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창원 북면 내곡리 김해김씨 원모재 遠慕齋

천부인권 2019. 7. 1. 06:06



2019.2.1. 북면 내곡리 김해김씨 원모재 외부 모습


창원시 의창구 북면 내곡리 253번지에 위치한 김해김씨 원모재(遠慕齋)는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이며, 사당인 상현사도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정문인 귀후문(歸厚門)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원모재 동남쪽에는 담을 사이로 하여 벽계정이 배치되었다. 원모재와 벽계정은 향사하는 인물이 달라서 별개의 건물이기는 하지만, 모두 김해김씨 문중의 선현을 제향하고 있어서 하나의 영역을 이룬다.
사당인 상현사(尙賢祠)에 김해김씨 입향 선조인 김억남(金億南)과 그 5세손인 김현이(金顯以) 처사를 제향한다. 기문에 의하면 김억남은 기묘사화 후에 가솔을 거느리고 이곳에 와서 은거하였으며, 그 후로 일문이 여기에 정착하여 살았다.




출입문인 귀후문(歸厚門) 편액



2019.2.1 원모재(遠慕齋)



원모재에서 본 상현사(尙賢祠)



2019.2.1 원모재(遠慕齋) 편액



원모재(遠慕齋)의 주련에는 이렇게 적었다.


[해문]-행복한산인
先靈陟降有楚籩豆 선조의 혼령이 척강하시고 제사를 받들어왔으니
後昆敦睦整齊衣冠 후손은 화목하고 의관은 정제하였네.
十世居然恐疎宗族 10세대를 거주하여 왔으니 종족이 멀어질까 두려워
一日成之善得林泉 산림 산수 좋은 곳을 얻어 하루(짧은 시간)에 (원모재)를 이루었네.




2019.2.1. 원모재 복거(卜居) 편액



2019.2.1. 재성지감(齋成志感) 편액


齋成志感
憶昔先人流落初
晦蔵泉石以占居
松杉地閟堂封處
桑梓年深灌植餘
瞻慕有懷因築室
裕承無計爲儲書
霜悽露怵靈如在
日夕蒼嵐遠襲裾
后孫昌琪敬題





[원문]
遠慕齋記
武陵山一支 北走而東折 駸駸遠鰲 將陂陀而列崺 至府北乃谷中落之後 特起峯嶂 而南彎環拱揖 直其下數弓地 有屋焉 則所謂遠慕齋也 金君鶴斗 過余而言曰 在昔己卯之禍 吾先祖海逸公 自道州而避地于此 以卒世 子孫仍居焉 殆今十數世矣 體魄之藏 又世于此如之 海祖雖墓不在是 而實始移根于玆土 則便吾家之一初耳 所宜措置齋舍 以之一體寓慕 而家世中徵 重又力訓 未之遑焉 吾親 嘗用慨息於此 謀諸族姓 使各自植材培灌有年 遂相地而經紀 不數月功告訖 制凡四楹三架 于以供歲事蘋藻之薦 于以樂親戚花樹之集 于以痔經史迪子姓 以寄閒養終老之計 而特擧二字以牓之者 以追先是急也 又曰 吾親 一生致力於追先 此爲大者 而今其遂之矣 不可無記 乞一言以惠之也 余歛袵曰 有是哉 吾固已卜君之大人之能爾也 始 吾與君 相識君孝順質慤 不止爲文藝 意其有賢父兄 旣又見君之大人 則課耕種學 歛華敦實 御家以正 而子姓羣趨 皆循循襲醇謹之風 認之有所本者遠矣 苟有本焉 又豈可以人其遠而忽之哉 噫 世代邈遠 海翁之遺芬剩馥 有不可掇拾 而若夫當日明哲之見 幽貞之趣 則雖世代悠邈 則其地而可以槪矣 洞壑不改 烟霞長在 緬想往昔 不能無遺之感 繼以屢世壟阡 東西相望 擧在乎俛仰瞻眺之地 霜露之怵 焄蒿之愴 尤鳥可已乎 宜其策齋於此 以盡報本永慕之道也 豈不偉哉 矧茲世入沈冥 閉扃宴息 謝塵累於雌黃 托晩計於桑楡 則又不其有暗合於先媺者乎 余於鶴斗 同源而有舊 又感其繼志之善 有不得終辭者 遂書此而歸之 其大人名 應琪 景祐 其字也
重光大淵獻 端正月上澣 宗後生 柄璘記


