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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구산면 상마전리 순흥안씨 구산재 龜山齋

천부인권 2019. 7. 6. 19:31

2019.7.5 구산면 상마전리 구산재 입구

 

창원시 구산면 마전리 349(구산면 마전길 319-5)에는 구산재(龜山齋)가 위치하는데 해발고도는 30m이고, 「위도 35°07′48″N 경도 128°31′53″E」이다.


구산재(龜山齋)는 4개의 사각기둥으로 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좌측에 두 개의 방을 넣고 앞에는 좁은 마루를 놓았으며, 우측에 1칸의 대청을 만들었다. 지붕은 일본식 기와를 얻었으며 팔작지붕이다.
구산면 상마전(上麻田)마을에 위치한 구산재(龜山齋)는 순흥안씨 함안 중시조 취우정(聚友亭)의 후손인 안광업(安光業,1587~1674)을 기리기 위해 지은 재실로 그의 묘소가 이곳 뒷산에 있다. 안광업(安光業)의 자손들은 함안군 산인면 부봉리에 세거를 이루고 있으나, 구산면이 옛 칠원현에 속했던 곳이라 이곳에 묘를 썼을 것으로 추정한다. 상마전마을 뒷산의 정상을 넘으면 창원 진동공동묘지가 펼쳐진다.

 

2019.7.5 순흥안씨 구산재

 

구산재 편액

 

구산재 주련

 

주련
龜山起伏阡松蒼  구산의 소나무 우거진 묘소에서 엎드려 일어나니
春雨秋霜感慕長  봄비와 가을 서리가 오래도록 그리워 생각나게 한다.
宗支世世宜競業  종파의 자손들은 업을 쫒아 대대로 화목하고
移孝爲忠繼舊章  부모에 효도하듯 나라에 충성하는 옛 본보기를 이어가리.

 

2019.7.5 구산재중건기 편액

 

[원문]
龜山齋重建記
昌原治之南三十里許 龜山之原 有義士楓灘 安公諱光業 衣屢之藏 而其子姓爲之重建 丙舍是龜山齋也 舊有齋歲久傾圮 哲宗癸亥更以構成 庚寅大亂齋化灰燼 諸後承夏之合議 己亥春迺就其址仍其礎 而復起之三架四楹制度 頗軒敞矣 日商旬商珪二君 奉其事蹟錄一冊而來 請余以記 余其可辭 窃夫公當壬辰兵燹 奉母避亂母夫人姜氏罵賊 而守貞㤠自縊死 丁酉島夷 又入寇其兄夢良矢盡死於火 之戰公甚憤惋泣血欲家 國之雠 卽赴忘憂堂郭將之陣 奮勇擊賊斬獲甚多時自上喜其忠勳 除修副尉宣敎郞 及丙子胡亂公倡義 而北上中路聞 南漢下城之痛哭 而歸不看 曆築亭楓灘之上閉門 自靖以沒世 而至今楓灘有遺墟碑 推此可以知公生平義烈之偉蹟矣 更顧安氏諸公以先祖忠義之心 爲心循循準則 隨時隨處入孝出忠 各盡其職分之而當然 爲則是而以繼述之道也 亦將以有光於門戶也大矣 是爲之書
辛丑 重陽節 巴山 趙鏞極 記

 

[해문]
구산재중건기
창원에서 남쪽 30리쯤 되는 구산언덕에 의사(義士) 풍탄(楓灘)¹⁾ 안공광업(安公光業)²⁾의 옷과 신발을 감추어 놓았으니³⁾ 그 자손들이 병사를 다시 짓고 이를 구산재(龜山齋)라 하였다. 옛날에 재실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기울어 무너져 철종(哲宗) 계해(癸亥)년에 다시 지었는데 경인(庚寅)년 큰 난리에 재실이 불타 잿더미가 됨으로써 후손들은 근심하다가 의논을 모아 기해년 봄 그 터 주춧돌에 다시 3칸을 법칙대로 세웠으니 자뭇 집은 높고 시원하였다, 하루는 상순(商旬), 상규(商珪) 두 사람이 그 서적 책 한권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는 그것을 사양하다가 훔쳐보니 대저 공은 임진년 전쟁을 당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했는데 어머니 강씨는 도적(倭寇)을 꾸짖고 굳게 절개를 지켜 스스로 목을 베고 세상을 떠났다. 정유년에 섬오랑캐(島夷)⁴⁾들이 또 들어와 그의 형(兄) 몽양(夢良)은 화살이 다해 불속 전쟁에서 죽음을 당했다. 공은 심히 분하여 탄식하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나라의 원수를 보복하고자 곧 망우당 곽장군진에 뛰어들어 용기를 날려 적을 쳐서 목을 벰이 심히 많아 임금께서 기뻐하였고 그 충훈에 부위선교랑을 제수하였고 병자호란에 공께서 창의하여 북으로 올라가던 도중 남한하성(南漢下城)⁵⁾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 풍탄 위에 정자를 지어 문을 닫고 스스로 편안히 하였다. 세상을 떠남으로써 지금 풍탄 위에 유허비가 있으니 이는 가히 미루어 공이 살아 있을 때 의열의 큰 자취를 알 것이다.
지금 공의 세대는 이미 삼백여년이요. 그 후예들은 자주자주 재실을 수리함을 이었으니 그 정과 효도는 돈독하다 했다고 일컬을만하다. 다시 돌아보건대 안씨 여러분들은 선조의 충의심에 마음이 돌고 돌아 법이 되어 수시 수처에 들면 효도하고 나아가면 충성하여 각각 그 직분을 당연히 다 해내었으니 즉 이는 선조께서 하시던 업을 이어 펴는 도이고 또 장래 집안에 빛이 큼이니 이에 서하노라.
신축년 9월 9일 파산 조용극이 기록함.

 


【주석】
풍탄(楓灘)¹⁾ : 안광업의 호이기도 하지만 함안군 산서리 산 145번지의 풍탄진(楓灘津)에 얽힌 전설을 말한 것이다.
안공광업(安公光業)²⁾ : 안광업(安光業;1587~1674)은 순흥인으로 자는 혁보(赫甫), 호는 풍탄정(楓灘亭)이다. 임란(壬亂)을 당하여 피란길에 외적을 만나 어머니가 죽임을 당하매 시신을 업어다가 안장하였다. 국가와 부모의 불구대천의 외적에 보복코자 정유재란 때는 곽재우(郭再祐)의 진영에 나아가 분전하여 공을 세웠다.
뒤에 국가로 부터 크게 은전을 받았고 현종(顯宗) 조에는 통정대부용양위부호군(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된다.
옷과 신발을 감추어 놓았으니³⁾ : 장사한 산소
섬오랑캐(島夷)⁴⁾ : 임진왜란 이후 정유년에 다시 전쟁을 일으킨 왜구(倭寇)을 말한다.
남한하성(南漢下城)⁵⁾ : 인조 15(仁祖;1637)년 1월 27일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군에게 항복을 한 것.

 

 

 

 

 

출처 및 참조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2004.1)/삼덕정판인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