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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진동면 다구리 도만마을 전주이씨 모담재 慕潭齋

천부인권 2019. 7. 8. 07:54

 

 

 

2019.7.5. 진동면 다구리 도만마을 전주이씨 모담재 풍경

 

이번 구산면과 진동면 일원의 재실을 탐방하면서 도만마을이 진동면 다구리에 속한 곳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관심이 없으면 자신의 눈앞에 있어도 아무 소용없는 것이 세상 이치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 계기가 됐다.
진동면 다구리 54-2번지는 이번에 새롭게 전주이씨효령대군파(全州李氏孝寧大君派) 무산부정(茂山副正) 석담공종회(石潭公宗會)에서 모담재(慕潭齋)라는 재실을 지은 곳이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16m를 가리키고 「위도 35°07′10″N 경도 128°31′45″E」라 알려 준다.

이 재실이 이곳에 옮겨오게 된 경위는 모담재기(慕潭齋記)에서도 밝히고 있는데 구복리에 로봇랜드의 개발로 재실과 묘소 등이 수용되어 이주가 불가피하게 됐었다. 마침 이곳이 석담공으로부터 내려오는 종중 땅이라 보상받은 돈으로 재실을 짓고 묘재에 참석하는 종중들에게는 거마비를 지급하고 있다고 했다. 어찌보면 석담공종회가 제2의 부흥기를 맞은 셈인데 이번 기회에 평소에는 여행객들에게 싼 가격으로 재실을 빌려주는 팬션같은 사업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한옥으로 지은 좋은 재실을 놀려두면 결국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이 집인데 여행객들에게 빌려주어 계속 사람이 관리할 수 있는 제도가 정착된다면 전주이씨의 이름도 알리고 모담재에서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쌓이면 이 또한 적선(積善)이 아니겠는가?
아래에는 모담재기와 여재정기 및 여재정중수기 등 모담재의 기록들을 함께 기록해 둔다.

 

 

 

 

여재문(如在門)

 

 

 

여재문(如在門) 편액

 

 

 

모담재(慕潭齋) 모습

 

 

 

 

주련
億昔明宣融盛時 옛날 명종 선조 융성한 시대를 생각해 보면
江湖賢俊總無遺 강호의 형인 준걸들은 모두 내버려 두지 않았다.
寢郞歸陵辭徵辟 임금의 부름으로 현릉에 나아가 돌아온 것은
正是秋潭水石奇 바로 이 뛰어난 자연 속에서 은거함이다.

 

 

 

 