[해문]-송재 김신수(松齋 金信秀)¹⁾
원모재기
무릉산(武陵山)에서 하나의 지맥이 북쪽으로 내달리다가 동쪽으로 꺾이니 말이 달리는 듯하고 자라가 물속에서 솟아오르는 듯함이라. 다음은 비탈지에서 나지막하게 열(列)을 지은 듯한데, 고을 북녘의 내곡(乃谷)에 와서는 중간이 움푹 파인 곳의 뒤엔 특별난 산봉들이 붕기(崩起)하다가 남쪽으로 구비돌아 공읍(拱揖)의 모양을 한다. 그 아래 여러 곳엔 활터(弓地) 같은 땅에 집이 있으니 즉 소위 원모재(遠慕齋)라 한다.
김학두(金鶴斗)께서 지나치면서 나에게 말씀하길 옛날 기묘(己卯)년 재화(災禍)로 나의 선조 해일공(海逸公)께서 본도(本道)에서 이곳으로 피난 와서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시니 이로 인하여 후손들이 살게 되었도다. 자뭇 지금부터 십여대(十餘代)입니다. 체백(體魄)²⁾을 모신 곳도 또한 세(世)가 이와 같으나 해조(海祖)선조의 묘는 이곳에 있지 않으니 실로 처음부터 이곳으로 이근(移根)한 것은 즉 우리 집이 첫 번으로서 마땅히 재사(齋祠)를 두게 된 바이다. 가세(家勢)가 중도에 성취하니 일제히 재실에서 추모하게 되어 거듭 자손들을 힘써 가르치게 되었으니 한가할 시간이 없었도다. 나의 선친께서 일찍이 이곳에서 탄식하므로 모든 일족(一族)들과 모의(謀議)하여 각자가 재목도 구하고 다듬어서 배관(培灌)함이 1년이라. 여러 날 안 되어 모든 일이 마치니 무릇 사영삼가(四楹三架)³⁾ 집이다.
해마다 빈조(蘋藻)⁴⁾를 상천(上薦)하는 행사를 공천(供薦)하고 친척과 종중이 모여 즐거워하면서 지나간 역사에 머무르고 자손들은 늙은이를 받들면서 한가롭게 부탁하시기에 특별히 두 글자를 쓰서 편액(扁額)을 하는 것은 이에 제일 바쁜 일로서 선조를 추모함이라.
나의 선친께서 일생토록 선조를 추모하심은 가장 위대하다 하였음으로 이제야 완수 하였음이로다. 또한 가히 기록이 없지 않으니 청하건대 한마디 말로서 베풀게 되도다. 내가 옷을 여미고 말하길 이런 사실이 있을 것인데 진실로 이미 그대가 대인(大人)의 능력을 생각하였도다. 처음엔 나와 그대가 서로 알게 되고 보니 그대는 효순(孝順)과 정성을 바탕으로 학문과 예술이 그치지 않게 되었다. 고귀하신 뜻은 그 어진 부형이 있었음이라 하니 이미 그대를 보니 위대함이요 즉 주경야독으로 학문을 펴면서 화려한 것을 싫어하고 사실을 도타웁게 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자손들을 바르게 인도하니 모두가 순순(順順)하며 지성스럽고 삼가는 습성과 풍모(風貌)가 있음으로 먼 곳에서도 근본이 있는 분이라고 알고 있었도다. 또 어찌 사람들이 먼 곳에 있음에도 알게 되었으리요. 슬프도다! 세대는 멀어졌으되 해옹(海翁)께서 분필(芬苾)을 남기고 향기를 함축(含蓄)함은 가히 거두어 수습하지 않을 수 없었도다. 대저 하루에 명철(明哲)하신 소견이었을 것 같으면 그윽하고 곧은 취미니, 즉 비록 세대가 멀고멀었어도 만약에 그러한 터전이 가히 그러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도다.
깊은 골은 메울 수 없으며 노을빛은 오랫동안 비추는데 지나간 옛 일을 멀리 상상해 보면 능히 가까운 감화(感化)가 없지 않으며 누대(累代)에 걸쳐 무덤을 이어 오는 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서로 바람이 이곳을 천거하여 항상 구부리면서 읍(揖)하고 처다보는 것이었다고 함이다. 그리하여 상로(霜露)를 밟으면서 출척(怵惕)한 마음과 향화(香火) 피우면서 슬퍼하는 것을 어찌 가히 그칠 수 있으리오. 실은 이곳에 재실을 두도록 계책(計策)함은 보본(報本)하고 영모(永慕)하는 도리를 다함이라. 어찌 어길 수 있으리오 진실로 세상이 어두움에 빠져드니 싸리문을 잠그고 편히 쉰다면 오염된 세상을 자황(雌黃)이라고 사양하리오. 늦게라도 상유(桑楡)의 벽촌에서 견수(牽手)하여 나온다면, 그런 즉 또 암합(暗合)으로 남몰래 먼저 숨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했으리오.
나와 학두(鶴斗)는 윗대가 같은 근원으로 사귄지도 오래인데 또한 그 뜻을 펴는 착함에 감응하여 끝내 사양을 해도 결코 승낙을 얻지 못하여 드디어 이에 돌아와서 글을 짓게 되니 그의 선친의 명(名)은 응기(應琪)요. 경우(景祐)는 그분의 자(字)로다.
1911년(辛亥) 3월에 병린(柄璘) 기록하다.


