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낙동강 절경 품은 함안 광심정 기문

천부인권 2019. 6. 23. 22:04



창녕군 길곡에서 바라 본 광심정 풍경


낙동강 기슭의 절애에 자리한 광심정(廣心亭)은 2009년에 한번 소개를 했지만 함안 칠원의 문화재를 소개하면서 넣은 내용이라 이번에 단독으로 광심정의 기문 해문을 기록해 본다. 당시의 풍광과 지금의 풍광에서 광심정 자체는 달라진 것이 없지만 광심정의 상류 680m에 4대강 사업으로 창녕·함안댐이 건설되어 낙동강이 변했고 맞은편 길곡의 강변은 농사를 짓는 대신 자전거 길과 공원시설이 들어섰다.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한 것까지는 좋으나 공원으로 만들어 이를 관리하려면 창녕군은 만만찮은 예산을 투입해야 할 것이다. 지도자의 생각 한번에 검토도 없이 공사장이 돼버린 낙동강을 보면서 4대강 사업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쉬움이 남았던 사건이었다.





광심정(廣心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7호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 230


광심정(廣心亭)은 조선 선조 2년(1569)년 영산군 길곡리에 칩거하던 용성송씨(龍城宋氏) 문중에서 젊은 사람들을 수학할 목적으로 건설했다. 1664년(현종5년) 성리학자 송지일(宋知逸)이 칠원(漆原) 북쪽 자모산 기슭 낙동강 절벽 위에 후진양성과 선비들과 더불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은 자신의 호를 딴 것이다. 임진왜란 때 파손되었으나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된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뒷면 2칸은 2개의 방, 정면 2칸은 개방된 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확 트인 전망이 정자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측면이 정면보다 넓고 한모서리를 밀면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특수한 건축공법으로 건립되었다. 1995년 5월 2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함안 광심정 입구



담장 넘어 본 광심정



정면에서 본 광심정



편액들이 걸려 있는 광심정




[원문]
廣心亭重修記
祖先有所作 而子孫縱其荒頓 不能治慢也 以爲不足 而輕壞其舊逞 其新☑ 以求多於前人汰也 二者雖過不及之不同 其失中則一 昔李衛公自 以追述先志 營平泉之莊 窮極奢麗 或後人以毁一花一石者 非吾子孫竟以是 招忮怨 曾未數世 而蕩然爲他人之有 夫追先 而至於窮奢極麗 使子孫不能卒守是 於己爲汰 而在子孫爲慢 謂之有智不可也
記曰 樂樂其所自生禮不忘 其夲夫禮樂之用大矣 而君子以 爲其道在此者厚之至也 鷲城之南洛江之上 有亭曰 廣心 故處士龍城宋公之所築也 制小而境曠愜爲幽人之所 樓盖公當 寧崇之際朝野多論之日南中 士大夫以正邦禮事爭先奮袂冀得一當 公宿有器望若可 以因綠進取 而不之屑也 避城離市自遯于江湖之間 漁釣詠歌以自適其適當時賢 大夫士之過從者 皆有所記詠 以致企羨之情 而郭益山公所 謂高蹈遠引使人歆豔 而彂歎者尤可見 又近百年矣 以亭在大江之上 風雨之交 窓牖褒桷日就頑朽 八世孫峻模身率工作 約餼縮用補缺以 完易腐以新無侈于前人 而己復其舊觀矣 北之世人之狹小 前度務爲宏麗 以求新乎 耳目者誠不足 以爲功然以禮樂之道論之則所 謂樂其所自生不忘 其夲者 其不在此也 歟以此相傳守而勿壞吾知 其免於汰慢之失 而長爲宋氏世世之有也全矣 峻模氏有文雅 而不年旣歿其弟若孤請記其事兢燮 業以先世之誼猥銘公之墓矣 遂不敢辭因牽連書之 以備亭中之故實云
庚戌三月朔 昌山曺兢燮記
丁卯九月朔 星州李晉洛書