모담재기(慕潭齋記)
모담재는 진동면(鎭東面) 도만(道萬)에 있는 선조 석담공(石潭公)을 경모하는 뜻에서 지은 재실이다.
본래 석담공의 재실은 구산면(龜山面) 구복리(龜伏里) 임상등(林箱嶝)에 묘소가 안장 되어 계셨고 그 산하에 여재정(如在亭)으로 있었으나 국가사업 계획¹⁾에 따라 이 지역이 수용(收用) 되어 이곳으로 자리 잡아 좀 더 규모가 크게 되었으며 묘소도 이장(移葬) 하게 되어 세상의 변천에 따라 화장(火葬)하여 경내에 숭조당(崇祖堂)을 지어 유해(遺骸)를 모시게 되었다.
이곳은 뒤에는 준엄(峻嚴)한 산이 솟아있고 좌우로 청룡 백호를 거느리고 병풍처럼 둘러싸 있으며 앞에는 바다가 호수를 이루었고 멀리 이어지는 산들의 봉우리가 그림처럼 연이어져 있어 지나가는 길손은 누가 보아도 명당이라고 아니 할 수가 없을 것이니 조상께서 미리 점지한 곳이 아니겠는가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금(禁)할 길이 없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복잡(複雜)하여 짐에 따라 조상의 선례에 따라 묘하(墓下)에서 묘제를 지내기가 어렵게 되어 재실에서 제사를 모셔야 하는 세상이 되어 석담공을 비롯하여 이남(二男) 이신  휘(諱) 덕상(德祥) 호(號) 춘포공(春浦公) 손(孫) 휘 지신(之新) 호 한천공(寒泉公) 증손 휘 시창(時昌) 호 광남공(匡南公) 4대를 함께 모시기로 하였다.
여재정(如在亭)이라는 이름은 논어에서 말한대로 제사(祭祀)를 지낼 때는 조상이 함께 계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모시라는 뜻이니 자손된 도리로 어찌 가르침을 소홀히 하겠는가 그러한 뜻에서 대문을 여재문(如在門)이라고 정하였다.
공은 종친이면서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신을 숨기고 부모를 봉양하고 예를 지키며 독서하며 지내셨다. 늦게 현릉 참봉(參奉)을 제수 받아 그 직을 물러난 이후에도 자연과 더불어 사류(士流)들이 부러워하는 도를 걸어셨다 함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선생이 묘갈명에서 밝힌바 있다.
춘포공(春浦公)은 어려서부터 골격(骨格)이 비범하고 총명하였으며 학문뿐 아니라 무예에 관심이 많아 성인(成人)됨과 더불어 무과(武科)에 올라 수문장(守門將)이 되었으며 壬辰倭亂 때 상(上)을 도와 공을 세웠고 후일에도 많은 공을 세워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까지 올랐다. 광남공(匡南公)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이 지극(至極)하여 숙종(肅宗) 때 노인을 우대(優待)하는 법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에 올랐다.
후일에 친부상을 당하여 묘지를 찾던 중 노승(老僧)으로부터 장지(葬地)를 계시(啓示) 받았다는 것은 그 효심에 감복된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와같은 휼륭한 조상을 모시는 후손으로서 그 위업을 생각할 때 사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여 재실 마당을 들어설 때 경근(敬謹)한 마음을 가지고 조상을 한번 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억만(億萬)번 바뀌어도 우리 후손의 조상에 향하는 마음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리라 끝으로 재실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불초(不肖) 나를 도와준 수정(秀正) 중규(仲揆) 서규(瑞揆) 종문의 노고를 부기(附記)하여 둔다.
서기 2011년 10월 12대손 삼재(參宰) 삼가기록하다.

 

【주석】
국가사업 계획¹⁾ : 2007년 6월에 당시 마산 구산면 일대 99만㎡의 땅에 5년간 7천억을 투입하여 '덴마크 레고랜드'에 버금가는 테마파크형 로봇랜드 사업을 시행했다. 그러나 12년 동안 돈 먹는 하마처럼 줄기차게 사업만 하고 있는 곳이다.

 

 

 

 

 

[원문]
如在亭重修記
吾璿源一派之居 鎭北梨木者 世以儒術相傳 其先有石潭公 諱楗當宣仁之際 以文學行義見重一時 薦除寢郞而旋 賦遂初晦影山澤 不求榮達 寧沒世而無悔 其自靖不拔之節 勉菴崔先生 己闡發於阡道之碣 其葬在龜山之龜伏林箱嶝乾原 而構翼然四楹於榮下曰 如在亭者 其建已八十年 梧壞難之子孫 合力補修恢復舊貫 而倫帝秀容秀烈鳳揆秀讚收宗議 託余文以記 其事夫祖先雖遠 而子孫能繼 其蹟紹述之而恢張之 以永其傳使 鄕里稱之曰 石潭公之賢宜昌厥後 則是豈非佳子孫乎 公之爲隱居行誼潛光不衒名 故其蹟無所大著然惟 其幽潛之德積於冥冥 而發於久遠 故子姓繁衍克纘厥緖 則今其後人之善於紹述 而勤於重修者 無非公適風餘敎之所及也 扁以如在者取孔子訓也 子孫之於祖先一氣流通 而臨祭有如在之誠 則油然發追慕之情 而著存於愛慤之 致者無時而不在也 況濟濟子孫之裸 薦於霜露丘龍之際者 其瞻慕如在之思爲如何哉 余觀公超然名利明哲保身之智足 爲一家貽謨垂統之祖 則子孫之追慕 固無間於遠近 而流澤深者 其志義風韻 而思所以不墜然後亭慕尤遠且久也 所謂追慕者 豈專在於桑梓之 敬芬苾之虔 而已惟溯念 其之可保永世 而爲篤慕如在之實也是亭也 多林壑之媚海灣之麗 則第竢秋凉隨革宗攀登 而觀賞泓崢之勝尙未晩也 姑先此以記之
己巳孟秋李雨燮記

 

