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북면 하천리 김녕김씨 삼사재 三斯齋

천부인권 2019. 6. 25. 19:22



2019.6.25 창원 북면 하천리(대촌마을) 김녕김씨 삼사재


제목   : 삼사재(三斯齋)
소재지 : 경남 창원시 북면 하천리 341-1
좌표와 고도 : 해발 33m에 위치하고 「위도 35°22′05″N 경도 128°36′22″E」이다.
백촌 김문기(白村 金文起)의 후손이 창원으로 입향한 선조는 김운리(金雲漓)이다. 백촌의 8세손이고, 영수(永守)공의 증손이다. 1629년에 출생했고 성년이 되어 영동에서 창원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창원문중의 입향조가 된다. 북면 하천리(北面 下川里) 341-1번지 터에 공을 위시하여 시남(時南), 계신(繼新), 연홍(璉弘) 등 4대를 모시기 위해 지은 재실이 삼사재(三斯齋)이고 기문은 성순영(成純永)이 지었다. 공의 묘는 창원시 동면 신방리 간좌(艮坐)에 있다.
이 삼사재는 1909년 김형대(金炯大)의 공적을 기리고 향사하며 후손들이 돈목할 수 있도록 건설한 건물이다. 김형대(金炯大)의 불망비는 삼사재의 동북쪽 1.5km 지점인 낙동강을 마주보는 곳에 위치해 있다. 또한 김녕김씨 애국지사 김진훈묘(愛國志士 金鎭焄墓)와 불과 40m 거리에 위치한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옛 건물의 모습은 목조와가(木造瓦家)였는데 현재의 건물은 현대식 벽돌석조 건물로서, 정면은 3칸이나 측면은 1칸으로 이루어진 와가(瓦家)이다. 이 집안에서는 현재 창원향교에 출입하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향사는 10월에 한다고 전한다. 이 건물은 2008년에 중수한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하산 성순영(夏山 成純永) 쓴 삼사재 기문(三斯齋 記文) 걸려 있다. 그 원문과 해문은 아래와 같다.




삼사재(三斯齋) 편액



[원문]
三斯齋記文
昔趙文子成室張老發爲曰歌於斯哭於斯聚國族於斯君子謂之善頌此三斯齋之所以名也齋昌原府北三十里夾江負山而村者曰下川里居金寧金氏自同九世以下之墳庵也齋凡四架五楹旣哉金寧君珙桓造余言曰吾先祖白村先生忠毅公立節故韓端宗朝實通國所共知而大禍之餘子孫奔癙幾絶僅續吾族之入仍散處郡內累世封瑩相望鄕佫例起齋舍以爲歲祭齋宿及敎子弟接賓友之所而吾族獨缺焉珙桓爲是之慨乃倡諸族課建是齋辛勤拮据修巳告訖請子名而記之余曰有是哉子之誠若矣而子之事美矣乃擧張老之頌名之如上而又復引伸其詋以復於君曰夫宗族之吉凶相慶吊相聚而修敦睦固人道之當然而實則本於懷瞻相先追遠敬止次及同出之枝葉約而言之不外乎孝之道也顧今風潮翻蕩○倫日數而金氏乃能建立斯齋以爲寓慕本根興起門戶之圖於此時則其亦異於世佫之爲而遠無忝於白村先生移孝之忠義也豈止爲瞻慕於九世之近祖云巳哉吾願諸金氏益篤今日之志顧思名齋之義而必有事焉則表後之昌熾可執契而竢也珙桓君軒昂有意氣興人交摰而有言白村先生之宗宅在數百里之遠每祠庙有事不憚奔走歲率徍還一二期爲先敬宗盖所性然也
丙申 中秋節
夏山 成純永 記


