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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면 신촌리 창원황씨 추모재 追慕齋

천부인권 2019. 6. 28. 07:45



2019.4.11북면 신촌리 창원황씨 추모재 입구



추모재 앞에 있는 첨정통정형제이공유허기념비(僉正通政兄弟二公遺墟記念碑)


僉正通政兄弟二公遺墟記念碑
僉正公 諱龍潑 字在天 號義窩 通政公 諱世潑 字在昊 號剛窩 性黃氏 其先昌原入 高麗侍中 諱忠俊 爲初祖自後嵬勳碩甫聯世赫烜入李氏 朝鮮有 諱舜卿 贈寧敦令封檜原府院君 是爲中祖生 諱璘僉正 贈左承旨會祖曰 敏中 大父曰 後南 號耕隱 父曰 武應嘉善 妣密陽朴氏以 肅廟月日兄弟 次第生于昌原郡新里村善 是嘉善公己自京移居 是村故也 及長兄弟篤友勤學孝于 父母睦於宗族建塾延師聚子弟 授業文風菀興丕變貿俗遯晦林泉悠然有物外之相 而枕被湛翕壎箎 吹 和怡怡然以樂之寔 爲黃氏中葉奠基之祖 以景廟月日 伯公先卒 贈僉正未幾李公 亦考終耆爵 通政葬所居靑龍嶝亥原 及文境峴辛坐阡 伯公配密陽朴氏 海州吳氏 育四男二女 男宇昌 得昌 啓昌 益昌 金 孫其二女壻也 李公配水原白氏無育取兄子得昌 爲嗣孫男厚德 厚寬 宇昌出原權 厚邦 厚桓 啓昌出厚榮 厚宅 厚根 厚哲 得昌出厚載 益昌出雲仍之居新里者 將樹兩公記念碑於齋舍之側遣 六世孫錦朱持狀謁銘于不侫辞不得因銘之曰
檜原之黃其來自京王麗李鮮世篤簪纓逮至二公克紹先聲金昆玉李難弟難兄遯晦林 泉樂在讀耕天馬之陽水麗山明聿胥奠基載經載營苗裔蕃殖門戶昌成山南月朝藉菀 有評伐石記念玉珉其貞銘以闡楡百世輝生
丙辰秀葽月下澣
漢山 安鍾禧 撰
後孫   明秀 謹書
後孫   哲善
後孫   河秀