[해문]-효가(曉歌)
선조가 지으신 바를 자손으로서 그 황폐함을 내버려두고 고치지 않는 것은 만(慢)이요,
가벼이 그 낡은 것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만들 수 없다 여겨 옛 사람(前人=祖先)의 것보다 많을 것을 구할 수 없게 하는 것은 태(汰)이다.(원래 不이 있었으되 이를 후대의 누군가가 의미에 맞지 않다 여겨 지운 흔적이 있군요. 원 뜻을 살려 번역했어요.)
양자는 비록 지나침과 모자람의 차이는 있으나 그 중정을 잃은 것은 매일반이다.
옛날 이위공이 스스로 선대의 뜻을 추존한다 여겨 평천의 장원을 짓고 그 사치함과 화려함을 다한 뒤, 혹 후인 가운데 꽃 한송이, 돌 하나라도 훼손함이 있으면 내 자손이 아니라 하니, 마침내 이로 인해 꺼리게 되어 몇 세를 지나지 않아 다 쓰러져 타인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대저 선인의 뜻을 추존하되 사치와 화려함을 다하여 자손으로 하여금 끝내 그것을 지키지 못하게 하였으니 자신에게는 汰한 것이요, 자손에게는 慢하도록 한 것이니 이를 일러 지혜가 모자라다 하는 것이다.

-중략-
경술(庚戌,1910년) 3월 초하루 창산 조긍섭(曺兢燮)¹⁾ 기록하다
정묘(丁卯,1927년) 9월 초하루 성주 이진락(李晉洛) 쓰다.


【주석】
조긍섭(曺兢燮,1873~1933)¹⁾ :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근(仲謹), 호는 심재(深齋). 아버지는 조병의(曺柄義)이다. 조긍섭은 일정한 스승은 없었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매우 영특하여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다. 시문에도 법도가 있어 당시 영남 사림에서 거목으로 지목되었다. 한말 지식인 가운데에 황현(黃玹)·김택영(金澤榮)·이건창(李建昌) 등과 교유했다. 그들을 뛰어난 인물로 칭찬했던 점으로 보아 유학자로서의 보수적 경향만을 고집하지 않는 학자였다.
저서로는 『암서집(巖棲集)』·『심재집(深齋集)』41권 20책·『조명록(措明錄)』 등이 있다.




[원문]
廣心亭記
余自金官過鷲城 爲尋宋叔知逸民江亭 囂塵隔絶境界 涔寂欣然一笑 岸巾將迎 地勝人進有足起 余願落拓一措 大衣食於奔走蹤跡於名利 其親高蹈遠引 優遊以終 老者閒忙 得失果何如耶 噫 高人逸士孰不愛江湖 而不獲焉者 盖滔滔惟廣心翁 擺脫塵臼逍遙物外 以適其樂苟非性於山水 若鳥歸林魚之赴淵 鳥能與於此 哉雖然魚鳥之依歸 惟在於山水 而人之依歸將無 不可何嘗達 則朝延窮 則畎畝而己哉 今翁依歸 與魚鳥同焉推此志也 雖身享富貴 揚顯一時 其沉陸乾沒 而急流勇退也 必矣於是而賢矣哉 醉翁之文言 禽鳥知山 莊生聘辨 取鯈魚之遊 濠達人之論 動以山水 眞樂村之魚鳥 豈不以性之天 而樂之專也 之人也 性於山水 而斷念外慕 起居飯食 惟山水是接 則其所以得於心 而樂之者 專乎專矣 如其心 魏闕憂樂 天下者抱負雖大 而樂則不同矣 何况人性 與地變化 雍州之性忠孝 冀州之性勤儉猶藏丹 而赤藏漆 而黑是故居於幽閒之區爽嶝之域者 煩衿自滌塵念自消志氣 淸明精神 秀發居養之移人尙矣 視廟思敬 視兵思鬪 人情所同 瞥然頃適然之遇 猶能感于 中易其思 矧伊安其攸宇 不出戶庭而魂處形 接左右酬應只 在峨洋之間 蒼茫百里之外 東西之曠野 盈矚森羅四時之景 朝暮之活畵怡顔眼 界寬處心期自遠扁之日 廣心良有以也 是知夫山水之樂者乎 動靜之理 仁智之軆察乎 山水不知乎 道則無得山水 而謂之知則我與道對 而爲二謂之 不知則道與我混 而爲一孰知之知 方旦謂眞知也 耶道之 爲物充滿宇宙 無處不有今 吾與子亦 爲圍中一物 而日夜與造化 翁遊於前 而自不知也 夫若是則遊於 斯亭者主人翁 耶造化翁也孰爲之主也 孰爲之客耶方且 與造化翁遊於亭而樂之也 不啻若羿之射石之斵 而與山水忘形 與鷗鷺忘 機長嘯高歌以養 其神心手舞足蹈以暢 其意氣毁譽 不到於耳邊榮辱莫加於身 上長送閒中之歲月 永作江湖之散人 兀爾悅爾 杳然冥然 視山猶水 視水猶山 而鴻濛爲隣希夷 爲徒不知江湖之外 復有何樂之爲可樂也 能不使我欽豔 而發嘆也 旣成四韻復爲之序 以塞翁請然贅言荒辭那足以開廣翁之心胷也哉
甲辰仲春 苞山 郭世楗 謹序