[해문]
삼사재기문(三斯齋記文)
옛 조문자(趙文子)가 재실을 완성하니 장노(張老)가 송축하기를 『여기에서 노래하며 여기에서 곡을 하며 나라 안에 있는 종족이 여기에서 모인다.』고 하자, 군자(君子)들이 모두 선송(善頌)이라고 칭찬하니 이 때문에 재명을 삼사재(三斯齋)로 지은 것이다. 이 재실은 창원부(昌原府) 북쪽 삼십리(三十里) 쯤에 있는데 강을 끼고 산을 등진 마을이 하천리(下川里)로 김녕김씨가 九세이하(九世以下)를 제사 모시는 재각이다. 재실은 4칸(四間) 겹집으로 이미 준공을 하고 진환(珙桓)이 내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 백촌선생(白村先生) 충의공(忠毅公)께서 단종조(端宗朝) 때 육신(六臣)의 영도자로 입절(立節)하신 것은 실로 온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 큰 화(禍)를 당한 후로 자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도찬하여 거의 끊어질 뻔 하다가 겨우 대(代)를 이을 수 있었다. 우리 일가들도 군내(郡內)에 흩어져 살면서 여러 대에 걸쳐 묘소들이 서로 마주 바라보인다. 다른 가문(家門)에서는 재사(齋舍)를 지어 세제(歲祭) 때 재숙(齋宿)을 하고 자제(子弟)를 가르치며 손님들을 접대할 장소를 마련하였으나 우리 일가들만 홀로 재실을 갖추지 못하였다. 진환(珙桓)이 이를 개탄하여 종족들을 설득하여 이 재실을 건립키로 하고 갖은 고난(苦難)을 극복하면서 준공을 하였으니 청컨대 그대가 이름을 짓고 기문을 써 달라.』고 하기에 내 이르기를 『이런 일이 있었느냐 자네의 성의가 이와 같으니 자네의 사업(事業)이 또한 아름답도다!』 하고 장노(張老) 송축(頌祝)하던 사례(事例)를 들어 재실 이름을 삼사재(三斯齋)라 하고 다시 그 송설(頌說)을 인용(引用)하여 말하기를 『무릇 종족(宗族)들은 길흉사(吉凶事)에 서로 경축하며 조문을 하고 서로 모여 돈목(敦睦)을 도모하는 것이 진실로 인도(人道)의 당연한 도리이다. 그러나 사실은 조선(祖先)을 첨앙하고 공경하며 다음으로 동족(同族)에게 우애할 것이니 요약하여 말하면 모두 효도가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이제 세상이
어지럽고 인륜(人倫)이 날로 퇴폐해 가는 이때에 김씨(金氏)가 능히 이 재실을 건립하여 조선(祖先)을 추모하고 문호(門戶)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니 또한 세속(世俗)들이 하는 일과 크게 다르며 멀리 백촌선생(白村先生)의 충효(忠孝)에 욕됨이 없을 것이니 어찌 9세(九世)의 근조(近祖)만을 첨앙한다고 하겠는가. 원컨대 모든 김씨(金氏)들은 오늘날의 뜻을 더욱 돈독히 하고 재실 이름의 의의를 생각하여 선업(先業)을 계술하면 후세(後世)의 창성함을 가히 보증하여 기대 할 것이다. 진환군(珙桓君)은 포부가 넓고 의기(意氣)가 있어 사람을 사귈 때 진지하고 의리(義理)를 지키며 백촌선조(白村先祖)의 종택(宗宅)이 수 백리 밖에 있는데도 묘사(廟祠) 때마다 빠진 적이 없으며 매년(每年) 두세 번씩 참배하니 선조(先祖)를 위하고 종족을 공경함은 그의 천성(天性)이기 때문이다.
하산 성순영 기(夏山 成純永 記)




2019.6.25 하천리(대촌마을) 삼사재 상량문



김녕김씨 삼사재의 주련


念爾祖聿修厥德  조상을 잊지 아니하려거든 항상 덕(德)을 닦아 마음을 길러야한다.
張老頌于歌是聚
采蘋蘩薦以馨香
斯干詩苞竹茂松





출처 및 참조
김녕김씨충의공파 대종회-창원 문중 운리(雲漓)공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삼사재(三斯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