[해문]
여재정중수기
우리 선원일파(璿源一派)가 진북(鎭北) 이목(梨木)에 거주하면서 대대로 유학을 서로 권하였는데 그의 선조 석담공(石潭公)이었다. 공의 휘는 건(楗)이니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당시에 학문과 행의로서 그 시대에 중망을 드러내었다. 천거로 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치사하고 돌아와 산택에서 자취를 숨기고 영달을 구하지 아니하여 차라리 세상에 자취가 없어도 후회하지 아니하고 스스로를 지키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절개가 있었다.
면암 최선생이 이미 묘갈문에 드러낸 것처럼 그의 산소는 구산(龜山)의 구복(龜伏) 임상등 건원좌에 있는데 재실이 나래를 편 듯 묘 아래에 3칸이 있는데 여재정이라 한다. 재실이 건립 된지 이미 80년이 되니 재목이 썩고 손괴되어 지탱하기 어려워져 자손들이 협력하여 보수하여 옛 모습으로 회복시켰다.
윤재(倫帝) 수용(秀容) 수열(秀烈) 봉규(鳳揆) 수찬(秀讚)씨가 종의를 거쳐 나에게 그 사실을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선조는 비록 머나 자손은 능히 그의 자취를 이어받아 계승하여 넓게 펼쳐 그 전함을 같이하면 향리에서 칭송을 듣게 되는 것이다.
향리에서 말하기를 석담공의 어짊은 마땅히 그 자손이 창성할 것이라 하니 이것이 어찌 자손의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공은 다만 은거하여 행의를 숨겨 빛을 내지 않고 그 이름을 팔지 않은 고로 그의 발자취가 크게 드러난 바는 없지만 그의 그윽한 덕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쌓여져 멀고 오래도록 발하니 그러므로 자손이 번창 하게 넓게 퍼져나가는 실마리가 되니 지금 후인이 그의 풍류를 잘 이어 받아 그 실제의 중수를 부지런히 하는 것이 공의 유풍과 가르침의 나머지가 아님이 없는 것이다. 편액을 여재라 한 것은 공자의 가르침을 취한 것이다.
자손은 조상의 한 기운이 흘러서 통하는 것이니 제사에 임하여 조상이 계신 듯 정성이 있은 즉 유연한 정인이 일어나 조상을 추모하는 정을 발하니 사랑과 정성을 다하여 나타 계신 듯한 것이니 어느 때이고 조상은 자손의 마음에 계시지 않음이 없다. 하물며 많은 자손이 서리와 찬 이슬이 내리는 산소의 언덕에서 제사를 올리는 것은 우러러 사모함이 계실 듯하여 후손의 조상 생각함이 이와 같아야 한다.
내가 볼 때 명리에 초연하고 천리에 밝아 몸을 보존하였고 지혜는 족히 한 가정을 위해 교육을 드리웠으니 조산은 곧 자손이 추모하여 진실로 멀고 가까운 차이가 없으니 그 은택이 흘러 깊이 그 사모함이 더욱 멀리 하고 또한 유구한 것이다.
추모라는 것은 어찌 오로지 고향에서 공경하고 향기 높은 학문에만 삼갈 뿐이겠는가? 오직 거슬러 그의 뜻과 의리와 풍취를 생각하여 조상이 해온 바를 실추시키지 않은 연후에 이 여재정을 영세토록 보전하며 독실이 사모하여 계신 듯 하는 결과 일 것이다.
이 정자는 숲속 골짜기의 아름다움과 굽이치는 바다의 수려함을 다 지닌 즉 이것이 준공 되어 청량한 가을에 일에 따라 종친들이 모여 이 정자에 올라 높고 넓은 경치를 완상한 즉 아직 이 효행이 늦은 계획이 아닐 것이다. 우선 이런 이유로 기록한다.
기사(1989)년 음력 7월 이우섭(李雨燮) 기록하다.  