[해문]
첨정통정형제이공유허기념비
첨정공(僉正公)의 휘는 용발(龍潑), 자는 재천(在天)이며, 호는 의와(義窩)이다. 통정공(通政公)의 휘는 세발(世潑)이고, 자는 재호(在昊)이며, 호는 강와(剛窩)이다. 성(姓)은 황씨(黃氏)인데 그 선조는 창원인(昌原入)이며, 고려시중(高麗侍中) 휘 충준(忠俊)이 시조이고 그 후로 높은 훈신(勳臣)과 보좌(補佐)의 고관(高官)이 세대로 이어져 환희 빛났으며 이씨 조선에 들어서 휘 순경(舜卿)은 증직(贈職)이 녕돈령(寧敦令)인데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으로 봉군(奉君) 되었으니 이로서 중조(中祖)가 되셨다. 생휘(生諱) 린(璘)은 첨정(僉正)으로 증직(贈職)은 좌승지(左承旨)이며, 증조는 해중(敏中)이고, 조부의 휘는 후남(後南) 호는 경은(耕隱)이고, 고(考)는 무응(武應)인데 가선대부(嘉善大夫)이며, 부인은 밀양박씨(密陽朴氏)인데 숙묘시(肅廟時)에 형제를 창원군 신리촌(昌原郡 新里村)에서 출생하셨다. 이에 앞서 가선공(嘉善公)은 경제(京第)에서 이곳에 이거(移居)하셨다. 형제는 성장하면서 우애가 돈독하고 학업에 근실(勤實)하였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종족(宗族)에게는 돈목(敦睦)하였다. 서숙(書塾)을 짓고서 스승을 초숙(招塾)하여 자제(子弟)를 모아 수업하니 문풍(文風)이 울흥(菀興)하게 되고, 무무(貿貿)한 습속을 변화시켰으며, 자취를 임천(林泉)에 감추어 물질에 대한 욕구를 초월해 유연(悠然)하였고 침금(枕衾)을 같이 하는 우의(友誼)와 백공(伯公)이 취훈(吹壎)하면 계공(季公)이 취호(吹箎)하듯 하여 화기(和氣)가 넘침을 낙으로 삼았으니 이가 바로 황씨(黃氏) 중엽(中葉)에 터전을 잡은 조상이다.
경종(景宗)의 어떤 월일에 백공(伯公)이 먼저 돌아가시니 증직(贈職)은 첨정(僉正)이며 얼마 후에 계공(季公)이 또한 고종(考終:사람이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음)하시니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다. 장례는 평소에 살았던 마을의 청룡등(靑龍嶝) 해원(亥原)과 문경현(文境峴) 신좌원(辛坐原)이다. 백공(伯公)의 배우자는 밀양박씨(密陽朴氏)와 해주오씨(海州吳氏)로 4남 2녀인데 우창(宇昌) 득창(得昌) 계창(啓昌) 익창(益昌)이며, 여서(女壻:딸의 남편)는 김,손씨이다. 계공(季公)의 배우자는 수원백씨(水原白氏)이며 자식을 기르지 못해 형의 아들 득창(得昌)을 사자(嗣子: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로 하였으며 손남(孫男)에 후덕(厚德) 후관(厚寬)은 우창(宇昌)의 소생이며, 원권(原權) 후방(厚邦) 후환(厚桓)은 계창(啓昌)의 소생이고, 후영(厚榮) 후댁(厚宅) 후근(厚根) 후철(厚哲)은 득창(得昌)의 소생이고, 후재(厚載)는 익창(益昌)의 소생이다. 자손으로 신리에 거주하는 자가 장차(將次) 양공(兩公)의 기념비(記念碑)를 재사(齋舍)의 곁에 세우려 하니 6세손 금주(錦朱)가 사상(事狀)을 가지고 와서 명(銘을) 청하였는데 사피(辭避)할 수 없으니 명하여 말하기를 왕씨고려(王氏高麗) 이씨조선(李氏朝鮮) 세세잠영(世世簪纓) 이어져서 양공시대(兩公時代) 이르도록 선세가성(先世家聲) 능계(能繼)했고 김곤옥리(金昆玉李) 전문(傳聞)이라 우렬(優劣)하다 가릴것가 임천(林泉)에 자취숨겨 주경야독(晝耕夜讀) 낙삼았네.
천마(天馬)의 양지쪽에 수명산자(水明山紫) 명당 잡아 서우(胥宇)지어 율수(聿修)하심 전기경영(奠基經營) 몇 해던가. 뿌리 내린 자손번영 문호(門戶)열려 창성하니 산남(山南)사람 월긍평(月亘評)에 자주들 거론하네. 양공사적(兩公事蹟) 기념 위해 굳은돌을 다듬어서 명을 새겨 천양(闡揚)하니 백세로 빛나리라.
1976(병진)년 4월 하한에
한산   안종희(安鍾禧) 짓다.
후손   명수(明秀) 삼가 쓰고
          철선(哲善)
          하수(河秀




외삼문인 성추문(省楸門)


창원시 의창구 북면 신촌리 765번지에 위치한 창원황씨 추모재(追慕齋)는 마을길보다 약간 언덕을 이룬 곳에 위치하며 추모재의 외삼문인 성추문(省楸門) 옆 입구에는 한산 안종희(漢山 安鍾禧)이가 기록한 『첨정통정형제이공유허기념비(僉正通政兄弟二公遺墟記念碑)』가 서있다.
성추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추모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 와가로 우측 3칸은 방을 마련해 두고 있다. 3칸의 방에는 역락헌(亦樂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여재실(如在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별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와가이다. 현재 집안에서 창원향교에 출입하는 사람은 없고 향사는 음력 3월 25일이다.




성추문(省楸門) 편액



성추문(省楸門)에 붙은 주련


浩刼幾經桑海月  재난을 몇 번 겪은 동쪽 바다 달이고    
始源元自檜山春  첫 원류 원래부터 창원 땅 봄이로다.
山鍾淑氣當門立  산종소리 맑은 기운 문 앞을 맡았고      
江斗祥光抱檻來  강 자락에 서광은 난간 안고 오도다.

[해문-백촌거사/김창현]




추모재(追慕齋) 정면


추모재 내부에는 1908년 10월에 방후손(傍後孫) 황기연(黃耆淵)이 기록한 “추모재기(追慕齋記)” 기문과 분성 김종하(盆城 金鍾河)가 1964년 5월에 기록한 “추모재기(追慕齋記)”도 있다. 또한 상주 주시호(尙州 周時顥)가 쓴 추모재상량문(追慕齋上梁文)의 편액도 걸려 있다.