[해문]
광심정기
내가 김관(金官)¹⁾으로부터 취성(鷲城)²⁾으로 가는 길에 아재인 송지일(宋知逸,1620~1675)³⁾의 강정(江亭)에 들리니 바깥세상의 시끄러움과 혼탁(混濁)⁴⁾함을 멀리하고 주위 환경이 청정하고 적적(寂寂)한 지라 나도 모르게 흔연(欣然)한 웃음에 잠겨있자니 주인이 친히 맞이하여 주도다. 지세(地勢)는 명승이요 주인은 유덕(有德)하니 마음이 매우 흡족(洽足)하도다. 회원(回願)하건대 저 분주(奔走)한 세파 속에서 의식(衣食)하고 복잡한 명리(名利) 속에서 구차하게 사는 자와 이를 멀리하여 고상(高尙)하고 한적(閒寂)한 운치(韻致) 속에서 매사 여유(餘裕) 있게 사는 자 그 한망(閒忙)과 득실의 차이가 과연 무엇일까? 오호라! 고인(高人) 일사(逸士) 치고 누가 강호를 사랑하지 않으며 이름 얻지 못하리오마는 오직 광심옹(廣心翁)은 누진(累塵)을 탈피(脫皮)하고 물욕을 멀리하여 자연의 대도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 성정(性情)이 구차하지 아니하니 진실로 산수를 즐겨서 마치 새가 숲을 찾고 고기가 연못으로 가는 것 같이 사리에 맞지 않으면 어찌 능히 이같이 자연을 즐길 수 있으리요. 그러나 어조(魚鳥)는 오직 산수에만 의지하고 있지마는 사람은 언제 어디든지 의지함에 불가함이 없다. 일찍이 달운(達運)을 당하면 조정에 나가 제세치민(濟世治民)도 하고 불운을 당하면 전원(田園)으로 파묻히기도 한다. 이제 옹의 의귀(依歸)하는 바 그 지조는 궁달(窮達)의 경지를 초월하여 마치 산수에 의귀하는 어조와도 같다.
비록 몸은 부귀를 누려 일시 현달(顯達)할망정 시대의 불운을 당하면 기징(機徵)를 알아차리고 용감하게 물러가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옛날 취옹(醉翁)⁵⁾의 글에 금조(禽鳥)가 지산(知山)하고 장생(莊生) 빙변(聘辨)이라 하였거니와 어조(魚鳥)의 유호(遊濠)와 달인의 론동(論動)을 취하여 산수의 참된 낙을 어조에 비겼으니 어찌 천성이 그다지도 의연(毅然)하며 그 즐거움을 오로지 다 누린다아니하랴. 산수를 즐겨하고 물욕을 멀리하여 기거(起居)와 반식(飯食)을 오직 산수 속에서만 하니 그 심중(心中)에 득하는 바가 온전할 것이다. 그 심성이 고원(高遠)하여 천하를 우락(憂樂)하는 자는 그 포부(抱負)는 비록 크나 낙(樂)인 즉 부동(不同)하다. 하물며 인성이 지역(地域)을 따라 변할 것인가. 옹주(雍州)지방 사람은 충효가 많고, 기주(冀州)지방 사람은 근검한 자가 많으니 단색(丹色)이 짙으면 적색(赤色)이 되고 칠색(漆色)이 짙으면 흑색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理致)이다. 이런 고로 한적(閑寂)한 곳과 청명한 지역에 사는 자가 잡념을 씻고 누진(累塵)을 멀리하면 정신이 상쾌하고 기분이 활달하여 가히 양생(養生)의 비결(秘訣)이라 하겠다. 종묘를 보면 경의(敬意)를 표하게 되고 병사를 보면 전쟁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사람마다 같다. 잠깐 보고 스치는 데도 오히려 중심(中心)이 움직여 그 생각이 변화하는데 하물며 그 거처(居處)가 편안하고 나의 심사(心事)와 정신 혼백(魂魄)의 좌우 수응(酬應)하는 것이 모두 산수가 아님이 없으니 창망(蒼茫)이 바라는 백리 밖에는 동서로 광야(曠野)가 터졌고 춘하추동 사시(四時)로 변경하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안계(眼界)에 가득 찼고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활화(活畵)는 심신을 길러주니 이를 녹유(綠由)하여 ‘광심정(廣心亭)’이라 명명하였으니 과연 산수의 참된 즐거움을 아는 이로다. 동(動)과 정(靜)의 이(理)와 인(仁)과 지(智)의 체(軆)를 산수에만 붙이고 도(道)를 알지 못하면 산수(山水)를 얻은 보람이 없는 것이라. 이른바 지(知)는 내 몸과 도를 대하면 2가 되고 부지(不知)는 도와 내 몸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는 것이니 누가 부지의 지(知)가 또한 진지(眞知)라는 것을 알리요. 道는 물(物)에 대하여 우주(宇宙)가 충만(充滿)하여 해당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이제 나와 그대도 또한 우주의 일물(一物)인즉 이 정상(亭上)에서 밤낮으로 조화옹(造化翁)⁶⁾과 더불어 벗하여 담소(談笑)하면서 스스로 알지 못하는지라. 그러니 이 정상(亭上)에 노는 이가 주인옹(主人翁)인가 아니면 조화옹(造化翁)인가. 누가 주인(主人)이고 누가 객(客)인가. 바야흐로 조화옹과 더불어 정상(亭上)에 놀면서 산수를 즐겨하는 것이다. 옛날 예(羿)⁷⁾의 사수(射手)와 석(石)의 명공(名工)같이 서로 부합할 뿐만 아니라 산수와 더불어 물욕(物慾)을 잃고 갈매기 백로와 더불어 세상사(世上事)를 잊고 피리와 노래로 그 심신을 양생(養生)하고 춤으로 그 의기(意氣)를 창달(暢達)하여 남을 헐뜯고 칭찬하는 말이 귓전에 오르지 않고 영욕(榮辱)의 꿈이 신상(身上)에 침노하지 아니하여 길이 한가한 가운데 세월을 보내며 강호(江湖)에서 벼슬을 하지 않고 한가로이 지내는 한 산인(散人)⁸⁾이 되면 황홀(恍惚)한 속에서 산을 보면 물 같고 물을 보면 산 같아 홍몽지상(鴻濛地上)⁹⁾에서 희이(希夷)로부터 짝이 되는 것 같다. 강호 밖에 무슨 낙(樂)이 이보다 더 좋은 낙(樂)이 있으리요. 이에 감탄하여 사운(四韻)도 짓고 서(序)도 지어 주옹(主翁)의 시를 대하나 위와 같은 서투른 문장으로 어찌 족히 주옹의 심육(心育)을 시원히 열어 주리요.
甲辰(1664년) 仲春(음력 2월)
苞山(비슬산) 곽세건(郭世楗,1618-1686)¹⁰⁾ 삼가 서문을 짓다.


