오른쪽을 ‘집의(集義)’라고 하였으니, 정자(程子)의 말씀인 거경궁리(居敬窮理)와 《맹자(孟子)》의 의(義)를 많이 축적해서 생겨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재(齋)의 동쪽 실(室)을 ‘양정(養正)’이라 하였으니, 어려서 바른 도리로 기른다는 것에서 뜻을 취하였고, 서쪽 실을 ‘보인(輔仁)’이라고 하였으니,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는 것에서 뜻을 취하였다. 재의 두 헌(軒)을 ‘애련(愛蓮)’이라 하고, ‘영매(詠梅)’라고 하며, 앞쪽의 대문을 ‘준도(遵道)’라고 하였으니, 명명한 것이 각각 의의가 있다. 선액(宣額)을 ‘남계서원’이라고 하였으니, 서원이 남계 가에 있기 때문이다.
아, 우리나라에 서원이 설립된 것은 주무릉(周武陵 주세붕(周世鵬))이 죽계(竹溪)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한 것이 시초인데, 이후 처음으로 이곳에 서원이 세워졌으니, 우리들의 참람하고 주제넘은 잘못은 실로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삼후(三侯)의 성의가 이미 매우 정성스럽고 조정의 은전이 또 이미 밝게 빛나니, 오도(吾道)를 보호하고 세교(世敎)를 부지해서 우리 백성을 가르쳐 인도할 것이다. 아, 또한 위대하도다.
오직 바라건대, 이 서원에 거처하는 제군(諸君)은 삼후가 현인을 숭상하는 정성에 감격하고 부자가 도를 창도한 풍성을 사모하라. 사모할 뿐만 아니라 그 도를 배우기를 생각하고, 배울 뿐만 아니라 그 도를 다하기를 생각하라. 그리하여 부자의 잠심(潛心)하고 정밀(精密)한 공부를 체득하고 부자의 독실(篤實)하고 강의(剛毅)한 뜻에 힘써서, 여기에서 장수(藏修)하고 여기에서 함양(涵養)하라. 이에 동정(動靜)과 존성(存省)의 사이를 살펴 그 기질을 변화시키고, 이에 성정(性情)과 은미(隱微)의 사이를 살펴서 그 덕성을 훈도(薰陶)하라. 그리하면 거의 부자의 도가 여기에 힘입어 실추되지 아니하여 성대하게 많은 선비가 흥기함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고서야 비로소 삼후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들의 참람하고 주제넘는 잘못도 국가의 학문을 높이는 정사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이니, 아, 어찌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삼후는 누구인가? 서공 구연(徐公九淵), 윤공 확(尹公確), 김공 우홍(金公宇弘)이니, 각각 유행(儒行)으로 당시에 드러난 사람들이다.
蘫溪書院誌卷之二
介菴姜先生年譜節略
中宗十八年癸未正月十八日先生生于咸陽郡孝友村三十二 年丁酉以大人承仕公命就學於唐谷鄭希輔之門學業大進 唐谷嘗稱於人曰龍之飛鳳之鳴固不待習熟而能此子之變 化氣質若是之速也持養有方學術益明梁九拙喜盧玉溪禛 李靑蓮後白諸賢共爲道義之交往來切磋硏賾義理之奧焉
明宗三年戊申築小齋于宅之南扁曰夙夜齋以爲藏修之所七 年壬子始創蘫溪書院八年癸丑遊登龜愛其宅幽勢阻買田 結茅以爲終老之計別搆小齋扁曰養眞記在本集十一年丙辰與 吳德溪健林葛川薰論學曰學貴自得非自得者易至差失十 三年戊午學易于南冥曺先生之門二十二年丁卯吳德溪薦 先生學行于朝除昭格署參奉先生養志守義不喜仕進以 家貧親老將理肅行忽感疾而卒
宣祖十四年辛巳享于新溪祠
仁祖十二年甲戌移享蘫溪別祠
肅宗十五年己巳陞配
蘫溪書院誌卷之一
告先生文 介菴別廟奉安時 鄭弘緖
於惟先生啓佑我鄕粵有介菴慕深羹墻造詣旣深且陞血食 迺及玉溪座連香卓事有刺謬遠近情苑爰立別廟于此墻東 事關啓奏雖未同宮若承函丈亦非偶然玆當始安謹告厥緣
출처 및 참조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蘫溪書院誌卷之一 남계서원기(灆溪書院記)/강익(姜翼)
남명학고문헌시스템-경상우도지역 기록류/ 蘫溪書院誌卷之一
한국서원이야기-남계서원지(전문)/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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