追慕齋記
子孫之追慕祖先在所固然 而若夫祖先積德貽謨 爲始基之祖者 則其子孫之慕之也 尤篤焉故爲其後承者 就於其墓下 而齋焉亦於其集居之里 而健斋以寓慕焉此實民彞之不容己焉也 顧今世降俗壞倫綱日墜於地 而此風則猶不斬焉追先寓慕之斋在在相望于 以見秉彛之極天罔墜也 郡北之新里 爲黃氏集居之里盖自 僉正諱龍潑始基焉僉正之祖曰 後楠 號耕隱 自京移居于漆原至僉正 而又移居于玆里 諱宇昌 得昌 啓昌 益昌 其四子也 自後世居于玆里 生齒日蕃今至百餘戶矣 舊有斋頗病湫隘四間之斋于里 後仍舊貫扁之以追慕 遣八世胄孫碩圭請余爲記 余方杜戶傷時不喜作應酬之文 而其請愈懇有不容 自外者夫追先之道 不特在於歲時蘋薻之虔薦 而巳其於團圓聚會之際 互相勉之以孝悌忠信之道 敦睦之風洋溫門欄俾世之人 咸稱僉正之克有後則名斋之義於是焉寊不虛矣 乃書此以屬望焉
甲辰五月日
盆城 金鍾河 謹記





追慕齋記
我黃之居檜山者 祖高麗侍中 諱忠俊 而入我祖有 諱舜卿 官內資 副正 封檜原府院君 而世爲京居仕 族之僉正公 諱龍潑 移寓于檜之治北麻姑山下新里村 而子姓自成一村焉僉正以下五六世墳墓亦在村俊 而世守淸貧未遑墓閣之建築雲仍齎鬱數百年至 僉正六世孫嘉善鍾奎益切追慕之志結構未就 而臨終命其子龜淵曰汝雖 力緜母忘父祖之志龜淵旣終喪 則與僉族專心殫力創建一屋於里側 爲歲祭齊宿之所比可謂能繼述先人之志事 而爲肯構肯堂者歟余於亦峴省楸之行龜淵三從兄翫淵來謁請文余以不文辤之揆以百世之誼亦有不可終辤者因畧叙其實如右云爾
隆熙戊申十月下浣
傍後孫前工曹參判書耆淵識




2019.411 추모재상량문(追慕齋上梁文)



재거유감



추모재(追慕齋)



역락헌(亦樂軒) 편액



추원재 주련


[해문]-可欲 신희철
尊賢衛道敦三物 존현(尊賢)¹⁾의 위도정신으로 삼물(육덕 육행 육례)²⁾을 확고하게 지키니,
褈德猶傳父祖鄕 베푸신 은덕이 여전히 조상들의 일족³⁾에 전해지네.
衣冠不改漢唐時 한나라, 당나라 때의 文明과 禮敎⁴⁾ 고치지 않았으니,
貽謨必擇兒孫址 조상이 남긴 교훈을 반듯이 자손의 터전으로 택하게 하고
詩禮復明鄒魯俗 시와 예를 가르쳐  공맹의 풍속을 다시 밝게 하네.


【주석】
존현(尊賢)¹⁾-상황에 따라 상대방을 높이기 위해 쓰기도하니 주련이 쓰여진 내력을 확인해야 될 것 임
삼물(육덕 육행 육례)²⁾-주나라 때 백성을 가르치는 세 가지 일(德,行,禮), 이것을 기준으로 鄕試를 보아 인재를 선발하여 국학(태학)에 입학 시켰다는 기록이 있음
조상들의 일족³⁾(父祖鄕)-조상의 鄕을 기록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8祖鄕이면 아버지의 內外鄕, 조부의 外鄕,증조의 外鄕, 어머니의 內外鄕, 아내의 內外鄕이다.”
곧 조상의 친인척의 고향을 추심하는 것이 가능하다.
文明과 禮敎⁴⁾-依冠을 지칭


[해문]-이수남
尊賢衛道敦三物 존현의 위도정신으로 삼물(육덕 육행 육례)을 돈독케 하니
褈德猶傳父祖鄕 베푸신 은덕이 아직도 조부의 고향에 전하네.
衣冠不改漢唐時 한나라와 당나라 때의 의관을 고치지 않으니
貽谟必擇児孫址 조상이 남긴 교훈 반드시 우리 자손의 발을 택하네
詩禮復明鄒魯俗 시와 예를 가르쳐  공맹의 풍속을 다시 밝게 하네
 
【주석】
삼물이란 유가에서 말하는 완성된 인간의 모든 긍정적 상태를 말합니다. 글쓴 분의 해석대로
六德(智仁聖義忠和)六行(孝友睦婣任恤)
六藝(禮樂射御書數)입니다. 좋은건 다 포괄하죠.
성현의 도를 받들어 삼물을 두텁게 하고...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
猶는 여기서 '같다'의 의미가 강합니다. '그대로'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擇址는 풍수에서 가장 중요하고 먼저 이루어지는 터를 잡는것입니다.
글의 흐름상.  성현의 도와 조상에게 전해진 덕이 씨앗으로 심겨진 터에 나의 자손이 거하길 바라는 강한 사랑과 소망이 뭍어나는 글입니다.


추모재에서 본 성추문(省楸門) 편액


별채 여재실(如在室)



여재실(如在室) 편액


출처 및 참조
근파문집 하-삼성인쇄사(1988.5.8.)/근파재/안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