 

 

 

 


[원문]
如在亭記
如在亭在於舊漆原治南四十里許 龜山之南 迺我宣祖石潭公墓下齋宿之所 而其曰如在子取魯論所 謂齊如在語也 竊惟公當宣仁之盛際不求社進 隱居讀書惟志自適 晩際寢郞旋 賦遂初寧沒 世而無悔其謹於難進 易退之節者 勉菴崔先生之所 闡發於碣文者已備矣 噫士之志行雖足爲一世之矜式 舊非建功當世 以蒙不祧之恩 則必五世而祧 是固典禮之常 而非子孫之所 敢容私矣 之祧已久而所可得以寓慕者 惟有霜露之節 墟墓之間 歲一薦祭 而已夫墓之興 墓其禮雖有等 其爲報本追遠 而致其如在之誠則一也 叔季以降此禮漸靡 惟知物之爲文 而不知誠之 爲質往往有愆度失義慍褻不敬 故禮歸於虛而祭之義失可不懼乎 若我宗族之升 是亭者宜各思義深究乎 禮之由起而精白 其心以致 其誠然後洞屬然將事 于墓一如廟儀 則緖幾於 其如如在歟 朱子曰 我之氣卽祖先之氣所以才感必應 雖云只是一個氣 豈有不誠能感應子乎 此至訓也 盍相勉哉亭絰始於己酉春訖 于其秋不肖及康源氏以宗父兄之命 旣幹其嗣茸 而水圖無以窮者俟 後人之賢勞焉
庚戌八月上澣十代孫康歡謹撰

 

[해문]
여재정기
여재정은 옛날 칠원 동원에서 남서쪽 10리에 구산(龜山)의 남쪽에 있다. 이곳은 우리 선조 석담공(石潭公)의 산소 아래 재숙(齋宿)하는 재실이다. 그리하여 여재라고 하는 뜻을 취한 것은 논어에 말한 제사를 지내실 때에는 살아 계신 듯 하라는 말이다. 저으기 생각하니 공은 선조(宣祖) 인조(仁祖)의 성세에도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구하지 않고 자신을 숨기고 은거하여 독서하면서 오직 마음을 자적하며 지냈다. 늦게 참봉에 제수 되어 벼슬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차라리 타고난 천부(天賦)를 따라 죽어도 후회가 없음은 세상에 나아가기는 쉽고 물러나는 것은 어려우니 삼가 그런 절자(節者)이다. 면암 최익현선생이 묘갈문에 이미 밝혀 드러내어 갖추어 놓았다.
아! 슬프도다. 선비의 그러한 의지가 비록 한 세대이지만 본보기로 만족하도다. 진실로 당세에 공을 세우는 것은 아니나 임금으로부터 은혜를 입는 것은 즉 5세가 조묘를 하는 것이 진실로 옛 법의 상례이니 이는 자손이 감히 사사로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로서 공이 돌아가시고 지금 2백년에 이르러 가묘에 제사한 것이 오래라 사모함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서리와 찬이슬이 내리는 계절이면 산소에서 한해에 한 번씩 제사를 올리니 묘 제사나 가묘의 제사와 더불어 그 예는 비록 차등이 있으나 조상의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원하여 조상이 이곳에 계신 듯 하여 정성을 다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세상이 말세로 하강하여 이런 예가 점점 미약해지고 오직 물질로서 꾸밈만 알고 정성이 바탕이 됨을 알지 못하여 왕왕법도에 허물이 있고 예의를 잃어 태만하고 함부로 하여 공경하지 않은 즉 예는 헛된 곳으로 돌아가게 되니 제사의 뜻을 잃게 된다면 조상에 두렵지 않겠는가? 만약 우리 종족이 이 정자에 올라 마땅히 깊이 궁구한다면 예의가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 그 마음이 순백하게 되니 그런 정성을 다한 연후에 모든 친척에 그 정성이 통하여 장차 묘제사나 사당의 의례가 한결 같아서 거의 조상이 이곳에 계신 듯 할 것이다. 주자가 말씀 하시기를 나의 기운은 조상의 기운이니 재질의 감응이 반듯이 조상에 응한다. 하니 다만 한 개의 기에도 정성스럽지 못하고서 조상에게 감응이 되겠는가?
정자는 기유넌 봄에 시작하여 그해 가을에 마치니 불초 및 강원씨 종문의 부형의 명으로 그 책임을 다하여 그 일을 잇게 하여 영원히 하고 무궁하기를 도모하였으니 후인들의 어진 노고를 기린다.
경술(1910) 8월 상한 10대손 강환(康歡)이 삼가 찬한다.

 

 

 

 

 

조상의 유해를 모신

숭조당(崇祖堂)

 

출처 및 참조
모담재실기-전주이씨 석담공종회/이삼재-한진오에이시스템인쇄사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2004.1)/삼덕정판인쇄사