【주석】
김관(金官)¹⁾ : 지금의 김해(金海)
취성(鷲城)²⁾ : 지금의 창녕군 영산(靈山)
송지일(宋知逸,1620~1675)³⁾ : 송지일(宋知逸, 1620~1675)을 말한다. 본관은 용성(龍城), 자는 휴재(休哉), 호는 광심정(廣心亭)이다.
혼탁(混濁)⁴⁾ : 당시 송시열(宋時烈)을 척(斥)하고 영남 유생 상소로 예론(禮論) 당쟁이 극에 달하였고 삼정(三政)의 문란(紊亂)으로 대동법을 시행하는가 하면 공명첩(空名帖)에 의한 매관매작(賣官賣爵) 과거(科擧)의 정실화(情實化) 인사제도(人事制度)의 난맥상(亂脈相)으로 조야(朝野)가 매우 소란(騷亂)한 상황이었다.
취옹(醉翁)⁵⁾ : 구양수(歐陽脩, 1007~1072)는 ‘당송8대가’의 한 사람으로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는 문충(文忠). 송대 문학에 '고문'(古文)을 다시 도입했고 유교원리를 통해 정계(政界)를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1030년 진사시험에 장원급제하여 뤄양의 유수추관을 제수받았다. 1036년 고위관리인 범중엄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후난 성의 하급관리직으로 강등되었으며, 이곳에서 1,000년에 이르는 정치적 혼란시대를 다룬 역사서 〈오대사기〉를 저술했다.
조화옹(造化翁)⁶⁾ : 조물주(造物主)
예(羿)⁷⁾ : 예(羿)⁷는 동이족 사람으로 활로써 나라의 여러 가지 재앙을 막은 것으로 유명하다. 산해경에 의하면 토지를 황폐하게 만들고 다니는 풍신을 활로 쏘았고, 전설적인 제나라 왕 요(堯) 임금 시대에 지구 위에서 뜨겁게 불타고 있던 10개의 태양 가운데 9개를 활로 쏘아 떨어뜨렸다고도 한다.
산인(散人)⁸⁾ : 세상일을 잊고 한가로이 자연을 즐기며 지내는 사람.
홍몽지상(鴻濛地上)⁹⁾ : 하늘과 땅이 아직 갈리지 아니한 혼돈 상태의 세상
곽세건(郭世楗,1618-1686)¹⁰⁾ :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공가(公可), 호는 무위자(无爲子). 허목(許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무예를 익혔으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였고, 허목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고 인정을 받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분의(奮義)하여 서울로 올라갔으나, 화의의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숙종이 즉위하여 현종릉지문(顯宗陵誌文)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짓게 하자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1675년(숙종 1)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에 특임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그 뒤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가 되었다.
윤휴(尹鑴)의 천거로 형조좌랑에 이어 공조정랑을 지냈으며, 1676년에 봉직랑(奉直郎)으로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고 익산군수로 나아가 치적을 올렸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허적(許積)·윤휴 등이 사사되자, 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온 지 2년 만에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무위당유고(无爲堂遺稿)』가 있다.





