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2 평암리 상평 음달마을 함안조씨 은봉재
진전면 평암리 705번지는 평암리 상평마을 음달에 위치한 함안조씨의 재실인 은봉재(隱鳳齋)가 있는 곳이다. 상평마을은 평암리의 좌측 편 가장 위쪽에 자리한 마을로 음달마을과 양달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입구 우측 언덕에는 느티나무, 팽나무, 소나무가 거의 붙은 상태로 있는데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의 이름은 송풍정(松風亭)이라 편액 했다. 상평마을회관 앞 마을입구에는 약간의 공터가 있고 마을회관 뒤쪽에 은봉재가 자리한다. 은봉재의 문은 굳게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었고 담장 밖에서 안쪽을 보려 했으나 절개지가 있어 위험하여 포기했다.
은봉재의 기문을 보니 상평마을 뒷산의 이름이 은봉산(隱鳳山)이라 하는데 여항산과 서북산의 중간 지점인 여항산마당바위가 있는 봉우리를 지칭하는 듯하다. 이 상평마을은 숨어있는 봉(鳳)새가 웅장한 날개를 펼칠 기회를 갖게 된다면 어떤 영웅이 탄생하고 이야기를 만들지 기대가 된다. 은봉재의 기문은 아래와 같다.
[원문]
隱鳳齋記
歲在攝堤格孟陬之上旬 趙君鏞運越峻險 余于一山精舍 問起居訖 因言曰運卽忠毅公大笑軒先生之后裔 五代祖處士公諱廷華 始卜居于郡南艅杭西平巖村 取氓淳俗震 土肥穀蕃 可以養親而裕後也 享年八十五而歿 隣里稱其孝 葬于隱鳳山下伏雉嶝從 曾祖諱正植 祖父性老 追思徽蹟營立數間齋舍未就而卒 某等謹述父祖之志肯構一屋子未有以記 環顧宗黨耈德而文者惟先生是己 願有以命名 而賜之記則爲惠大矣 敦請不己 余敬爲之復曰 隱鳳爲主舞鶴爲案 鳳與鶴俱可爲名 請以主山名銘曰 隱鳳齋何如 諸君居是齋奉先思孝 餘力學文 入而事其父兄 出而事其長上 進而翔于千洙 鳴于朝陽是爲立身揚名以顯其親者也 今雖與鳳俱隱而人之行 藏有晦道顯有時 勉勉成志業 以俟夫覽德 而下之斯可矣 遂書此爲隱鳳齋記
乙丑小春節 同黨人 進士 昺奎記
[해문]
은봉재기
섭제격(攝堤格)¹⁾의 맹추(孟陬)²⁾ 상순(上旬)에 조용운군(趙鏞運君)이 험준한 고개를 넘어 일산정사(一山精舍)로 나를 찾아와서 기거(起居)³⁾를 묻기를 마치고는, 인(因)하여 말하기를 운랑(運郞)은 충의공(忠毅公)이신 대소헌(大笑軒) 선생의 후예(后裔)이시니, 5대조이신 처사공(處士公) 휘(諱) 정화(廷華)께서 처음으로 함안의 남쪽 여항면(艅杭面)의 서쪽 평암촌(平巖村)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으니, 백성들이 순박하고 풍속이 진(震)⁴⁾하며 땅이 기름지고 곡식이 번성하여 가히 부모를 섬기고, 후손들에게 물려 줄만 하였기 때문이었다.
「향년(享年) 85세로 돌아 가셨으니 이웃마을에서 까지 그분의 효도를 칭찬하였으며, 은봉산(隱鳳山)아래의 복치등(伏雉嶝)에 장례를 모셨다. 증조의 휘(諱)는 정식(正植)이요, 조부는 성로(性老)이신데 아름다우신 행적을 추념하고 사모하여 두어간(間)짜리 재사(齋舍)를 영립(營立) 하시다가 성취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저희들이 삼가히(조부님의) 뜻을 계술(繼述)하여 집 한 채를 지었으나 기문(記文)이 있지 아니하니, 두루 종당(宗當)을 돌아보아도 나이가 있고 덕(德)이 있으면서 문장(文章)도 있는 사람은 오직 선생뿐이니 바라건대 재실(齋室)의 이름을 명명(命名)하여 주시고 기문(記文)을 지어 주신다면 은혜로움이 크겠습니다.」하면서 돈독(敦篤)하게 요청하기를 멈추지 아니 하였다.
내가 공경히 그를 위하여 대답하기를 「그 지역이 은봉(隱鳳)이 주봉(主峯)이 되고 무학산이 안산이 되니 봉(鳳)과 또는 학(鶴)이 모두 가히 이름을 삼을 만하지만 청컨대 주산(主山)의 이름으로서 이름 하여 은봉재(隱鳳齋)라고 하는 것이 어떠하느냐 하고, 제군들이 이 재실(齋室)에 거(居)하면서 선조를 봉양(奉養)하며 효도를 생각하고, 남은 힘이 있다면 학문을 하여 집에 들어오면 그 부형(父兄)을 섬기고 나가면 그 장상(長上)⁵⁾을 섬긴다면 나아가면 천길이나 날아오를 것이고, 울면 조양(朝陽)⁶⁾에 까지 들리리니, 이것이 입신하여 양명하는 것이 되고 그 어버이를 나타나게 하는 것이 되리라. 지금은 비록 봉(鳳)과 함께 은거하니, 사람의 행동이나 장소(藏修)가 도(道)가 있으며, 숨겨지고 나타남이 때가 있나니, 힘쓰고 힘써서 뜻과 업(業)을 성취하여 그날을 기다리며, 대저 덕(德)을 관람하면서 내려가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 좋을 것이다,」 드디어 이것을 써서 은봉재(隱鳳齋)의 기문을 삼노라.
을축(1925년)년 소춘절(小春節:10월)에 동당인(同黨人) 진사 병규(昺奎)⁷⁾지음
【주석】
섭제격(攝堤格)¹⁾ : 태세(太歲)가 寅에 있는 것, 인(寅)
맹추(孟陬)²⁾ : 봄을 셋으로 나눌 때, 그 첫 부분. 즉 음력 정월(正月)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기거(起居)³⁾ : 안부(安否)를 묻다.
진(震)⁴⁾ : 위엄이 있는
장상(長上)⁵⁾ : 지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
조양(朝陽)⁶⁾ : 산의 동쪽(詩經 大雅篇)
병규(昺奎)⁷⁾ : 조병규(趙昺奎) 조선말기의 유학자, 휘(諱) 병규(昺奎), 자(字)는 응장(應章), 호(號)는 일산(一山), 정절공 어계선생의 15세손, 집의공 무진정선생의 13세손, 청희당공의 5세손, 청희당께서 함안면 괴산에서 대산 현 산인면 입곡리(입향조)로 이거하시었고, 부친 여음공 휘(諱)성각의 아들이다. 조선 헌종 12년 1846년 2월 4일~ 신미년(1931년) 향년 86세의 일기로 별세하셨으며, 평생을 경학연구와 저작활동에 집념하시었고, 후진양성에 심혈을 경주하시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문학 작가의 지침서인 온지록을 간행하여 선현들의 시를 정선하여 수록하고, 선조들의 유문(遺文)을 집대성하여<괴산 세록을 발간하였음.
출처 및 참조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2004.1)/삼덕정판인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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