【주석】
송재 김신수(松齋 金信秀)¹⁾-현재(2019년) 산청향교 전교(典校)이며 자는 문현(文鉉), 호는 송재(松齋)이다. 1970년에는 지방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27년간 공직 생활 후 서예 32점, 병풍 6점, 모필책 5권을 선보이는 필책 서예전을 개최했음.
체백(體魄)²⁾-죽은 지 오래된 송장. 또는 땅속에 묻은 송장.
사영삼가(四楹三架)³⁾-정면 3칸 측면 2칸의 집
빈조(蘋藻)⁴⁾-네가래와 개구리밥으로 조상에게 올리는 제수(祭需)를 말함.
상천(上薦)⁵⁾-위로 추천하거나 천거함.
순순(順順)⁶⁾-순서 있고 정연(整然)한 모습
분필(芬苾)⁷⁾-향기에 향기를 더함.
출척(怵惕)⁸⁾-슬퍼하고 또 슬퍼함.
자황(雌黃)⁹⁾-비소(砒素)와 유황(硫荒)의 혼합물로 내가 세상사에 뜻이 없음.
상유(桑楡)¹⁰⁾-뽕나무와 느릅나무로 산골 고향을 칭함.
암합(暗合)¹¹⁾-어둡고 어두움이 겹치다는 뜻이나 산골을 칭함.