蒼雪齋先生文集卷之三 / 詩 題廣心亭 癸未
數椽精舍傍農家。자그마하고 깨끗한 농가 곁 따로 있는
別有漁舟繫岸沙。고기잡이 배 모래 언덕에 매였네.
知是武陵川路近。무릉의 냇가 길이 가까운지 알겠는데
滿江春漲盡桃花。봄 강물이 넘쳐 복사꽃은 다 졌으리.
道見緋桃近竹窓   
碧桃新柿可成雙
絶得明年春色至   
交開紅白映淸江
癸未仲春 權斗經 謹次 地倅
*武陵=漆原別號




主翁 宋知逸 稿


小亭搆出碧波形
長使閒人辦勝遊
時詫漁竿趙世慮
更疑詩句暢幽愁
烟橫沙岸雲橫嶺
風滿疎欞月滿淑
擺却塵寰多趣味
支㶊終日對江流




壬午仲秋 尹尙逸 謹次 地倅




十里平湖八月秋 10리나 뻗은 모래펄의 늦은 가을
擊舟沙岸上江樓 모래 언덕에 배를 매어두고 광심정에 올랐다.
主人莫託鱸魚興 주인은 자랑 않고 농어는 기뻐 날뛰고
無限烟波點點鷗 물안개 자욱한 끝없는 수평선엔 갈매기 춤춘다.
快闊風烟撥眼新
平湖兩過鏡無塵
孤舟掛席重回首
惆悵沙鴟與主人
壬子中秋上浣 觀察使 李䎘
*鴟=(丘+鳥)(치)이다.




