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킨 흥인지문(동문)

천부인권 2019. 6. 3. 23:14



2019.5.30. 한양의 4대문 중 동문인 흥인지문 모습


제주도가 출장지인줄 잘 못 알고 준비를 하다가 문자로 온 안내문을 보니 성균관이 교육 장소라 급히 목적지를 변경했다. 그러고 나니 서울로의 여행을 탐탐찮게 여기는 아들을 설득하여 겨우 KTX에 올랐다. 전번에 동묘(東廟)시장에 대한 소개를 보고 어떤 모습인지 여행지로 잡고 서울에 도착하여 동대문시장과 옛 한양의 도성을 지키던 흥인지문을 볼 겸 지하철로 이동하여 동대문에 내려 첫 번째 목적지 흥인지문을 보게 되었다. 한양 거리를 지나면서 본적은 있지만 직접 목적지로 잡고 접근하기는 처음이다. 막상 접근하니 지금까지 몰랐던 흥인지문(興仁之門)의 모습도 볼 수 있었고 무너지지 말라고 보수를 한 모습이 애처롭게 보이기도 했다. 흥인지문은 아래쪽 부분은 돌을 다듬어 건설했고 옹성의 위쪽 전투영역은 벽돌로 만들었다. 옹성이 있는 방향에 ‘興仁之門’이라는 편액을 볼 수 있다.





문루로 오르는 쪽의 계단이 있는 외벽에 일본식 성곽을 쌓는 방식인 15도 경사각이 있는 방식의 성곽을 쌓은 부분이 있어 조선시대의 성곽은 항상 직각으로 쌓는 다는 생각을 수정케 되었다. 옹성이 있던 부분 외에는 전투를 하던 윗부분도 정교하게 돌을 다듬어 쌓았다.




흥인지문의 내부에서 바라 본 모습


한양 종로구 종로 288번지에는 왜놈에 의해 ‘보물 제1호’로 번호가 매겨진 조선시대 4대문 중 동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이 있다. 흥인지문 앞 안내판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흥인지문은 조선 초부터 창건하기 시작해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다. 당시의 문루에 붙인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흥인(興仁)’이란 어진 마음을 북 돋운다는 뜻으로, 유교사상의 덕목인 ‘인(仁)’을 의미한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흥인문이 크게 손상되어 정비할 때에, 풍수지리상 한양의 동쪽이 비어있다고 하여 ‘지(之)’자를 넣어 무게감을 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등 현판이 세 글자인 다른 도성의 사대문과 달리 네 글자 현판을 달게 되었다.」¹⁾ 지금의 문은 1869년(고종 6)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당시 한양 성곽에 4개의 대문(大門)과 4개의 소문(小門)을 세웠다. 동서남북의 4대문에는 각각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글자를 한자씩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그 중 동쪽의 대문을 흥인문(興仁門)이라 했다. 동문인 흥인지문은 남문인 숭례문과 더불어 규모가 가장 큰 성문이다. 성벽과 이어진 축대에 아치형의 통로를 내고 그 위에 문루(門樓)²⁾를 세워 성문을 만들었다. 성문 가운데 문루를 2층으로 만든 것은 숭례문과 흥인지문 밖에 없다. 문루는 문을 지키는 장수가 머무는 곳으로 유사시에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했다. 문루 바깥으로는 벽돌로 된 담장과 나무판으로 된 창문을 설치해서 적을 막는데 유리하게 했다. 흥인지문의 전체 구조는 간단하지만 장식이 많은 19세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반영한다. 또 흥인지문의 앞에 적을 막기 위한 반달 모양의 옹성(甕城)³⁾을 둘렀는데 이는 한양 성문 가운데 유일하다.』


【주석】
「‘흥인(興仁)’이란...」¹⁾ : 다음백과/흥인지문
문루(門樓)²⁾ :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으로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공간은 아니다.
옹성(甕城)³⁾ :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큰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옹기 같은 모양을 한 성곽.





흥인지문의 안쪽 정면에서 문을 보니 출입문의 위쪽은 옹성의 윗부분과 마찬가지로 벽돌로 쌓았고, 성곽이 벌어져 철로 벌어진 부분을 이어 놓고 있다.


성곽 순례길이 있는 도로 맞은편에는 석성을 다시 쌓아 한양이 성곽의 도시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곽 순례길 위쪽으로 올라 흥인지문을 보니 옹성의 모습과 내부에서 문루로 오르는 돌계단이 확실히 보인다. 지방에서 한양구경을 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특별히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다면 그냥 지날 뿐이다.
조선의 서울 한양은 성곽의 도시이다.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를 겪고 경제발전만이 오로지 살길인 것으로 알고 달려 왔지만 지금에서야 관광이 어줍잖은 공장보다 훨씬 경제적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양은 조선의 서울이다. 조선의 고급문화를 성곽과 함께 살린다면 한류라는 새로운 상품을 탄생케 할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