원모재이건기(遠慕齋移建記) 편액

[원문]
遠慕齋移建記
恭惟我海逸先祖府君 早以才德聦睿 爲当世擬望際値己卯之訌隨大人遯雲 公避禍晦跡於灵昌之間 而過壬燹于 火旺山城時 郭忠翼公倡義 旅據城相見 爲輔佐籌策之 紆不下於戰鬪之労 而反其奏捷論功無旬伐之心 謂國之逋踪 不可顕用於世遂潜身 南下之玆土 爲隱者可居杜門自靖 以畢生焉其行截顕晦之道想多可傳而盡入刼灰無餘惟訓子八條卜居種竹二詩存焉可矯
者只此而此亦可見府君之大槩也 一傳再傳而歷三四傳至五傳有孝子澗叟公其偉行懿蹟先師訥齋公述碣銘 而表仟六傳而有谈軒公亦以孝聞累世衣履之葬並十二封考位之妣位之而惟一傳之祖配再傳之考妣不在於是而皆在府北銕馬峯南麓遠近眺望之地銕峯之陽乃吾家世葬地也每歲十月中旬邇遐諸族来会于此行歲祭之儀而惟是咨嗟者無齊宿之祈歲己酉王考秋圃公協謀于族建一室于村後誅茅蔭之制凡四棟三架扁以遠慕一以追先爲猷一以啓後爲義經三十餘禩爲風雨所陽棟宇將毁若因舊修理則亦可而皆而爲距家稍間於守護之方升降之役俱爲不便遂發移建之議而相也 于玆以甲申正月日始竪至三載告訖間架之制因舊無增而以瓦覆焉盖斯役也 先伯復莪公賓爲剏始而敦匠之事則祖行昌玟叔行周斗兩氏並力焉門庫趁未備之奧幾年 而結構以具需用之便是則倫斗叔董督之力多矣旣落諸族責余一言以記之余曰人之於祖何祖不慕也 惟遺蔭之祖尤不可忘焉惟我海祖府君賓吾家入鄕之鼻祖也 占居之初飬德立基以開其原篤學裕後以達其流凡我爲其孫者曷敢忘諸不忘則慕之之道 惟在乎是母以聲音尙之断以心誠賓之父詔 于子兄戒 于弟永世繼承 以勿替則 遠慕之道愈久 而不墜矣 以是爲望
丁酉霜降節下澣十世傍孫容道敬識




2019.2.1 북면 내곡 상현사(尙賢祠)



[원문]
尙賢祠記
昨年辛亥八月之初 昌原鄕儒因有事 校宮齊會發議以 其鄕北乃谷中里世居金海金氏之先 有海逸公諱億南 當中廟己卯禍見幾遯跡于 武陵山中潜心 聖賢之學己又遭 宣廟龍蛇亂往従郭忠翼公 有指麾防禦之功至其來孫澗叟公顯以 以誠孝根夭致異物之感 偉蹟殊行至今傳在公評 而其後孫者方追立 祠宇以祀二公此在鄕儒 不可一任越視謹稽古禮鄕完生祭社之義加之崇獎繼之修契立案以示尙德尊賢之爲當務仍爲之名其祠曰尙賢而後孫灄斗濟坤專來訪余要以記之余與灄斗有素知金氏之爲昌鄕世族而二公行蹟己有近古儒望撰述文字可徵病信也況此事出一鄕一鄕之人宜有公論難在沉病呻憊之中感其遠涉之勤輒依其言而書之鳴呼忠孝者人道之六綱人而無是不可一日而爲生更願僉儒君子因此標揭更如勑厲使令知所率俾焉歲玄黓困敦
平秋之日 義城 金榥 記 


〇 세현익곤돈(歲玄黓困敦)-임자년(壬子年;1972년)
〇 김황(金榥)은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일명 김우림(金佑林)이다. 자는 이회(而晦), 호는 중재(重齋). 명신 김우옹(金宇顒)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도산서원(陶山書院) 원장을 지낸 김극영(金克永)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로 심구택(沈龜澤)의 딸이다.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다.
1909년(순종 3)의령 남씨(宜寧南氏)와 결혼하였고,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산청의 황매산(黃梅山) 서쪽 만암(晩巖)이라는 깊은 산골로 이사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주리학(主理學)을 대표하던 곽종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더욱 문명을 떨치게 되었고, 그 학통을 계승하였다.
1978년 12월 세상을 떠나자 많은 조객이 운집하여 유월장(踰月葬)으로 장사지냈다. 1995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019.2.1 상현사상량문(尙賢祠上樑文)


출처 및 참조
창원군지-김종하/국제신보출판사(196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황
디지털창원문화대전-원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