甲辰仲夏 李凍 謹次




한국고전종합DB-암서집(巖棲集)-암서집 제27권/묘지명(墓誌銘)
[원문]
廣心亭處士宋公墓誌銘 辛亥
吾先祖白巖公有賢婿曰廣心亭處士宋公。廣心亭者。在靈之治南二十五里吉谷江上。以淸勝名而公之墓在其南一里射洞之原。後孫汶模氏顧兢燮曰吾祖隱不試。世鮮知之。其知之者以其亭。亭有題詠序記。多鉅人筆。惟墓未有誌。夫崇明而忽幽。子孫之羞也。請以徵諸子。以子之於吾祖。異夫人也。如是何敢辭。按公諱知逸字休哉。宋氏本龍城人。燕山主時有府使嚴卿棄官南下。靈之有宋始此。其後曰文獻 健元陵參奉。曰坦禦侮將軍。曰瑾迪順副尉。曰季賓軍資監僉正。與李畏齋,復齋,朴无悶堂諸賢友善。是爲公考。妣江陵金氏。父曰縣監廷瑞。公之配昌寧曺氏。父曰同樞光啓。是爲吾白巖公。公之子六人。男廷弼,廷衍,廷誨,廷杰。女適嚴甲廈,孫命元。孫男德齊,德峻,德老,德潤,德秀。外孫嚴以衍,以愆,以衎。孫繼胄,慶始。曾玄以下甚蕃。公生以泰昌庚申八月十八日。沒以我 明陵乙卯三月六日。距今幾四周甲。遺宅中更欝攸。文蹟皆蕩佚不傳。傳者數篇耳。其敎子姪則戒讀書太敏而勉其接續。其長縣學也。飭諸生畧時文而求諸身心之實。所謂一臠而知全鼎者歟。是故李辛二公之誄公。有曰服膺賢聖。入孝出悌。文雅風采。可傾南鄕。有曰管領湖山。與世相忘。直道在胷。寧屈於人。至郡誌稱公性淸謹耿介。志在性理之學。盖實錄云。若其遊從之選。則李寒泉兄弟,郭鷗谷父子,黃獨梧悏,周菊潭宰成,安愚拙信賢諸公。而李觀察䎘權蒼雪斗經所題亭詩。尤爲人所傳誦。是亦足以徵公矣。銘曰。
世多利騖而閒之厭。亦侈于文而實之儉。維淸介謹學求諸已。嗇名何尤。我銘在是。
昌山曺兢燮記


[해문]
광심정 처사 송공 묘지명 신해년(1911) 〔廣心亭處士宋公墓誌銘 辛亥〕
우리 선조 백암공(白巖公)에게는 어진 사위가 있었으니, 광심정 처사(廣心亭處士) 송공(宋公)이다. 광심정(廣心亭)은 영산(靈山)의 읍치 남쪽 25리 되는 길곡(吉谷) 강가에 있는데, 맑고도 빼어나기로 이름이 나 있고, 공의 묘소는 그 남쪽 1리 되는 사동(射洞) 언덕에 있다.
후손 문모(汶模) 씨가 긍섭(兢燮)을 찾아와서 “우리 선조는 은거하고 벼슬하지 않아 세상에서 아는 사람이 드물고, 알게 된 것은 정자 때문입니다. 정자에 있는 제영(題詠)과 서문(序文) 및 기문(記文)은 대부분이 훌륭한 분들의 글이지만, 오직 묘소에는 아직 지문(誌文)이 없으니, 저 생전에 노니시던 곳을 높이고 지하에 묻히신 곳을 소홀히 한 것은 후손들의 수치입니다. 그대에게 묘지를 부탁하니, 그대는 우리 선조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말하는데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살펴보니, 공의 휘는 지일(知逸), 자는 휴재(休哉)이다. 송씨(宋氏)는 본관이 용성(龍城)이다. 연산군(燕山君) 때 부사(府使) 엄경(嚴卿)이 벼슬을 버리고 남으로 내려왔으니, 영산에서 송씨가 살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그 후손으로 문헌(文獻)은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이었다. 탄(坦)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었다. 근(瑾)은 적순부위(迪順副尉)였다. 계빈(季賓)은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이니, 이외재(李畏齋)ㆍ이복재(李復齋)ㆍ박무민당(朴无悶堂) 제현들과 벗하면서 친하게 지냈으니, 이 분이 공의 부친이다. 모친 강릉 김씨(江陵金氏)는 아버지가 현감(縣監) 정서(廷瑞)이다.
공의 아내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부친이 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 광계(光啓)이니, 이 분이 우리 백암공이시다.
공의 자녀는 여섯이니, 아들은 정필(廷弼)ㆍ정연(廷衍)ㆍ정회(廷誨)ㆍ정걸(廷杰)이고, 딸은 엄갑하(嚴甲廈)와 손명원(孫命元)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덕제(德齊)ㆍ덕준(德峻)ㆍ덕로(德老)ㆍ덕윤(德潤)ㆍ덕수(德秀)이고, 외손은 엄이연(嚴以衍)ㆍ엄이건(嚴以愆)ㆍ엄이간(嚴以衎)ㆍ손계주(孫繼胄)ㆍ손경시(孫慶始)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몹시 번성하다.
공은 태창(泰昌) 경신년(1620, 광해군12) 8월 18일에 태어나서 우리 명릉(明陵) 을묘년(1675, 숙종1) 3월 6일에 돌아가시니, 지금부터 거의 4주갑이 된다. 유택(遺宅)이 중간에 불이 나서 문적(文蹟)이 모두 훼손되고 흩어져서 전하지 않고, 전하는 것이라고는 몇 편뿐이다.
자질들을 가르칠 때는 글 읽기를 너무 급하게 하는 것을 경계하고 그것이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힘쓰게 하였으며, 고을 학교의 선생이 되어서는 제생들을 신칙(申飭)해서 과거 시험용 글공부를 줄이고 몸과 마음의 실제에서 구하게 하였으니, 이른바 “고기 한 점으로 온 솥의 국 맛을 안다.”라고 할 것이리라. 이 때문에 이공(李公)과 신공(辛公) 두 사람은 지은 공의 뇌사(誄詞)에,
성현을 복응하여 / 服膺賢聖
집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경했네 / 入孝出悌
문아와 풍채는 / 文雅風采
남쪽 지방 기울일 만하였네 / 可傾南鄕
라고 하였으며,
강산의 경치 차지하고서 / 領湖山
세상을 아주 잊고 지냈지 / 與世相忘
곧은 도가 가슴에 있으니 / 直道在胷
다른 사람에게 어찌 굽히리오 / 寧屈於人
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산군지(靈山郡誌)》에서는 “공의 성격은 맑고 근신하고 곧으며, 뜻은 성리학에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아마 사실을 기록한 것이리라.
종유(從遊)한 사람들 중 두드러진 이로는 이한천(李寒泉) 형제ㆍ곽구곡(郭鷗谷) 부자ㆍ독오당(獨梧堂) 황협(黃悏)ㆍ국담(菊潭) 주재성(周宰成)ㆍ우졸(愚拙) 안신현(安信賢) 제공들이었고, 관찰사(觀察使) 이숙(李䎘)과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이 광심정을 두고 지은 시는 더욱 사람들에게 전송되고 있으니, 이것으로도 족히 공의 풍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세상 사람 이익으로 달려가는 이들 많지만 / 世多利騖
등한히 여기면서 싫어하였고 / 而閑之厭
또한 문장은 잘 하였지만 / 亦侈于文
실질에 힘쓰고 검소하였네 / 而實之儉
오직 맑고 곧고 삼가서 / 維淸介謹
배움은 자기에게서 구하였다네 / 學求諸已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 어찌 탓하랴 / 嗇名何尤
나의 명이 여기에 있다네 / 我銘在是
신해년(辛亥年,1911) 창산 조긍섭 쓰다.


【주석】
[주-D001] 백암공(白巖公) : 백암(白巖)은 조광계(曺光啓)의 호이다. 자는 내옥(乃沃),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벼슬은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주-D002] 광심정 처사(廣心亭處士) 송공(宋公) : 송지일(宋知逸, 1620~1675)을 말한다. 본관은 용성(龍城), 자는 휴재(休哉), 호는 광심정(廣心亭)이다.
[주-D003] 영산(靈山) :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일원에 있었던 조선 시대 고을 이름이다.
[주-D004] 길곡(吉谷) :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길곡면을 말한다. 광심정은 송지일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여기서는 광심정이 길곡의 강가에 있다고 했지만, 정확히는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길곡면 건너편인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 외봉촌마을에 있다.
[주-D005] 사동(射洞) :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 내봉촌마을을 말한다.
[주-D006] 이외재(李畏齋) : 이후경(李厚慶, 1558~1630)을 말한다. 자는 여무(汝懋), 호는 외재(畏齋),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아래 주 96의 이복재, 곧 이도자의 형이고, 정구(鄭逑, 1543~1620)의 문인이다.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임금을 호종해서 영사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저서로는 《외재집》이 있다.
[주-D007] 이복재(李復齋) : 이도자(李道孜, 1559~1642)를 말한다. 자는 지지(至之), 호는 복재(復齋)ㆍ양심헌(養心軒),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위의 주 95의 이외재, 곧 이후경의 형이고, 정구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복재집》이 있다.
[주-D008] 박무민당(朴无悶堂) : 박인(朴絪, 1563~1640)을 말한다. 자는 백화(伯和), 호는 무민당(无悶堂),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출신이다. 저서로는 《무민당집》이 있다.
[주-D009] 태창(泰昌) : 명(明)나라 광종(光宗)의 연호이다.
[주-D010] 명릉(明陵) : 조선 숙종(肅宗)의 능호이다. 숙종을 말한다.
[주-D011] 영산군지(靈山郡誌)에서는 …… 하였으니 : 《영산군지》는 《영산현읍지(靈山縣邑誌)》를 말하고, 여기서 들고 있는 송지일에 대한 인물평은 《영산현읍지》 〈인물(人物)〉에 보인다.[주-D012] 이한천(李寒泉) 형제 : 이한천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속(李涑)을 말한다. 호는 한천(寒泉),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저서로는 《한천집(寒泉集)》이 있다. 그의 동생은 미상이다.
[주-D013] 곽구곡(郭鷗谷) 부자 : 곽구곡은 조선 후기의 학자 곽융(郭瀜)을 말한다. 호는 구곡(鷗谷),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그의 아들은 곽세건(郭世楗, 1616~1686)이다. 곽세건의 자는 공가(公可), 호는 무위자(无爲子)이다.
[주-D014] 독오당(獨梧堂) 황협(黃悏) : 자는 낙부(樂夫), 호는 독오당,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저서로는 《독오당집》이 있다.
[주-D015] 국담(菊潭) 주재성(周宰成) : 1681~1743. 자는 성재(聖哉), 호는 국담(菊潭),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활약을 하였다. 저서로는 《용학강의(庸學講義)》, 《경의집록(經義輯錄)》, 《거가요범(居家要範)》 등이 있다.
[주-D016] 우졸(愚拙) 안신현(安信賢) : 호는 우졸,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주-D017] 이숙(李䎘) : 1626~1689. 자는 중우(仲羽), 호는 일휴정(逸休亭), 본관은 우봉(牛峯)이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문인이다. 병자호란 때 어린 나이로 포로로 심양에 끌려갔다가 돌아와 과거에 급제, 문신으로 큰 활약을 하였다. 이조 판서와 우의정을 지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주-D018]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 1654~1725. 자는 천장(天章), 호는 창설재(蒼雪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권벌(權橃, 1478~1548)의 5세손이고,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문인이다. 천거로 벼슬길에 나가 형조 좌랑 등의 벼슬을 지냈고, 그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창설집》이 있다. 권두경이 광심정을 두고 지은 시는 《창설집》 권3에 실려 있는 〈광심정에 적다〔題廣心亭〕〉이다.
[주-D019] 배움은 자기에게서 구하였다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라고 하였다.





출처 및 참조
함안루정록-함안문화원/대보사(2017.12.30.)
한국고전종합DB-암서집(巖棲集)-암서집 제27권/묘지명(墓誌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곽세건, 조긍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